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제안, 반둥으로
2014년 말에 지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반둥에 있는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Universitas Pendidikan Indonesia)에서 한국어교육학과를 개설하려고 하는데 도와줄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흔쾌히 그리하겠다고 했다. 당시 나는 인도네시아대학교에서의 임기가 끝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나라 대학에 지원할 것인가 생각이 많았다. 아내는 84세의 노모를 모시고 다른 외국으로 가는 것은 무리라고 했다. 내 생각에도 그럴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침 이렇게 희소식이 온 것이다.
며칠 후 나는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를 찾아가서 디디 수끼야디 어문학부 학장을 만났다. 1954년에 설립된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는 오래전부터 학교 내 언어교육원(Balai Bahasa)에서 한국어를 가르쳐 왔는데, 이제는 어문학부에 한국어교육학과를 개설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것이 자신의 꿈이라고도 했다.
나는 기꺼이 도와드리겠다고 했다. 그는 보수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했다. 나는 일단 재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 한국국제교류재단(KF), 그리고 한국국제협력단(KOICA) 등에 도움을 요청해 보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한국어교육학과는 한국어 교사를 양성하는 곳이라 한국에서도 지원해 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디디 학장과 나는 재인도네시아 한국 대사와 한국국제협력단 단장을 직접 만나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한국국제교류재단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다행히도 모두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객원교수 1명, 한국국제협력단에서 한국어 전공 단원 1명을 지원해 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런데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는 객원교수로 파견되고 싶으면 선발 시험에 다시 응시하여야 한다고 해서 나는 5월경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6월에 선발 시험에 합격했다는 통지서를 받았다. 그래서 부랴부랴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근처에 있는 집을 구한 후 7월 초에 이사했다.
학과 개설을 둘러싼 긴장
반둥으로 이사한 후 나는 학과 설립을 위한 준비에 매진했다. 가장 어려운 일은 한국인 강사를 구하는 일이었다. 정식 교수 채용이 아니었고 강의 수당도 현지인 수준의 월급밖에 줄 수 없다고 해서 난감했으나 수소문 끝에 한국인 3명을 현지 채용했다.
한 사람은 국어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자카르타에서 살고 있는 여성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국문학 석사학위를 가지고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어학원에서 한국어 강사로 있던 남성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나의 아내였다. 아내는 한국에 있을 때 대학원에서 아동상담을 전공했으나, 인도네시아에 와서는 경희대 사이버대학에서 한국어교육 학사과정을 이수하여 2급 교사 자격증을 받았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인도네시아인 1명(학과장)과 한국인 5명이 한국어교육을 담당하게 되어 우리는 커리큘럼을 만들고 수업 계획서도 작성하였다.
그런데 8월 초가 되어도 학과 설립은 확정되지 않았다. 8월 5일 대학 총장 선거가 끝나야 설립 여부가 결정된다고 했다. 총장 후보 중 한 분은 한국어교육학과 개설을 찬성하고 있지만, 다른 한 분은 반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9월 1일부터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학과 설립 자체가 아직 불확실하다고 하니 내심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한국어교육학과 개설에 찬성하는 분이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한국어교육학과 개설이 정식으로 확정되었다. 이에 한국어교육학과에서는 3일 동안 면접시험을 통해서 53명의 학생들을 선발하여 9월부터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학술단체 결성과 학술 활동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나는 학교 수업 이외에 많은 활동을 했다. 인도네시아대학교에서 근무할 때에는 학과장의 권유에 따라 학교 수업과 인도네시아어 공부에 전념했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한국어교육학과는 신생 학과라서 할 일이 많았다.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어 전공 과정이 있는 학교는 인도네시아대학교(UI), 가자마다대학교(UGM), 나시오날대학교(UNAS),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UPI) 등이다. 그런데 교수들 간의 교류는 별로 없었다. 나는 2015년 8월에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들과 함께 <인도네시아 한국학교육학회(AKSEIN)>를 결성하였다. 결성 목적은 교수 간 학술 정보 교환 및 친목을 통해 인도네시아에서의 한국학교육을 발전시키자는 것이었다. 결성 후 우리는 여러 차례의 한국학 관련 세미나를 개최하여 인도네시아에서의 한국학교육의 발전을 꾀하였다.
2017년에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고 있는 <해외 대학 한국학 씨앗형 사업>에 지원했다. 신생 학과인 한국어교육학과의 발전을 위해서는 특별한 재원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업신청을 한 것이다. 그 결과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에서는 매년 4,700만원 정도의 예산을 3년간 지원받을 수 있었다.
나는 사업책임자로서 2017년 7월 1일부터 2020년 6월 30일까지 다양한 사업을 수행하였다.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내에 한국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소에서 일하는 학생 두 명에게 3년 동안 근로장학금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한국어와 한국학 교육 관련 워크숍, 콘퍼런스 등을 매년 개최하여 논문을 발표하고 논문집도 발간하였다. 또한 인도네시아 설화와 한국 설화를 비교한 논문을 인도네시아인 제자와 함께 공동 작성하여 이를 국제학술지에 게재하기도 하였다.
2018년 3월에는 인도네시아에서의 한국어교육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는 한국어 교수, 교사, 학원 강사 등과 함께 <인도네시아 한국어교육자 협회(AJARI)>를 창립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인도네시아 한국학교육학회(AKSEIN)>는 여기에 통합하였다. 이때 회장으로 선출된 나는 한국어교육과 한국학의 발전을 위해 매년 세미나와 워크숍 등을 개최하였다.
또한 나는 인도네시아 교수들과 함께 인도네시아어로 된 교재 <<한국사 이해>> (2019), <<한국문학 이해>> (2020)를 공동 집필하여 인도네시아 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인도네시아로 된 교재를 발간하고자 했던 숙원의 사업이 11년 만에 이루어진 셈이었다.
한국문학 강의와 인도네시아어 교재 출판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 외부 기관에서 한국문학에 대해 강의를 한 적이 있다. 한국문화원, 한국대사관, 인도네시아 고등학교와 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가자마다대학교(UGM)에서는 처음에는 4시간 특강을 했는데, 이후에는 한 학기 강의 내용을 2주 동안 매일 6시간씩 강의하기도 하였다. 힘들었지만 적절한 긴장 덕분에 강의를 잘 마칠 수 있어서 감사했다.
2018년 2월에는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2018)를 인도네시아어로 번역하여 인도네시아에서 출판하였다. 이 책은 시인이자 인도네시아 교육대학교 교수인 넨덴 릴리스와 함께 공동으로 번역 출판했다. 이후에는 출판기념회를 가졌는데,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다. 이때 나는 윤동주와 윤동주의 시 세계에 대해 발표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후 학생들은 보고서 등에서 이 책을 많이 인용했다.
2019년에는 수라바야에 있는 세종학당에서 <윤동주의 생애와 시>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이때 한 학생의 시 낭송을 듣다가 감동이 되어 눈물이 나서 당황했던 일이 기억난다. 나이가 들면 눈물이 많아진다고 하던데, 내가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가급적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또 학생들과 함께 한국소설을 번역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번역가가 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11명의 3학년 학생들과 함께 한국 현대소설 이태준의 <복덕방>을 번역하였는데 학생들이 너무 어렵다고 해서 두 번째부터는 좀 더 쉬운 황순원의 <소나기>를 번역하였다. 번역 동아리 활동 소감을 들어보니 모두 자신의 한국어 실력이 많이 늘었으며, 한국 문화를 많이 이해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하였다.
눈물의 송별식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어문학부에는 한국어를 비롯하여 인도네시아어, 영어, 일어, 불어, 독어, 순다어(인도네시아 순다족의 언어) 등의 전공학과가 있다. 과거에는 영어교육학과와 일본어교육학과가 인기가 제일 많았지만, 최근에는 영어교육학과와 한국어교육학과가 가장 인기가 많다고 했다. 이것은 한국어교육학과의 입학 경쟁률이 20~30대 1이 된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국어교육학과는 신생 학과임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활동을 통해 두각을 드러냈다. 학생들은 여러 가지 대회에서 상을 받았고, 교수들은 이를 위하여 학생들을 전심으로 도와주었다. 그 결과 한국어교육학과는 인도네시아 전국 대학교 학과 평가에서 2019년에 등급 B를 받았다. 등급 B는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한 신생 학과가 받을 수 있는 최고 등급이었다(5년 후인 2024년에는 최고 등급 A를 받았다).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에서는 2020년 12월에 우리 부부에게 총장 명의의 공로상을 수여했다. 그동안의 수고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이 상을 마련했다고 하면서 앞으로도 많은 협력을 기대한다고도 하였다.
2023년 8월 귀국을 앞두고 나와 아내는 인도네시아의 한국학 발전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소장하고 있던 1,500여 권의 책과 8개의 책장을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 기증했다. 정든 책을 떠나보내는 것이 아쉬웠지만 앞으로 후학들에 의해 많이 활용될 것을 생각하니 뿌듯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에서는 우리 부부를 위한 송별식을 마련해 주었다. 이때 많은 선물을 받았다. 나는 감사를 표한 후 인도네시아어로 쓴 송별사를 읽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게다가 앞에 앉아 있던 한 분이 눈시울을 훔치는 것을 보자 더 이상 원고를 읽을 수 없었다. 나는 아내에게 송별사 나머지 부분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평생 잊지 못할 송별회를 마치면서 나는 인도네시아를 많이 사랑했음을 느꼈다.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종강 기념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