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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덕 Sep 30. 2024

제4장  인생의 전환점

제1절 공군사관학교 국어과 교수 선발 시험 합격    

1980년 4월 졸업과 동시에 공군 소위로 임관한 나는 비행 훈련을 받기 위해 대전에 있던 212 비행대대 훈련 과정에 입과했다. 장교였지만 훈련을 받는 훈련생이었기에 여전히 생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광주 민주화 항쟁’을 ‘광주 사태’로 지칭하면서 이것이 북한 간첩의 소행이라고 보도했다. 그렇지만 나는 비행 훈련에 집중하느라 여기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T-41 훈련기를 타기 전 우리 훈련 장교들은 많은 교육을 받았다. 영어로 된 지침서를 외우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처음 훈련기를 탔다. 자동차도 운전해 본 적이 없었기에 비행기가 움직이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신기한 기분은 잠시였다. 비행 교수의 지적과 호통에 정신이 없었다. 비행 훈련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구타 등 공포 분위기의 훈련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비행에 재능 있는 동기생들을 보니 부럽다 못해 낙담이 되었다.

어느 날 나를 지도하던 비행지도 교수님이 나에게 조종사가 되는 것보다는 열심히 공부해서 교수가 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보통 다른 학생들은 때려가면서 조종사가 되게 하는데, 나는 때려도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조종사의 꿈을 포기하려니 아쉬웠으나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비행 지도 교수님께 비행 훈련을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다. 

이후 나는 비행 훈련에서 탈락한 몇몇 동기생들과 함께 예비군 훈련단에 배속되었다. 정식 특기를 배정받을 때까지 이곳에서 예비군 훈련을 담당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사관 출신답게 맡은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자 노력했다. 비로소 장교가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이 근무하던 동기생이 공군사관학교에서 국어과 교수 요원을 모집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서류 제출 마감일이 내일이라고 했다. 나는 부랴부랴 서류를 준비하여 제출하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험공부를 했다. 시험 과목은 국어와 영어였다. 시험 당일 공군사관학교에서 나는 1년 선배를 만났다. 그 선배 역시 국어과 교수가 되고자 신청하였다고 했다. 선배와 경쟁하게 되어 부담이 되었으나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나는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서울로 올라갔다. 시험에서 선발된 사람들은 서울 대방동에 있던 공군사관학교에서 편입학 시험을 준비하게 했다. 영어는 토플 책으로 혼자 공부했고, 국문학에 대해서는 공군사관학교 국어과 신형기 교수님에게서 배웠다. 교재는 장덕순 교수님의 저서 <<한국문학사>>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선배가 나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전에도 몇몇 선배들이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지원했는데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합격한다면, 공군사관학교 출신으로는 20년 만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어서인지 합격자 발표일까지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서울대 편입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 주었다. 천하를 얻은 것처럼 기뻤다. 


제2절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편입학     

1981년 3월, 나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2학년으로 편입학했다. 당시 2학년 학생은 복학생을 포함하여 20명 정도 되었다. 이들은 모두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게 되어 있어서 그런지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덕분에 새로운 단체에 들어가는 어색함은 피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내가 위탁교육을 받으러 온 공군 소위라고 소개를 하니 모두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서울대에서 공부하면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전광용 교수님의 첫 수업시간이었다. 소설 <꺼삐딴 리>로 잘 알려져 있던 교수님이 두툼한 외투를 입고 들어오시자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작품을 통해서만 알고 있던 유명 소설가의 강의를 직접 듣게 된 것이 행운처럼 여겨졌다. 마침 교수님은 나의 장인과 동향이어서 나중에 따로 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위탁 교육을 받으러 왔다고 했더니 반겨주면서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해 주셨다. 교수님의 날카로운 눈과 코가 인상적이었다.

전광용 교수님으로부터는 <1950년대 소설>에 대해 배웠다. 교수님은 50년대 소설가 중 한 작가씩 택해서 발표하라고 해서 나는 소설가 서기원에 대해 발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나는 서기원 씨를 직접 찾아가 인터뷰까지 했었는데, 그는 나를 반기면서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어느 날, 전광용 교수님은 나를 또 한 번 감탄케 하였다. 그는 수업시간 중에 “창작을 하고 싶은 학생들은 서라벌 문창과로 가라.”라고 하면서, “여기는 창작하는 곳이 아니라 학문을 하는 곳”임을 강조했다. 나는 이때 뜨끔했다. 국문과에 들어왔으니 평소 쓰고 싶었던 시를 써 보리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 내 주위에는 창작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다.

서울대에 들어오면서 내가 제일 걱정했던 것은 학교 성적이었다. 공군사관학교에서는 교수가 되려면 최소 평균 학점 3.0 이상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당시 대학은 ‘졸업정원제’라는 제도 때문에 정원보다 많은 학생을 뽑은 후 성적이 나쁜 학생들은 졸업을 못 하게 한다고 했다. 이런 상황이라 성적에 대한 부담감이 컸다. ‘우리나라 수재들이 모여 있는 서울대에서 과연 내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나로 인해 공군사관학교의 명예가 더럽혀질까 봐 더욱 그랬다. 

나는 수업 시간에 강의 내용을 열심히 들으며 노트에 적었다. 수업이 없는 쉬는 시간에는 도서관으로 가서 그날 배운 내용을 복습하고, 예습까지 했다. 이렇게 한 달 정도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서관에서 우연히 같은 과 학생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나는 기껏해야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을 복습하고 예습하고 숙제나 하는 정도였는데, 그가 읽고 있던 책은 수업과는 상관이 없는 제목조차 처음 보는 책이었다. 나이가 5년이나 아래인 그가 대단한 학식의 소유자처럼 느껴졌다. 

이때부터 나는 다른 학생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학생들과 식사도 같이 하고 술도 마시면서 친하게 지냈다. 그 덕분에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대학이란 스스로 공부하는 곳이라는 깨달음이었다. 학교 수업이란 동기부여 정도의 의미를 지닐 뿐이며, 필요한 것은 학생 스스로 찾아내어 알아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나는 여러 개의 공부 모임을 만들어서 학생들과 함께 공부했다. 당시 서울대는 총 142학점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전공 이수 학점은 63학점이었다. 나는 공군사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총 180학점을 이수했었다. 군사훈련이나 내무성적 학점을 빼도 140학점 정도 되었다. 그런데 국어국문학과 관련된 전공과목은 하나도 없었다.

서울대에서는 전공과목 63학점을 이수하고 나머지 학점은 마음에 드는 과목을 수강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유명한 교수님들의 강의를 다양하게 선택하여 수강했다. 철학, 미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사, 불문학, 영문학 등의 과목을 수강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하니 어려움은 있었으나 공부에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공부가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공부하는 방법을 나름대로 터득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과 의도적으로 어울리다 보니 술 마시는 일이 많아졌다. 술이라고 해야 주로 막걸리였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학교 근처 식당에 가서 막걸리를 마셨다. 내 생애에 있어서 이때 가장 술을 많이 마셨던 것 같다. 덕분에 돈도 많이 썼다. 나이도 제일 많았고, 학생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돈을 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가 돈을 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때 소위 월급이 12만 원 정도였으나 학생들에 비하면 부자인 셈이었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대학생들이 과외를 할 수 없도록 했다. 그래서 그런지 돈이 없어 어렵게 지내는 학생들이 많았다. 물론 비밀과외를 하는 학생도 간혹 있었지만 아주 소수에 불과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서울대를 다니던 1980년대는 ‘데모’의 시대였다. 당시 학생들은 전두환 정권에 끊임없이 저항했고, 정부는 이를 강하게 탄압하며 학생들을 잡아갔다. 어떤 때는 깡패 같은 젊은이들이 학생들과 같이 학교 건물에 들어와서 복도에서 ‘동전 따먹기’ 놀이를 했다. 대학이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말은 하나의 사치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학생들의 돌멩이와 전경의 최루탄이 오고 가는 캠퍼스는 흡사 전쟁터와 같았다. 사관생도 시절 막연히 낭만적이리라 생각하였던 대학 축제는 시위대와 전경들의 격전으로 끝났고, 격전 후 대학의 모습은 처참했다.

서울대에서 공부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학생들의 시위에 관심이 없었다. ‘돈 많은 집의 자식들이 팔자가 좋아서 대학 가더니 공부하기 싫어서 데모만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까닭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학생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반정부 투쟁을 하다가 퇴교를 당하거나 심지어는 죽기까지 하는 학생들을 보고서는 아픔과 함께 분노를 느꼈다. 나는 사관학교 출신이었지만, 전두환 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투쟁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학교에서 조용히 공부하다가 졸업하면 충분히 출세할 수 있는 학생들이 잠깐 시위하다가 잡혀 퇴교당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학생들의 시위가 거세졌기 때문인지 당시에는 형사나 순경이 길에서 행인들의 가방을 검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 나 역시 학교 근처 신림동에서 순경에게 검문당했다. 그 순경은 체격이 레슬링 선수처럼 좋았다. 그는 나를 붙잡으면서 내 가방을 열어보라고 했다. 내가 자꾸 거부하니까 그는 다짜고짜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나를 둘러메고 파출소까지 갔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봐서 창피했지만 다칠까 봐 가만히 있었다.

파출소에는 마침 파출소장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내 장교 신분증을 보여주면서 항의했다. 내가 공군 중위인데, 저 순경이 막무가내로 내 가방을 조사하려고 해서 거부했더니 나를 둘러메고 여기까지 데려왔다고. 그때는 군의 힘이 셌던 시절이라서 그랬는지 파출소장은 나에게 사과하면서 나를 메고 온 순경을 나무랐다.

나는 파출소 문을 나서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실 내 가방에는 당시 유행했던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영역본과 이를 우리말로 번역한 노트가 있었다. 읽어도 내용이 이해되지 않아서 번역하던 중이었다. 당시에는 막스 베버의 책도 ‘막스’라는 이름 때문에 금서가 되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루카치’라는 이름 때문에 문제가 생길까 싶어서 가방 검사를 거부했던 것이다.

4학년이 되면서 나는 전공 선택 문제로 잠시 고민했다. 국어국문학과에는 크게 국어학, 국문학 두 전공이 있었다. 학부 때에는 전공 구분 없이 모두 배워야 하지만 석사과정부터는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선택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학부 지도교수였던 이기문 교수님이 나에게 국어학을 공부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국어학을 공부해 보기로 했다. 마침 나와 나이가 같은 복학생과 그의 여자 친구도 국어학을 공부하겠다고 해서 도서관 연구실에서 같이 공부했다. 교재는 영어로 된 언어학 관련 책이었다. 내용이 좀 어려웠으나 여학생의 영어 실력이 뛰어나서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일이 생겼다. 같이 공부하던 복학생이 과 대표가 되었다가 얼마 후 학생 시위 참여죄로 경찰에 의해 잡혀갔다. 그리고 퇴교 처분을 받았다. 그러자 그 여학생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휴학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노동운동을 하러 공장에 위장 취업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때 한 학생이 문학 공부를 하자고 했다. 혼자서 공부하는 것이 재미없었던 나는 그때부터 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문학 공부는 재미있었으나 쉽지 않았다. 공부해야 하는 문학 이론은 모두 외국 이론이었다. 외국어 문제는 사전을 찾아가면서 천천히 해석하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 이론의 바탕이 된 철학이나 사상이었다. 철학이나 사상서는 원서도 어려웠지만, 번역서도 쉽지 않았다. 국문학을 연구하는 데 꼭 이렇게 외국 이론을 공부해야 하나 싶었으나 당시 학계 분위기가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추운 겨울 어느 날이었다. 나는 전공 문제를 상의하러 김윤식 교수님을 찾아갔다. 당시 김윤식 교수님은 국문학 분야에서 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학자였다. 연구실에 들어서니 교수님이 책상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셨다. 그는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당황했다. 어디 앉으라는 이야기도 없이 이유부터 물으시니 서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교수님의 지도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지도 학생 문제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셨던지 갑자기 화를 내셨다. 학과에서 당신에게는 문제 학생들(시위하다가 수배당한 학생들)만 지도하게 했다는 것이다. 마치 야단맞는 듯했다. 학생들이 교수님을 존경하면서도 어려워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연구실 안은 스팀이 잘 나와 꽤 더웠다. 외투를 입고 목도리까지 한 채 30분 이상 서 있었더니 온몸이 다 땀에 젖었다. 그런데 그는 내가 나올 때까지도 지도교수가 되어 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1983년 겨울 어느 아침이었다. 잠이 깨어 일어나려고 하는데 등이 너무 아파서 바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가족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일어나서 학교에 갔다. 그런데 숨이 너무 차서 학생회관에 있는 진료소에 갔다. 증상을 얘기했더니 의사는 가슴 사진을 찍어보자고 했다. 찍은 사진을 보더니 의사는 ‘기흉’이라고 하면서 빨리 입원하라고 했다.

그때 나는 기흉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기흉은 폐에 구멍이 나서 빠져나온 공기가 폐를 압박하여 폐가 쪼그라드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석사과정 입학시험 때문에 지금은 입원하지 않겠다고 했다. 의사는 기가 찼는지 시험과 목숨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고 하면서 웃었다. 나는 둘 다 중요하다고 했다. 공군사관학교 교수가 되려면 반드시 석사과정 시험에 합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서울대 석사과정만 졸업하고도 대학 전임교수로 임명되었기 때문인지 석사과정 응시 인원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경쟁도 심했다. 당시 나는 영어는 토플 참고서, 불어는 수업시간에 배웠던 교재를 외우다시피 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사는 지금 병원에 안 가면 곧 죽을 것이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나는 화곡동에 있는 국군수도통합병원에 갔다. 군의관은 진찰해 보더니 기흉이 맞다고 하면서 빨리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시험이 2주 후에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 그러자 군의관은 임시 처치하면 3일 후에 퇴원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안심하고 입원하여 시술받았다.

퇴원 후 학교에 갔더니 평소같이 공부했던 학생들이 석사과정 전공시험공부를 같이 하자고 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나를 도와주려는 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공부하면서 시험 예상문제에 대한 모범 답안을 만들었다. 어떤 학생은 지도교수에게 힌트를 얻으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그냥 돌아오기도 했다. 시험 전날에는 한 친구의 집에 모여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면서 작성한 모범 답안을 외웠다.

다음 날 아침 시험을 봤는데, 전공 시험 문제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영어와 불어 시험도 그런대로 잘 본 것 같았다. 석사과정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이제야 비로소 공군사관학교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는 안도감에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며칠 후에 학과 사무실 조교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윤식 교수님이 나를 지도학생으로 받아주셨다는 내용이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학생들과 함께


제3절 약혼과 결혼

1984년 1월, 나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시험에 합격하자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남자는 20대 후반, 여자는 20대 중반에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공군사관학교 동기생들도 반 이상이 결혼했다. 게다가 얼마 후면 공군 대위로 진급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동생 친구의 어머니가 아내를 소개해 주었다. 우리는 코리아나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아내는 반듯해 보였다. 양측의 소개가 끝나자 소개하신 분들이 먼저 일어나겠다고 했다. 나는 일어나서 감사 인사를 드렸다. 이때 한 분이 내 귀에다 대고 "기회가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니 잘 생각해 보세요."라고 짧게 속삭였다. 이 말을 들으니 이 사람을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커피숍에서 나와 경복궁 쪽으로 걸어갔다. 마침 눈이 내려 분위기도 좋았다. 걸어가면서 아내에게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좋아한다면서 나 먼저 불러보라고 했다. 내가 먼저 <평화의 기도>라는 노래를 부르자 아내가 알토로 따라 불렀다. 기대하지 않았던 화음이 이루어지자 감동되었다. 아내는 내가 좋아했던 정신여고 노래선교단 출신이라고 해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삼청공원까지 이야기하면서 걸어갔다. 저녁 무렵이라 출출했으나 주위에는 마땅한 식당이 없었다. 허름한 칼국수 식당만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칼국수를 시켜 먹었는데 맛이 없었다. 그런데 아내는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내가 놀라는 시늉을 하자 아내는 점심을 못 먹어서 배가 고팠다고 웃으며 말했다. 헤어지면서 다음에는 동대문 스케이트 장에서 만나자고 했더니 아내는 좋다고 했다. 아내도 내가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며칠 후에 동대문 실내 스케이트장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아내는 피겨스케이트를 탔고, 나는 롱스케이트를 탔다. 아내는 스케이트를 잘 탔지만, 나는 약간 어설펐다. 하지만 아내가 손을 잡고 안에서 중심을 잡아주었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고 회전을 잘할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아내는 맛있는 샌드위치와 따뜻한 커피를 준비해 와서 나를 감동케 했다.

그날 밤 나는 아내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런데 장모님이 잠시 집에 들어오라고 했다. 장인께서는 나에게 앉으라고 하더니 다짜고짜 "우리 딸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나는 엉겁결에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사실은 제가 키가 작아서 키가 큰 배우자를 원했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장인은 "앞으로 결혼할 마음이 있으면 바로 약혼하고, 아니면 그만 만나게!"라고 말씀하셨다. 

너무 급작스런 제안이라 순간 당황했지만 나는 약혼하겠다고 했다. 처음 본 나를 사위로 받아들이려는 장인이 고맙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함경도 북청 출신의 장인은 한 번 더 다짐을 두었다. "만약 약혼식을 한 후 파혼하게 되면 모든 비용은 자네가 책임져야 하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책임을 지겠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결혼을 약속했다. 

1984년 2월 1일, 나는 공군사관학교에 출근했다. 그런데 실망스러운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군기술고등학교 교관으로 발령이 났다는 소식이었다. 누군가가 공군사관학교로 오기 위해 나를 공군기술고등학교로 보내게 한 것 같다고 교수부장님이 귀띔해 주었다.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명령에 따라 나는 대전에 있는 공군기술고등학교로 갔다. 그리고 공군기술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공군기술고등학교의 교육 환경은 별로 좋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어린 나이에 군복을 입고 ‘원산폭격’ 같은 벌을 받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학생들에게 벌을 주고 있는 중위의 태도가 너무 불량해 보였다. 나중에 그 중위를 불러 충고를 했더니 이후 그는 나를 피하는 것 같았다.

당시 나는 부대 내에 있는 장교 숙소에서 지냈다. 평일에는 장교 숙소에서 지내면서 아내가 준 음악 테이프를 자주 들었다. 이광조의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였다. 처음 들어본 노래였지만 들으면 흥이 났다. 얼마나 자주 들었는지 나중에는 그 테이프가 늘어져서 소리가 이상해졌다.

주말에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서울로 갔다. 그런데 한 번은 아내에게 대전으로 오라고 했다. 내가 사는 곳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내는 대전에 와서 구경 좀 하다가 저녁을 먹고 서둘러 서울로 올라갔다. 나중에 들으니 늦게 다닌다고 장모님에게 혼이 났다고 했다. 그래서 이후에는 내가 서울로 갔다.

그런데 어느 날, 기흉이 재발했다. 나는 구급차에 실려 대전에 있는 국군통합병원에 입원했다. 입원할 때 몸무게는 53킬로그램이었다. 놀란 아내에게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서울대에 다닐 때에도 기흉 시술을 받은 적이 있으니 염려되면 결혼을 취소해도 좋다고 했다. 장인 장모도 결혼 전이니까 결혼을 취소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나와 결혼하겠다고 했다. 감사했다. 

우리는 5월 5일에 약혼식을 했다. 약혼식은 옥인동에 있는 아내의 집에서 했다. 양가 부모와 친구들이 참석했다. 잔디가 깔린 마당에 자리를 펴고 상을 차렸다. 날씨도 화창했다. 우리는 약혼 기념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노래도 불렀다. ‘젊은 연인들’이라는 당시 유행하던 노래였다. 아내는 이번에도 알토로 화음을 맞추었다. 노래가 더 풍성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7월 어느 날 부대 행정실에 갔더니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발령이 났다고 했다. 기뻤지만 그동안 같이 근무하던 동료들에게는 미안해서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8월에 서울로 이사했다. 공군사관학교 교관이 된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말 그대로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존경하는 선배 교수님들과 같이 근무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하지만 학부과정만을 마치고서 가르치려니 꽤 버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 무엇보다 생도들이 잘 따라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아내에게 ‘내가 장남이기 때문에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고 했다. 홀어머니에 시동생이 둘이어서 쉽지 않은 조건이었지만 아내는 기꺼이 모시겠다고 했다. 고마웠다. 나는 아내에게 시집올 때 혼수 같은 것은 필요 없고 몸만 오면 된다고 했다. 우리는 12월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이 사실을 당시 직속상관인 인문처장에게 보고했다. 그는 특유의 경상도 목소리로 “할 거 다 했나?”라고 물었다. 나는 당당히 “네! 다 했습니다.”라고 크게 대답했다.

결혼식은 12월 15일에 대방동에 있는 공군회관에서 하기로 했다. 결혼하는 사람이 많아서 결혼식장을 예약하기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토요일 오후 마지막 시간으로 잡았다. 그리고 청첩장을 만들라고 해서 남이 하는 것을 보고 대충 만들어 장인께 보여드렸다. 장인은 미리 상의하지 않고 만들었다고 엄청 화를 내셨다. 민망하기도 하고 화도 났으나 대사를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아 반성도 했다.

결혼식 때에는 큰아버지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참석했다. 축하객은 많았으나 대부분이 신부 하객이었다. 우리보다 2~3배 많은 것 같았다. 장인이 사업도 하셨고, 교회 장로님이라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민망했다.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새삼 부끄러웠다.

결혼식은 잘 진행되었다. 내가 섬기던 교회 부목사님이 주례를 섰고, 아내의 교회 담임목사님이 축도를 해 주셨다. 교회 성가대원들의 축가와 친구 신범순의 축시 낭송이 있었다. 결혼 서약 때에는 내가 너무 큰 소리로 대답해서 하객들이 많이 웃었다. 예식 순서가 모두 끝나고 ‘신랑 신부 퇴장’이라는 말이 나오자 나는 서둘러 아내를 데리고 퇴장했다. 그때 동기생들이 예식용 칼을 들고 도열해 주었는데, 이들은 예복을 갖추지 않고 도열했다는 이유로 나중에 선배 교수에게 불려 가 혼났다고 했다.     

결혼식을 마친 후 우리는 큰아버지가 빌려준 자가용을 타고 한강을 구경하다가 여의도에 있는 식당에서 사진 찍느라 수고해 준 친구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장충동에 있는 신라호텔로 갔다. 이 호텔은 아는 분이 예약을 해 주었는데 꽤 괜찮았다. 방에는 결혼 축하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많은 사람의 관심과 사랑이 감사했다.

다음 날 아침 창문 밖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결혼 때 눈이 오면 잘 산다는 말이 생각났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김포공항으로 가서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다. 민간 비행기를 타 보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당시에는 신혼여행을 대부분 제주도로 갔었다. 그래서 그런지 비행기 안에는 신혼부부들이 많았다. 우리는 제주도에 도착한 후 예약한 호텔로 갔다. 군에서 운영하는 호텔이었는데도 고급스러웠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내가 가르치고 있던 생도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주도에 8명이 놀러 왔는데 호텔에 잠깐 들르겠다고 했다. 아내에게 이야기했더니 당황하는 것 같았다. 부랴부랴 준비해서 로비에 가니 생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 축하를 위해 호텔까지 찾아온 생도들이 고마웠다. 사관생도를 가르치는 교수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3박 4일의 여행을 마치고 우리는 옥인동에 있는 처가에 갔다. 신혼여행을 갔다 오면 처가에 먼저 들르는 것이 예의라고 했기 때문이다. 처가에서 하룻밤 잔 후 준비한 음식을 가지고 본가인 신정동 집으로 갔다. 양가 식구들이 모여 감사 예배를 드렸다.

신정동 집은 방이 3개 있는 신축 연립 주택이었다. 결혼 전 은행 융자를 받아 산 집이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집을 가져본 지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무척 좋아하셨다. 결혼 전에는 나와 어머니가 큰 방을 쓰고 나머지 방은 동생들이 나누어 썼지만, 결혼 후에는 어머니와 사업을 하는 둘째가 큰 방을 쓰고 작은 방은 대학에 다니는 막내가 사용했다. 그리고 나머지 중간 방은 우리 부부가 사용했다. 그런데 장롱을 들여놓은 바람에 우리 부부가 누울 수 있는 공간만이 겨우 남았다. 장인은 우리 방을 보고서 둘이 싸워도 갈라설 일은 없겠다고 하면서 웃었다.

흔히 신혼 때 깨가 쏟아진다고 했는데 어느 날 아내의 얼굴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사정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해가 갔다.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는 어머니가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했었다. 그래서 나와 둘째는 월급을 받으면 생활비를 어머니에게 드렸다. 어머니는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오셔서 그런지 아끼고 저축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내는 힘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집에 세탁기가 있음에도 어머니는 전기세, 옷 손상 등의 이유로 손으로 빨래를 하게 했다. 이제까지 어머니도 손으로 빨래를 해 왔기 때문에 며느리의 세탁기 사용을 마땅치 않게 여긴 것 같았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내가 가장 힘들어한 것은 어머니에게 살림에 필요한 돈을 받는 일이었다.

아내의 고충이 이해가 되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살림은 며느리에게 맡길 것을 권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섭섭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배드민턴과 게이트볼 라켓을 사 드리고 동호회를 찾아가서 회원으로 가입시켜 드렸더니 좋아하셨다. 이후 어머니는 열심히 운동하러 다녔고 아내는 살림에 전념할 수 있었다. 

1985년 1월, 아동상담을 전공한 아내는 숙명여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날 아내는 앞으로 10년 동안 나를 밀어줄 테니 나중에 자기가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10년 밀어달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내는 경희사이버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여 한국어교원 2급 자격증을 받음으로써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에서 나와 함께 한국어교육학과 교수가 되었다.   


약혼 기념사진

결혼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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