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인도네시아 도착과 새로운 각오
2009년 2월 19일 아내와 내가 탄 항공기는 7시간 만에 자카르타 근처에 있는 수카르노 하타 공항에 도착했다. 수카르노와 하타는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의 이름이다. 공항에는 초콜릿 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과 '질밥(인도네시아 이슬람 여성이 머리에 두르는 의복)'을 한 여성들이 눈에 띄었다. 드디어 인도네시아에 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마음이 설레었다.
짐 검사를 마치고 개찰구로 나오자 인도네시아대학교(UI)에 근무하는 두 명의 여사무원과 남자 대학원생이 내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 그들을 대하자 마치 낯선 곳에서 아주 잘 아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차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오자 덥고 습습한 밤공기가 느껴졌다. 한국은 추운 겨울이었고 비행기 안도 역시 추울 것 같아 겨울옷을 입고 왔었기에 더욱 훈훈했다. 우리는 ‘끼장’이라는 승용차에 짐을 싣고 차에 올랐다. 에어컨 바람이 그 어느 때보다 시원하고 좋았다.
차가 인도네시아대학교를 향해 가는 동안 우리는 영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대화는 즐겁고 유쾌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인도네시아에서는 참 많이 웃었던 것 같다.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때마다 되물어 보기가 민망해서 웃으며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야경이 근사한 공항을 벗어나자 곧 자카르타 시내가 나타났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고속도로를 ‘똘’이라고 하는데, ‘똘’이 자카르타 시내 중심을 통과하고 있었다. 도로 양쪽에 세워진 건물들은 밝은 네온사인 때문인지 서울의 건물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느껴졌다. 내가 생각했던 인도네시아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당시 나는 인도네시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객원교수로 선발된 후에는 인도네시아에 관한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구했다. 그런데 정작 필요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내가 파견되는 대학에 강의용 빔프로젝트가 있는지, 만약 없다면 환등기나 복사기 같은 것은 있는지 궁금해했던 일이 기억난다.
인도네시아대학교는 ‘데뽁’이라는 곳에 있어서 공항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 정도 가야 했다. 물론 길이 막힐 때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당시 인도네시아에는 도로가 많지 않아 종종 길이 막혔다. 이것을 인도네시아어로 ‘마쯧’이라고 한다. 자카르타는 교통정체가 심해서 홀짝제를 시행하기도 하는데, ‘코로나 19’ 때에는 교통이 조금 원활해지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한인들은 인도네시아대학교가 한국의 서울대학교와 같은 곳이라고 한다. 물론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서울대학교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해마다 이루어지는 대학 평가를 보면 조금씩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도네시아대학교는 족자카르타에 있는 가자마다대학교(UGM)와 함께 매번 1, 2위를 차지하고 있어 인도네시아 최고의 명문 대학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드디어 인도네시아대학교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열거나 닫는 문이 없었다. 단지 조그만 검문소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안에 있는 직원들은 학교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주차 카드를 주었다. 학교 안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대단히 크게 느껴졌다.
우리는 인문대 근처에 있는 일본연구소로 안내되었다. 일본연구소는 일본이 투자하여 지은 시설물이라고 했다. 외부 손님들이 이곳에서 묵으면서 세미나를 할 수 있게 만든 건물이었다. 지정해 준 숙소 문을 여니 테이블 위에는 예쁘게 생긴 용과일과 몇 가지 다른 과일이 담겨 있는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바구니에는 우리를 환영한다는 문구가 적힌 테이프가 달려 있었다. 정성이 느껴져 감사했다. 나는 잠을 청하면서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시작해 보자고 속으로 다짐했다.
수카르노하타 공항
제2절 인도네시아대학교(UI) 한국학과 객원교수 활동
인도네시아대학교(Univesitas Indonesia)는 1997년부터 인문대학에서 교양선택 과목으로 한국어 강좌를 운영하였다. 매 학기 20-50 명의 학생들이 한국어를 수강하였다. 그런데 교수 부족으로 인해 한국어 강좌 운영이 어려운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인도네시아대학교는 자카르타 주재 한국 대사관 및 한국어 세계화 재단, 한국국제협력단, 한국국제교류재단 등의 지원으로 2006년 8월에 4년제 한국학과(한국어와 한국문화 전공)를 개설하였다. 한국어과 또는 한국학과는 나시오날대학교, 가자마다대학교에 이미 개설된 바 있지만 이들은 모두 3년제 과정이었다. 따라서 4년제 정규 학사과정의 한국학과 개설은 인도네시아대학교가 처음이다.
인도네시아대학교 한국학과의 인기는 매우 좋은 편이다. 한국학과 개설이 정식 인가된 2006년에는 320명의 학생들이 한국학과에 지원했다. 그런데 2007년에는 1,070명이 지원하였고, 이후 지원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30-40명을 선발하다가 60명을 선발하기도 하였다.
한국학과 입학 경쟁률은 평균 20-30 대 1 정도이고 인문대학 내에서는 영어과와 함께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한국학과에 대한 선호도가 이처럼 높은 것은 인도네시아의 한류 열풍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나 졸업 후 취직 문제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한국학과 졸업생들은 타 전공 학생들보다 취직이 용이하여 한국의 대기업을 골라가며 선택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대학교 한국학과의 졸업 이수학점은 2015년 현재 144 학점이다. 이 중 전공 필수 학점은 98 학점이다. 학생들은 한국어 39 학점, 언어학 15 학점, 한국 문학 18 학점, 한국 역사와 문화 21 학점, 논문 5 학점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다.
한국학과 학생들은 이러한 수업을 통해 한국어 및 한국 사회와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을 함양하고 있다. 한국학과 학생들이 예의가 바른 것은 이와 같은 강좌를 통해 배운 한국 문화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례로 학생들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도 교수가 나타나면 모두 일어나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다. 이러한 광경은 한국 대학교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것이기에 매우 흥미롭다.
인도네시아대학교 한국학과 교수는 인도네시아인 교수, 한국국제협력단, 한국국제교류재단 등에서 파견된 한국인 객원교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인 교수들은 인도네시아인 교수들과 함께 한국학과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강의는 물론 논문지도, 학생들의 애로사항을 해결하기 위한 면담, 한국학 관련 세미나 개최, 인도네시아인 교수들과의 화합을 위한 모임, 학교 행사 참여 등을 통해 한국 및 한국인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대학교 한국학과 졸업생들은 주로 한국 기업에 취직한다. 많은 우수한 학생들이 한국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하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소수의 졸업생만이 한국에서 유학하게 된다. 인도네시아인 교수들 역시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싶어 하지만 소수만이 한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대학교 한국학과에서는 한국의 일반 대학에서 출판한 책을 한국어 교재로 사용하다가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발행한 <<인도네시아인을 위한 종합 한국어>>를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나머지 과목은 인도네시아어로 출판된 교재가 별로 없어서 담당 교수들이 자체 제작한 교재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대학들은 한국과 달리 9월에 1학기를 시작해서 12월에 종강을 한다. 2학기는 2월에 시작해서 5월에 끝난다. 물론 학교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다. 게다가 매년 조금씩 변하는 ‘르바란’ 축제일에 의해 교육 일정에 변동이 생기기도 한다.
교육 일정 외에 한국과 다른 점은 학생 성적 평가 방식을 들 수 있다. 한국 대학에서는 대부분 상대평가를 하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절대평가를 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절충적인 방식으로 평가를 하고 있는데, 성적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다만, 몇몇 학생들이 성적을 올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지만, 내가 잘못하지 않았으면 정중히 거절하여 평가의 엄정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점수를 구걸하는 학생들은 별로 없었다.
인도네시아대학교 학생들은 대체로 명랑하고 똑똑하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인지 대부분 나의 강의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따라서 가르치는 일이 즐거웠다. 학생들의 호기심에 찬 눈을 보면 가끔 공군사관학교 수업 장면이 생각났다. 내가 생도 때도 그랬지만 수업시간에 조는 생도가 많았다. 항상 심신이 피곤하니 수업시간은 안식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웬만한 명강의가 아니면 생도들의 관심을 끌기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우리나라에서 꽤 유명한 교수님이 생도들에게 강의를 해 보고 싶다고 해서 특강 시간을 마련해 드린 적이 있다. 그런데 강의를 시작한 지 10분도 안 되어 생도들이 졸기 시작했다. 교수님이 당황하시는 것 같아서 나는 조용히 돌아다니며 조는 생도들을 깨워야 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대학교 학생들은 달랐다. 특히 여학생들은 별것도 아닌 이야기에 재미있다고 웃었다. 수업시간에 웃음소리가 많으니 강의하는 것이 즐거웠다. 학생들은 내가 인도네시아에 처음 왔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나에게 인도네시아 문화에 대해 여러 가지 알려 주었다. 식사할 때나 인사할 때 모두 오른손을 사용해야 하며 왼손은 화장실 이용 시에만 사용한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또 어떤 학생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해 달라고 하면서 친절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자 한 학생이 나에게 와서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주저했더니 그 학생이 내 오른손을 잡고서는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으나 상대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표시하는 인도네시아인들의 인사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학생들의 특징은 시간 개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수업시간에 지각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학생이 면담 요청을 하고서 나보다 늦게 온 적도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면 대개 ‘반지르(홍수)’ 때문에 길이 막혀서 혹은 기차가 연착되어서 늦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러한 행동들이 이해가 되지 않아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약속시간에 조금만 늦어도 마음이 불안하다. 이런 강박증은 1분만 늦어도 처벌을 받았던 사관학교 생도 생활 경험 때문에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약속 장소에 미리 도착한다. 늦을까 봐 초조해하는 것보다 미리 가서 기다리는 것이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인들의 시간 개념은 인도네시아인들의 낙천적인 성격과 환경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늦는 것에 꽤 관대하다. 이런 것을 보니 중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서양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에게는 ‘코리안 타임’이 있다며 놀렸다는 것이다.
언젠가 평소 친하게 지내는 인도네시아인 교수가 ‘한국 젊은이들은 왜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육아 및 교육 부담이 커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그랬더니 역시 한국 사람들은 과학적이라고 하면서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며 크게 웃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6년 동안 인도네시아대학교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특히 강연을 많이 했다. 인도네시아대학교, 한국문화원, 한국대사관, 자카르타 한국인학교, 가자마다 대학교, 나시오날 대학교, 세종학당, 인도네시아 고등학교 등에서 연사로 초청해 주었으며, 나는 주로 한국문학, 한국어교육, 한국 문화, 한류, 청소년 진로 문제 등에 대해 강연했다.
인도네시아대학교에서 근무하는 동안 나는 인도네시아의 유명한 문학잡지 <<호리손(HORISON)>>에 나의 문학평론을 게재했다. 이것은 한국전쟁 당시 남북한 소설에 대한 평론이었다. 마침 같은 대학교에 근무하고 있던 로스티뉴 교수가 이 글을 인도네시아어로 번역해 주었다. 이것은 인도네시아 문학잡지에 게재된 최초의 한국문학 평론이 될 듯싶다.
이외에도 나는 국내외 학술대회에 참가하여 논문을 발표하고 인도네시아 한인신문과 잡지 등에 글을 오랫동안 게재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문화를 한국에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도네시아 사람들 이야기>>를 기획 편집하여 책으로 출판했다. 인도네시아의 20여 대표 종족과 그들의 문화를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은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도네시아를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내와 인도네시아대학교 호수 앞에서 찍은 사진
제3절 인도네시아어 공부와 인도네시아 문화 이해
인도네시아대학교에서 나는 주로 한국어와 한국문학에 대하여 강의했다. 그런데 한국문학 강의는 쉽지 않았다.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가며 열심히 설명했으나 학생들은 이해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어느 날, 기말시험을 보고 난 후였다. 한 여학생이 한국문학사 시험공부를 하면서 너무 어려워 눈물을 흘려가며 공부했다고 하면서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 열성에 감동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인도네시아어로 된 한국문학 교재가 없었다. 대부분의 한국문학사는 내용이 어려운 데다가 한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마침 한글로만 되어 있는 교재를 구할 수 있어서 그것으로 강의했다. 그래도 학생들은 어려워했다. 인도네시아어로 된 교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재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선 인적 물적 자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강의를 위해서라도 빨리 인도네시아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인도네시아에 오기 전 나는 주로 영어 공부를 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객원교수를 선발할 때 요구하는 외국어 능력은 대개 영어 회화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에 와 보니 영어보다는 인도네시아어가 훨씬 많이 필요했다. 나는 학과장 교수에게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하겠다고 했다. 학과장 교수는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무료로 인도네시아어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와 아내는 첫 학기 수업이 끝날 즈음인 5월 말부터 학교 내에 있는 언어교육원(BIPA)에서 정식으로 인도네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방학 기간에 특별히 운영하는 속성반이라서 그런지 학습 진도가 너무 빨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일반 학기에서 넉 달 동안 가르치는 내용을 두 달 동안에 가르쳐야 하니 진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인도네시아어를 처음 배우는 우리에게는 이 수업이 정말 힘들었다. 두 달 동안 거의 매일 숙제만 했다. 그렇지만 우리와 같은 초보자 몇몇을 제외한 학생들은 입과 전에 미리 공부하고 와서 그런지 그다지 어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인도네시아어를 배우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듣기 수업이었다. 잘 들리지 않으니 수업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교수들은 인도네시아어만 사용하면서 그날그날 나누어 주는 프린트물로 수업하였다. 예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열심히 한 덕분에 초급 과정은 무난하게 수료했다.
중급과 고급 과정의 경우 나는 강의를 하면서 인도네시아어 수업에 참여했다. 그러다 보니 수업에 참여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50살이 넘어서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는 것이 무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하는 것보다 차라리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1년 코스를 2년 만에 졸업했지만 뿌듯했다.
어학 과정을 통해 나는 인도네시아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교수들은 인도네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읽어볼 만한 책이나 논문 등도 소개해 주었다. 인도네시아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던 나에게는 강의 내용이 꽤 유익하게 느껴졌다.
그중 하나는 물건을 살 때 흥정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인도네시아의 전통 시장에서는 바가지를 쓰기 쉬우니 흥정을 잘해야 한다고 했다. 물건 파는 사람이 가격을 제시하면 처음 부른 값의 반 정도 깎아서 흥정을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75퍼센트 가격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민망해서 이 방법을 잘 사용하지 못했으나 아내는 웃어가면서 배운 대로 흥정을 잘했다.
‘슬링꾸(외도)와 폴리가미(일부다처제)’에 대해 학생들에게 토론하도록 하는 수업시간도 재미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일부다처제를 용인하고 있다. 첫 번째 부인이 허락하면 모두 4명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게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고 했다. 많은 외국인 학생들이 이 제도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그런지 가르치는 남자 교수는 이를 옹호하는 듯한 이야기를 했다. 외도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부인으로 삼아 책임지는 것이 낫다는 것이었다.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토론 과정을 통해 인도네시아 문화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에는 인도네시아어를 할 줄 모르는 한인들이 꽤 많다. 개발도상국인 인도네시아의 언어까지 굳이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있는 데다가 운전기사와 가사 도우미가 있으니 어지간한 일은 그들이 알아서 도와주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종종 오해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한국인 주부가 두 운전기사에게 “당신은 ‘뿔랑(집으로 가라는 뜻)’하고, 당신은 ‘뿔랑’ 하지 마세요.”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두 운전기사 모두 한국어는 모르니까 ‘뿔랑’ 소리만 듣고 출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국인들이 한국어와 인도네시아어를 종종 섞어서 사용하는 바람에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럴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내가 직접 경험한 일화를 들고자 한다. 인도네시아에 나보다 먼저 와서 살고 있던 후배가 있었다. 그는 나보다 훨씬 좋은 집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동부인해서 함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후배 부인이 “여기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 지내세요?”라고 하면서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자신은 인도네시아 생활이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도 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환경이나 인도네시아 사람들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가장 심한 스트레스는 집이라고 했다. 비가 새거나 하면 빨리 고쳐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야기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후배의 집주인은 우리의 집주인이기도 했다. 집주인은 인도네시아 육군 3성 장군 출신으로 당시 집을 20여 채 정도 가지고 있어서 집수리를 담당하는 기술자를 개인적으로 고용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 기술자가 우리에게 후배 부인은 노상 화를 낸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는 그러냐면서 웃고 말았는데, 후배 부인이 자주 화를 내며 힘들어한 것은 성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언어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무슬림이 대부분인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인도네시아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에 대한 책과 글을 조금 읽어보았다. 그중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도네시아의 부정부패 문제를 다룬 <두 마리의 고래와 플랑크톤>이라는 글이었다. 인도네시아의 군인과 중국 상인이 두 마리의 고래이고, 나머지는 고래의 먹이인 플랑크톤이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인도네시아대학교 언어교육원(LBI) 교수가 소개해 주어서 읽게 된 이 글은 인도네시아어로 되어 있어서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빈부격차가 심한 인도네시아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세상에 부정부패가 없는 곳은 없을 것이다. 인도네시아 역시 부정부패 척결을 최우선적 과제로 제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쉽지 않아 보인다. 관련된 일화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인도네시아대학교에서 가르쳤던 한 여학생이 어느 날 나를 찾아왔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해서 졸업 후 교수가 되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 학생은 관광 관련 공무원이 되겠다고 했다. 그래서 속으로 아쉬워했었는데 그 여학생은 한국 유학 후 돌아와서 생각이 변했다고 했다. 공무원인 오빠가 ‘공무원이 되면 부정을 안 할 수 없어서 위험하니 공무원이 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사업을 하는 한국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한 사업가가 말하기를 공무원들이 너무 부패해서 사업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랬더니 다른 사업가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래서 자기는 사업하기가 너무 쉽다고 했다. 자신의 경쟁자를 인도네시아 공무원들이 알아서 다 막아 주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농담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서 웃고 말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직접 경험한 것은 교통경찰들이 운전자에게 부정한 돈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자카르타는 교통이 복잡한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빤쪼란’이라는 곳은 항상 복잡하다. 교통경찰이 항상 지키고 있는 곳이다. 현지인 운전기사들도 이곳에 오면 긴장을 한다. 그런데 2015년 어느 날 우리 차가 경찰에게 잡혔다. 신호등이 초록색이어서 전진했는데 이내 빨간색으로 바뀌는 바람에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게 된 것이다.
경찰에게 걸린 운전기사는 나에게 5만 루피아만 달라고 했다. 내가 10만 루피아밖에 없다고 하자 기사는 탄식하면서 그 돈을 가지고 나갔다. 그는 경찰과 이야기하면서 함께 고가도로 밑 으슥한 곳에 가더니 이내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나에게 5만 루피아를 돌려주었다. 거스름돈을 받아 온 것이었다. 경찰이 거스름돈도 주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기사는 나에게서 빌린 돈이라 나중에 갚아야 한다고 하면서 좀 깎아 달라고 했더니 경찰이 깎아 주더라는 것이었다.
인도네시아에 가기 전 비자 문제 때문에 서울에 있는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 근무하는 인도네시아인 여성 사무원이 말하기를 인도네시아에 가면 관공서에 직접 가서 일을 처리하지 말고 ‘아겐(중개인)’에게 부탁하라고 했다. 나는 내가 인도네시아어를 잘 모르니까 그래야 하는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에 체류한 지 1년이 되자 학교 '아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비자 연장을 해야 하니 이민국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이민국 건물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비자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더욱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학교 ‘아겐’은 이미 나와 있었다. 나는 반갑게 인사를 한 후 그녀를 따라 이민국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랬더니 사무실 앞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한 서양인이 우리를 따라 들어왔다. 늦게 온 내가 사무실로 들어가니 그도 따라 들어온 것 같았다. 그러자 사무실에 있던 직원이 그에게 큰소리로 나가라고 했다. 그는 한 마디도 못하고 그대로 쫓겨 나갔다. 그 광경이 우습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서양인처럼 나도 민망한 일을 당한 적이 있다. 반둥에서 운전면허를 연장하러 갔을 때 일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산 지 5년이 넘었고 인도네시아어도 어느 정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아겐’ 없이 혼자 갔다. 그랬더니 직원이 서류 준비가 미흡하다고 다시 준비해 오라고 했다. 다음 날 갔더니 또 다른 요구를 했다. 할 수 없이 다음 날에 다시 갔다. 직원이 서류를 보더니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사무실로 들어가 보았다. 그러니까 직원들이 나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나와서 다시 기다렸다.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짜증이 나서 다시 들어가 볼까 했는데 마침 이웃에 사는 한국인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운전면허를 연장하기 위해 ‘아겐’과 함께 왔다고 했다. 나는 ‘아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내 일도 부탁했다. 그랬더니 얼마 안 되어 새로운 면허증을 받아 왔다.
인도네시아 공무원들은 외국인이 직접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보통 인도네시아 ‘아겐’들은 사무실에 들어가면 직원에게 약간의 돈을 준다. 그런데, 외국인들은 그것을 잘 모르니 아무래도 거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인도네시아는 요즘 많이 변하고 있는 것 같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공항이다. 예전에는 인도네시아에 입국할 때에는 항상 불안했다. 직원들이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당시 직원들은 무언가 하자가 있다 싶으면 으슥한 곳으로 가서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다. 물론 흥정도 가능했다. 요구하는 금액이 너무 많아서 깎아 달라고 하면 깎아 주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공항에서는 이러한 광경을 거의 볼 수 없다. 인도네시아가 많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어 과정 수료 기념사진
제4절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UPI) 한국어교육학과 객원교수 활동
2015년 9월 1일부로 나는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UPI)로 파견되었다. 내가 이곳으로 가게 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2014년 말에 잘 아는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반둥에 있는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에서 한국어교육학과를 개설하려고 하는데 와서 도와줄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흔쾌히 그리하겠다고 했다.
당시 나는 인도네시아대학교에서의 임기가 끝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외국 대학에 지원할 것인가 생각이 많았다. 아내는 84세의 노모를 모시고 다른 외국으로 가는 것은 힘들다고 했다. 그런데 마침 인도네시아 교육대학교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며칠 후 나는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를 찾아가서 디디 수끼야디 어문학부 학장(현재 부총장)을 만났다. 그는 한국어교육학과를 개설하고 싶으니 도와줄 수 있냐고 했다. 내가 기꺼이 도와드리겠다고 했더니 보수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나는 일단 재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 한국국제교류재단(KF), 그리고 한국국제협력단(LOICA) 등에 도움을 요청해 보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한국어교육학과는 한국어 교사를 양성하는 곳이라 한국에서도 지원해 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학장님과 함께 재인도네시아 한국 대사와 한국국제협력단 단장을 직접 만나서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한국국제교류재단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다행히도 모두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얼마 후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는 객원교수 1명, 한국국제협력단에서는 한국어 전공 단원 1명을 지원하기로 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는 나에게 객원교수로 파견되고 싶으면 선발 시험에 다시 응시하여야 한다고 했다. 나는 5월경 시험에 응시하였다. 선발된 후에는 7월에 반둥으로 이사했다. 한국어교육학과에서는 한국인 강사 3명을 현지 채용했다. 이때 한국어 교원 자격증이 있는 아내도 강사로 채용되었다. 이렇게 해서 인도네시아인 교수 1명(학과장)과 한국인 교수 5명이 한국어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 우리는 커리큘럼을 만들고 수업 계획도 하였다.
그런데 8월 초가 되어도 학과 설립은 공식화되지 않았다. 8월 5일 총장 선거가 끝나야 가능하다고 했다. 총장 후보 중 한 분은 한국어교육학과 개설을 찬성하고 있지만, 다른 한 분은 반대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9월부터 학기가 시작되는데 학과 설립 자체가 불확실하다고 하니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 찬성하는 분이 총장으로 선출되어 한국어교육학과 개설이 정식으로 확정되었다. 이후 한국어교육학과에서는 3일 동안 면접시험을 통해서 학생들을 선발했다. 당시 선발된 학생들은 모두 53명이었다.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어문학부에는 한국어를 비롯하여 인도네시아어, 영어, 일어, 불어, 독어, 순다어(인도네시아 순다족의 언어) 등의 전공학과가 있다. 과거에는 영어교육학과와 일본어교육학과가 인기가 제일 많았지만, 최근에는 영어교육학과와 한국어교육학과가 가장 인기가 있다. 이것은 한국어교육학과의 입학 경쟁률이 20~30대 1이 된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국어교육학과는 신생 학과임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활동을 통해 두각을 드러냈다. 학생들은 여러 가지 대회에서 상을 받았고, 교수들은 이를 위하여 학생들을 전심으로 도와주었다. 그 결과 한국어교육학과는 인도네시아 전국 대학교 학과 평가에서 2019년에 등급 B를 받았다. 등급 B는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한 신생 학과가 받을 수 있는 최고 등급이었다. 그리고 5년 후인 2024년에는 최고 등급을 받았다.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한국어교육학과에서 근무할 때에는 아내도 정식 강사로 채용되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활동을 거의 함께했다. 커리큘럼을 만들고 수업 계획서도 작성하였다. 그리고 8월에는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들과 함께 <인도네시아 한국학교육학회(AKSEIN)>를 결성하여 교수 간 학술정보 교환 및 친목을 도모하였다. 여러 차례의 한국어, 한국학 교육 관련 세미나를 개최하여 인도네시아에서의 한국어, 한국학 교육의 발전을 꾀하였다.
2017년에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고 있는 <해외 대학 한국학 씨앗형 사업>에 지원했다. 인도네시아 교육대학교 한국어교육학과의 발전을 위해 특별한 재원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선정이 되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에서는 매년 4,700만 원 정도의 예산을 3년간 지원받았다.
사업책임자였던 나는 2017년 7월 1일부터 2020년 6월 30일까지 다양한 사업을 수행하였다. 인도네시아 교육대학교 내에 한국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소에서 일하는 학생들에게 3년 동안 근로장학금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한국어와 한국학 교육 관련 워크숍, 콘퍼런스 등을 매년 개최하여 논문을 발표하고 논문집도 발간하였다. 또한 인도네시아 설화와 한국 설화를 비교한 논문을 경희대 박사과정에 다니던 제자와 함께 공동 작성하여 이를 국제학술지에 게재하기도 하였다.
2018년 2월에는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2018)를 인도네시아어로 번역하여 인도네시아에서 출판하였다. 시인이자 인도네시아 교육대학교 교수인 넨덴 릴리스와 함께 공동으로 번역 출판하였다. 이후 우리는 출판기념회를 가졌는데,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다. 이때 나는 윤동주와 윤동주의 시 세계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후 학생들은 이 책을 많이 인용하였다.
3월에는 인도네시아에서의 한국어교육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는 한국어 교수, 교사, 학원 강사 등과 함께 <인도네시아 한국어교육자 협회(AJARI)>를 창립하였다. 이때 회장으로 선출된 나는 한국어교육의 발전을 위해 매년 세미나와 워크숍 등을 개최하면서 논문집을 발간하였다.
또한 인도네시아 교수들과 함께 인도네시아어로 된 교재 <<한국사 이해>> (2019), <<한국문학 이해>> (2020)를 공동 집필하여 인도네시아 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인도네시아로 된 교재를 발간하고자 했던 숙원의 사업이 11년 만에 이루어진 셈이다. 이외에도 나는 가자마다대학교(UGM)의 요청으로 학생들에게 한국문학에 대한 특강을 하였다. 이후에는 한 학기 강의 내용을 2주 동안 매일 6시간씩 강의하기도 하였다. 힘들었지만 보람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2019년에는 수라바야에 있는 세종학당에서 <윤동주의 생애와 시>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이때 한 학생의 시 낭송을 듣다가 감동이 되어 눈물이 나서 당황했던 일이 기억난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교육부 주최 한국어 말하기 대회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다가 인도네시아의 유명한 소설 『라스까르 쁠랑이(무지개 군단)』의 무대인 블리뚱에 갔던 일, 아세안 문학자 대회에 한국 문인 대표로 참석하게 된 일 등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
나는 또 학생들과 함께 한국소설을 번역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번역가가 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11명의 3학년 학생들과 함께 한국 현대소설 이태준의 <복덕방>을 번역하였다. 그런데 학생들이 너무 어렵다고 해서 두 번째부터는 좀 더 쉬운 황순원의 <소나기>를 번역하였다. 번역 동아리 활동 소감을 들어보니 모두 자신의 한국어 실력이 많이 늘었으며, 한국 문화를 많이 이해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하였다.
이처럼 나는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객원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에서는 2020년 12월에 우리 부부에게 총장 명의의 공로상을 수여했다. 그동안의 수고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이 상을 마련했다고 하면서 앞으로도 많은 협력을 기대한다고도 하였다.
2023년 8월 귀국을 앞두고 나와 아내는 인도네시아에서의 한국학 발전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소장하고 있던 1,500권의 책과 8개의 책장을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 기증했다. 정든 책을 떠나보내는 것이 아쉬웠지만 앞으로 후학들에 의해 많이 활용될 것을 생각하니 뿌듯하기도 하였다.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에서는 우리 부부를 위한 송별식을 마련해 주었다. 많은 선물을 받았다. 나는 감사를 표한 후 인도네시아어로 쓴 송별사를 읽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더 이상 원고를 읽을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아내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아마도 이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종강 기념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