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학교 교수의 정년이 60세라는 것은 법으로 정해져 있다고 했다. 실제로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수는 60세까지 근무했다. 그리고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육사 교수들은 대부분 대령으로 진급했다. 게다가 육사 교수부장은 별 하나까지 달았다.
그런데 해군과 공군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대개 한 기수에 한 명이 대령으로 진급했고, 별은 한 사람도 달지 못했다. 그리고 계급 정년 정책에 따라 중령은 50대 초반, 대령은 50대 중반에 전역해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공군사관학교 교수들은 연구보다는 진급에 더 신경을 썼다. 대령이 되면 중령보다 3년 정도 더 근무할 수 있고 대우도 더 좋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지고 싶지 않은 자존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진급 시기가 되면 교수들은 서로 진급이 잘 되는 보직을 받고 싶어 했다. 이러한 현실로 인해 좋았던 동기생 관계가 나빠지기도 했다.
당시 내 동기생은 모두 6명으로 다른 기수에 비해 많은 편이었다. 이 중에 잘 되면 2명까지 진급할 수 있다고 했다. 적어도 4명은 진급할 수 없었다. 진급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으나 나는 진급을 위해 노력하기보다 생도교육과 연구에 매진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나에게 교수부장을 찾아가서 보직을 부탁하라고 한 후배 교수도 있었으나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교수가 되고자 한 이유는 훌륭한 학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2002년에 진급과는 거리가 먼 어학처장으로 발령이 났다. 이른바 한직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싫지 않았다. 당시 어학처에는 한국어, 영어, 일어,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등 다양한 나라의 어문학 전공자들이 있었다. 대부분 우수한 재원들이었다.
나는 이들과 함께 공동으로 논문을 쓰기도 했다. 어떤 때에는 외부 교수들을 초청하여 소규모의 세미나도 개최했다. 덕분에 나는 어학처의 많은 인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두 권의 연구서를 연달아 출판함으로써 힘든 진급 시기를 의미 있게 잘 보낼 수 있었다.
2003년 가을 어느 날 저녁 늦게 진급 결과 발표가 났다. 동기생 중 2명이 진급했다. 나는 즉시 아내와 함께 차를 몰고 집 근처 교외로 나갔다. 그곳에서 간단히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근처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른 후 호텔에서 하룻밤 잤다. 아내와 나 자신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이튿날 학교에 가니 진급하지 못한 나머지 동기생들은 심적인 타격이 큰 것 같았다. 연구실 문을 잠그고 지내는 동기생도 있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은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 나는 진급 발표 이후에도 평소와 같이 생도교육과 연구에 몰두했다. 이렇게 바쁘게 지내다 보니 힘든 시기였지만 오히려 재미있게 지낼 수 있었다. 게다가 아이들이 대학에 입학해서 기쁨은 더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대학까지는 보내줄 테니 대학과 전공은 자신의 적성에 맞게 선택하라고 하면서도 예체능계는 가지 말라고 조건을 달았었다. 왜냐하면 예체능계 대학은 돈이 많이 들고 졸업 후 취직도 쉽지 않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관심이 없었는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딸이 자기는 음악을 하면 평생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가족회의 때 각자 자신의 소원을 말하는 자리에서였다. 나는 딸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서 즉시 허락했다. 하지만 좋은 대학교에 가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예능계 대학을 핑계로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딸의 학교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다. 사춘기 때에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한 번은 죽고 싶다는 내용의 일기를 써서 우리를 긴장시켰다. 그리고 가수 신화 그룹을 좋아하여 쫓아다니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와 아내에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중3 때에는 직접 댄스 그룹을 만들어 학교 축제 때 공연한다고 매일 춤 연습을 하곤 하였다. 우리는 아이가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질까 봐 걱정했다.
그런데 딸아이는 작곡 공부를 하면서 학교 공부도 열심히 했다. 학교 성적이 갈수록 좋아졌다. 3학년이 되어서는 성적이 상위권에 속하게 되었다. 목적의식이 생기니까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작곡 공부였다. 나와 아내는 서울에 있는 작곡가 선생님을 찾아갔다. 작곡가 선생님은 아내의 고교 친구였는데 꽤 유명한 분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딸과 몇 마디 나누어보더니 우선 청주에서 기초 공부를 하고 오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아는 교수님으로부터 청주에 살고 있는 대학원생을 소개받았다. 딸은 이 학생에게서 6개월 정도 지도를 받았다. 그리고 2학년 때부터는 서울에 있는 입시 전문 선생님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아내는 1주일에 한 번씩 딸을 데리고 서울에 갔다. 운전은 나도 가끔 했지만 대부분은 아내가 했다. 아내는 운전하고 딸은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고 공부를 했다. 두 사람은 파김치가 되어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운전하다가 너무 졸려서 도중에 고속도로 휴게실에 들러 잠시 눈을 붙였는데, 꿈에서 졸음운전을 하다가 깜짝 놀라 깬 적이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이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나 자신도 여러 가지 일로 바빠서 별로 도와주지 못했다. 그런데 3학년이 되어서는 1주일에 두 번씩 서울에 가야 했다. 얘기를 들으니 어떤 학생은 지도받으러 부산에서도 온다고 했다.
힘든 생활이었지만 딸은 잘 견뎌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2003년에는 수원대에서 열린 작곡 대회에 참가해서 은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입시가 몇 달 남지 않은 시기에 딸아이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남편과 함께 외국에 나가게 되었다고 하면서 다른 선생님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서울대 출신 선생님이니 서울대에 지원한다면 자기보다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아내는 걱정했지만 나는 딸에게 떨어지면 재수를 할 수 있도록 해 줄 테니 한번 도전해 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딸도 서울대에 지원하고 싶었는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수능시험이 끝나자 나는 딸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 신림동에 방을 구했다. 조그만 방에는 책상, 의자, 옷장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딱 한 사람이 누울 공간이 남아 있었다. 여자아이를 이런 곳에 있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이 시기에 레슨비 등으로 돈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딸은 이 사정을 알았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으나 불평 없이 잘 지냈다. 그리고 서울대 작곡과에 합격했다. 정말 기뻤다. 딸이 자랑스러웠다. 우리 가족은 집 근처에 있는 양식집에서 식사하며 딸의 합격을 축하해 주었다.
아들은 딸보다 3년 어리다. 성격은 고지식한 편이다. 기억나는 일이 있다. 1997년 연구원으로 일본 쓰쿠바 대학에서 연수할 때의 일이다. 이때 장인, 장모를 모시고 쓰쿠바 산에 있는 야외 온천에 갔다.
나는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에게 좋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좋다고 해서 너도 나중에 엄마 아빠 모시고 이런 곳으로 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아들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싫냐고 물었더니 “그게 아니라 내가 돈이 없잖아......”라고 대답하여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종종 공수표를 날리기도 하지만 아빠를 즐겁게 해 주는 딸과 아주 대조적이다.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더 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어느 날 남일초등학교에 다녀온 아들이 집에 와서 말하기를, 집으로 오다가 자기 다리가 경거망동해서 넘어졌다고 했다. 당시 아들은 한자성어 만화를 재미있게 보고 있었는데, 아마 자기 나름대로 이해를 한 것 같았다. 마침 같이 있던 손님들이 그 말을 듣고 웃자 아들은 무언가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부끄러워하며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아들은 초등학교 때 게임을 아주 좋아했다. 언젠가 서울에서 아들과 둘이서 차를 타고 청주로 오게 되었다. 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는데, 아들은 게임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 자기에게 게임 프로그램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고 했다. 신기해서 한번 해 보라고 했더니, 이후에는 게임에 중독되어 가는 것 같았다. 아내는 아들이 게임 프로그래머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게임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많았다. 그래서 아들은 시간을 정해놓고 거실에 놓인 컴퓨터로 게임을 해야 했다.
중학교 때에는 게임을 좋아한 나머지 게임 프로그래머가 되기 위해 전산 고등학교로 가겠다고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좋은 방법 같지 않았다. 대학은 졸업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잘못하면 아이가 빗나갈 것 같아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의견을 들었다.
이때 마침 공군사관학교에 방위로 들어온 게임 프로그래머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반가워서 아들의 문제를 상의할 겸 그의 의견을 들어 봤다. 그도 아들과 같은 생각으로 전산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해서 전문대학에 다니고 있으며, 졸업 후에는 4년제 대학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아들은 수긍이 되었던지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청주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컴퓨터 공학과에 들어가겠다고 하던 아들은 2학년 말에 진로 문제로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아들은 미대 시각디자인과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다고도 했다. 나는 찬성했다. 아들이 좀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아들과 함께 청주고등학교에 가서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선생님은 아들이 야간 자습 시간에 미술학원에 다닐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아들을 데리고 미술학원에 갔다. 학원 선생님은 아들 성적이면 서울대 미대도 들어갈 수 있다고 하면서 매우 반가워했다. 나는 바로 등록했다. 아들은 다소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결정했으면 빨리 실행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나는 아들을 데리고 불고기를 사 주며 열심히 해 보라고 격려해 주었다.
수학능력시험이 끝나자마자 나는 아들을 데리고 홍대 근처에 있는 미술학원에 가서 등록했다. 그리고 학원에서 소개해 주는 집에 찾아가 아들이 머물 방을 계약했다. 그곳에는 아들처럼 숙식하며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의 그림을 보면서 아들은 약간 주눅이 든 것 같았다.
나는 일반 학과 성적은 아들이 더 나을 것이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이후 아들은 홍대 미대에는 떨어지고 서울산업대학교(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시각디자인과에 합격했다. 딸과 마찬가지로 아들도 재수하지 않고 국립대에 합격한 것이다.
그런데 2006년 10월 아내가 충북대학병원에서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유방암 초기라면서 병원에서는 빨리 입원하라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아들의 수능시험이 11월에 끝나니 그때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 보니 스트레스가 심해 그런 것 같아 미안했다.
아들의 수능시험이 끝나자 아들은 서울로 보내고 아내는 서울 일원동에 있는 삼성병원에 입원하여 수술받았다. 유방암 2기였는데 널리 퍼져 있어서 전절제해야 했다. 수술은 잘 되었다고 했다. 의사는 이제부터 잘 관리해야 한다고 했다. 아내는 수술받은 후 잘 이겨내는 것 같았다.
아내는 퇴원 후에 처가에서 지내며 방사선 치료와 함께 항암 치료를 받았다. 나는 직장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청주에서 지내다가 주말이면 서울로 갔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울기 시작했다. 잘 이겨내는 줄 알았는데 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무엇보다 여성으로서 한쪽 가슴이 없다는 사실이 속상한 모양이었다.
처음에 아내는 딸이 살고 있는 서울 자취방에서 지내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러나 나와 어머니가 살고 있던 청주 아파트에 와 보더니 마음을 바꾸었다. 아내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청주로 다시 내려와서 항암 치료를 했다.
항암 치료의 부작용은 지독했다. 아내는 구역질이 나면 화장실에 들어가 구토를 했다. 어느 날에는 머리를 빗는데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머리가 모두 빠졌다. 그래서 가발을 사용했다. 그리고 아내는 가끔 짜증을 냈다. 그러면 나도 덩달아 화를 냈다. 짜증을 받아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때 나와 아내는 매일 같이 새벽기도를 위해 교회에 나갔다. 대부분의 암 환자들은 재발할까 봐 불안해한다. 아내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때 기댈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라고 생각했다. 새벽마다 기도하면서 많이 울었다.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며 재발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항암 치료가 끝나고 나니 마음이 안정되어 갔다. 우리는 3월에 안수집사, 권사로 임직 되었다. 이후 교회에서 운영하는 제자훈련과 같은 여러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다. 내가 신앙생활을 가장 열심히 한 것은 이때였다.
그런데 불행한 사건이 다시 일어났다. 2007년 봄 무렵이었다. 밖에서 운동하고 있는데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내는 울면서 사기를 당한 것 같으니 빨리 집으로 오라고 했다. 집에 와서 이야기를 들으니 기가 막혔다. 범인들이 전화로 아들을 납치했다고 하면서 돈을 보내지 않으면 당장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범인들이 아들을 때리는 소리와 아들의 비명을 들려주었다. 정신이 혼미해진 아내는 범인이 시키는 대로 인터넷 뱅킹을 통해 돈을 송금해 주었다. 그것도 통장에 돈이 별로 없어서 마이너스 대출 한도인 3,000만 원까지 모두 보냈다. 그리고 나중에야 아들과 전화한 후 사기당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혔다. 속이 상해서 아내에게 화를 냈더니 아내도 화를 내며 더욱 크게 울었다. 순간,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었다. 암 투병하느라 세상일에 관심이 없었던 아내는 ‘보이스 피싱’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 없다고 했다. 나는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한 후 경찰서에 연락했다. 경찰서에서는 몇 가지 물어보더니 돈을 찾기는 힘들 것이라고 했다. 이후 어떤 재판장이 ‘보이스 피싱’을 당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사기를 당한 아내가 조금 이해되었다.
속이 상해서 친한 친구인 이득선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까 저녁을 사 주면서 힘내라고 500만 원을 주었다. 내가 사양을 하자 자기도 예전에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아는 사람으로부터 돈 1,000만 원을 받았는데 크게 위안이 되었다고 했다. 나 역시 크게 위안을 받았다. 이후 나도 아는 친구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내가 도움받은 이야기를 하면서 300만 원을 준 적이 있다. 그 친구 역시 당황해하며 사양하다가 할 수 없이 받으면서 고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