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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덕 Oct 10. 2024

제7장  명예전역과 새로운 길의 모색

2003년 가을 대령 진급자 발표 이후 나는 전역 이후 할 수 있는 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50대 초반의 나이에 연금만 받으며 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공부한 것이 아깝기도 했다. 그러나 50대 초반의 나이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잘 아는 교수로부터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당시 외교통상부 산하기관인 이 재단은 해외에 한국어와 한국학을 보급하기 위하여 해외 대학에 객원교수를 파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재단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더니 마침 인도네시아대학교에 파견할 객원교수를 선발하고 있었다. 

나는 시험 삼아 서류를 제출해 보았다. 그런데 얼마 후 재단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2명을 선발해서 해당 대학에 2명을 추천하는데 내가 1순위로 추천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2주 후에는 내가 최종 선발되었으니 출국 준비하라는 연락이 왔다.

합격 소식을 듣고 기쁘기도 했으나 걱정되었다. 당시 나는 현역이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먼저 공군사관학교 교수부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런데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교수부장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며 교장에게 보고했다. 

교장 역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공군본부에 상신하도록 했다. 그러자 공군참모총장은 ‘공군사관학교 교수가 해외 대학에서 외국인을 가르치는 것은 공군사관학교의 명예를 높이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칭찬과 함께 나를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총장은 국방부에 상신하도록 지시했다.

우려했던 바와 달리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나는 비행기 표를 예약하는 등 출국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공군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국방부로부터 해외 대학 파견을 승인해 줄 수 없다는 공문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유는 나의 해외 대학 파견이 사전에 계획되어 있지 않은 사업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담당 장교인 해병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선처를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여러 번 사정하다가 홧김에 행정소송을 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그랬더니 이튿날 학교본부 교무처장인 후배가 찾아와서 국방부에서 학교를 감사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했다. 속이 드러나는 협박에 화가 났으나 나로 인해 학교가 시끄러워지는 게 싫었다.   

나는 속이 상하기도 했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전역 이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다 싶었다. 이후 나는 해외 대학 파견 사업에 지원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했다. 주로 나는 영어 회화 공부를 했다. 매일 새벽 영어학원에서 공부한 후 학교에 출근했다. 그리고 1년에 한두 번 학회 등에서 논문을 발표하고 책도 출판하였다.

그리고 6개월 빨리 명예 전역을 신청했다. 전역 예정일은 2008년 12월 말이었으나, 하루라도 빨리 전역해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6월 30일 예비역 대령으로 명예 진급했다. 전역식은 참모총장 참석하에 공군본부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분으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마침 미국 공군사관학교 생도였던 조카가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다. 모든 것이 감사했다.

이 무렵 나는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태국의 치앙마이 대학에 2년간 파견할 객원교수를 뽑는다는 공고문을 보게 되었다. 나는 곧 지원하였다. 전역 후 첫 번째 도전이었다. 얼마 후 연락이 왔다. 내가 1순위로 추천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보통 1 순위자가 뽑힌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 2~3주 후 다시 연락이 왔다. 치앙마이 대학에서는 2 순위자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2 순위자는 치앙마이 대학에서 10년 정도 한국어를 가르쳐 왔기 때문에 신설 학과에는 나보다 태국 생활 경험이 많은 사람이 더 나으리라 판단했다는 것이다.

실망했지만 기회는 아직 많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다음 기회를 기다렸다. 그런데 얼마 후 슬로바키아 대학에서 1년간 가르칠 객원교수를 뽑는다는 공고문을 접하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슬로바키아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고 요구 서류를 제출했다. 전역 후 두 번째 도전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잘 아는 교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신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했으며, 내가 1 순위자로 선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최종 선발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유는 지난해 슬로바키아 대학에서 가르치던 교수가 1년 더 연장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럴 것 같으면 왜 공고를 하였는가 하는 불만과 무언가 속은 것 같은 느낌에 화가 났다. 그러나 이미 끝난 일로 따져보았자 속만 상할 것 같아 참고 말았다. 

이렇게 무언가 될 듯하면서도 연거푸 실패하자 아내는 실력만으로는 안 되는 것 같다면서 포기하라고 하였다. 이런 말을 하는 아내가 미웠으나 한편으로는 이해도 되었다. 그래도 포기하기는 싫었다. 두 번이나 실패했지만 두 번 모두 실력은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 번만 더 도전해 보고 실패하면 포기하겠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얼마 후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새로운 공고문을 게시하였다. 인도네시아대학교에서 가르칠 객원교수를 뽑는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즉시 지원하였다. 세 번째 도전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이번에도 1순위로 추천되었다고 했다. 기쁘기도 했지만 불안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대학교는 현역 시절에 선발된 적이 있으나 갈 수 없었던 학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8년 12월 중순에 나는 인도네시아대학교 객원교수로 최종 선발되었다는 통지서를 받았다. 너무나 기뻤다.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 주었다. 그런데 재단에서는 새 학기가 2월 1일에 시작하니 늦어도 2009년 1월 중순까지는 인도네시아로 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마음이 바빴다. 그런데 비자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우리는 2009년 2월 19일에 인도네시아행 항공기에 탑승했다. 새로운 길이 시작되었다.    


전역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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