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서울대 대학원 석사학위 과정 졸업
1985년 3월부터 나는 다시 서울대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1년 만에 학교에 왔더니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대학에서의 시위는 여전히 심각했지만, 석사과정에 들어온 학생들은 대부분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석사과정 수업은 교수님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나 대개는 학생들이 발표하도록 했다. 2년 안에 석사학위를 받아서 군으로 돌아가야 하는 나에게는 이러한 수업 방식이 더 좋게 느껴졌다. 3학기 동안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모두 이수하고, 4학기에는 본격적으로 논문을 쓰기로 했다.
석사과정을 이수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역시 논문 작성이었다. 당시 나는 김윤식 교수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교수님은 내가 사관학교 출신임에도 본과 출신 학생도 들어가기 힘든 303호실(학생 연구실)에 자리 잡고 공부하는 것을 보고 놀라셨다고 했다. 이렇게 되기까지 노력 참 많이 했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후 교수님은 당신의 저서도 여러 권 주시고, 점심도 사 주셨다. 그리고 언젠가는 당신의 원고를 잡지사에 전달해 달라는 심부름을 시키면서 잡지사에 전화하여 내가 보통 학생과는 다른 공군 장교라고 하면서 자세히 나를 소개하기도 했다.
또 언젠가는 문학 공부 방법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다. 자신은 책을 세 가지로 분류해서 책장에 넣는다고 했다. 첫 번째는 문학 이론, 두 번째는 역사, 세 번째는 문학 작품이라고 했다. 문학 작품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 작품을 둘러싼 현실에 대한 이해와 문학 이론이라는 과학적 도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후로는 나도 책장을 이러한 방식으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문학이론서를 읽었다. 그런데 당시 지식 사회에서는 마르크스 사상과 관련된 글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그래서 나도 국문과 학생들이 많이 읽던 골드만, 루카치, 마르크스, 헤겔 등에 대한 책을 읽어 보았다. 쉽지 않았으나 대략 이해할 수는 있었다.
나는 루카치의 리얼리즘론으로 논문을 쓰기로 했다. 루카치의 자연주의와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은 단순 명쾌해서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루카치가 마르크스주의자였다는 사실이었다. 군인인 내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고, 나의 신앙과도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론과 실천의 괴리 속에 고민하면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국문과 학생들은 대부분 ‘카프(KAPF)’에 대해 논문을 쓰고 있었다. 지식인 사회에 불어닥친 사회주의 열풍 때문이기도 했지만, 카프 문학에 대한 김윤식 교수님의 선구 업적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루카치의 리얼리즘 이론은 카프 연구를 위한 최고의 분석 도구처럼 보였다. 하지만 군인인 내가 ‘카프 문학’을 연구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1920~30년대에 좌우 절충파로 활약한 염상섭을 연구하기로 했다. 염상섭은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소설은 리얼리즘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열심히 염상섭 소설을 구해 읽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염상섭 소설은 단행본으로 나와 있지 않은 작품이 상당히 많았다. 게다가 해방 이후 출판된 단행본의 경우에는 발표 당시의 작품과 내용이 다른 경우도 많았다.
김윤식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발바닥으로 논문을 써야 한다’고 거듭 주장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발바닥으로 쓴다는 마음으로 국립도서관, 국회도서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중앙대 도서관 등에서 열심히 자료를 찾고 정리했다. 그 결과 연구에 필요한 대부분의 작품 원본을 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열심히 자료를 찾으며 논문을 써서 김윤식 교수님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교수님은 내 논문에 새로운 것이 없으며, 논문 형식에도 문제가 있으니 다시 써 오라고 하셨다. 칭찬을 기대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얼굴이 뜨뜻해졌다. 나는 논문을 열심히 수정하여 다시 제출했다. 다행히 졸업은 했으나 학문의 길은 멀고 험하게 여겨졌다.
서울대 석사학위 과정 졸업 사진
제2절 공군 초급 지휘관 참모 과정 수료
1987년 1월 말 대학원을 졸업한 후, 나는 공군본부 비서실에서 잠시 근무하게 되었다. 국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나를 이곳에 부른 것 같았다. 여기에서 나는 공군참모총장의 연설문이나 서신 등을 주로 작성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공군 관련 지식이 별로 없었다. 따라서 비서실에서 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때 마침 공군대학 <초급지휘관참모과정>에 입과하라는 문서를 받았다. <초급지휘관참모과정>은 군사기초지식과 실무수행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공군대학에서 개설한 과정이었다.
당시 초급 장교는 소령이 되기 전에 의무적으로 이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나의 동기생 대부분은 이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민간대학에서 공부하느라 이 교육을 받지 못했다. 나는 상관에게 이 사실을 보고한 후 입과 허락을 받았다.
<초급지휘관참모과정>은 3개월 동안 이루어졌다. 이 과정의 성적은 장교들의 진급에 영향을 많이 준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모두 열심히 공부했다. 덕분에 나 역시 열심히 공부했다. 사실 나는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군보다 민간 대학에서 더 많이 생활하였다. 그 결과, 군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그런데 이 교육을 통해 군 관련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한편, 사회는 매우 시끄러웠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의 죽음, 호헌철폐 시위 등 많은 일이 있었다. 당시 군에서는 이런 일들이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초급지휘관참모과정>에서는 군 관련 지식 외에 마르크시즘 이론 비판 등 반공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을 많이 했다.
공군대학에서는 나이 많은 교수님이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 강의하셨다. 그런데 이 교수님의 강의는 매번 무언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학생 장교들이 질문을 많이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매우 곤혹스러워했으며 어떤 때는 화를 내기도 하셨다.
어느 날 수업 초반에 한 학생 장교가 손을 들고서 질문이 있다고 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어떻게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질문하나?"라고 하면서 화를 내셨다. 이로 인해 수업 분위기가 한동안 썰렁해졌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 교수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훌륭한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해당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도 있어야겠지만 학생들의 질문에 대해 지혜롭게 대답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3절 기흉 수술
<초급지휘관참모과정> 교육이 끝난 후 나는 원하던 공군사관학교 국어과 교관으로 발령이 났다. 그래서 1987년 6월에 공군사관학교가 있는 청주로 이사했다. 공군사관학교가 1985년에 서울 대방동에서 충북 청주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공군사관학교의 청주 이전은 군부대시설을 지방으로 이전하라는 국가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6개월 정도 기다리면 공군사관학교 신축 관사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우리는 학교 근처 마을에서 방 하나를 빌렸다. 조그만 부엌이 딸린 단칸방이었다. 겨울에는 방 안에 있던 어항이 얼 정도로 추운 방이었다. 그렇지만 아내와 딸은 서로 연애하듯 이곳에서 행복하게 지냈다.
집 근처에 있는 무심천은 여름날 아이에게는 최상의 놀이터였다. 모래성을 쌓고 물고기를 쫓아다니며 좋아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행복했다. 집주인 내외도 친절했다. 내가 학교 출근 버스를 놓칠까 염려되어 아침마다 차가 오면 빨리 나오라고 독촉할 정도였다. 아내나 나나 서울에서만 생활했기 때문에 시골 마을에서의 생활은 신선하게 느껴졌다.
6개월 후에는 신축 관사에 입주했다. 엘리베이터도 없고 난방을 위해 연탄을 사용해야 하는 18평 아파트였지만 넓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특히 화장실에 갈 때 밖으로 나가지 않아서 좋았다. 별로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그런데 이듬해 봄에 다시 기흉이 재발했다. 세 번째였다. 아침에 일어날 때 허리를 구부리니 공기 방울이 위쪽으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왔다. 바로 관사 옆에 있는 항공의료원에 전화해서 구급차를 오게 했다. 나는 구급차에 실려 서울에 있는 국군수도통합병원에 갔다. 내가 떠난 후 둘째를 임신한 아내가 눈물을 흘리자 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내가 있는데 왜 울어?”라고.
국군수도통합병원에 입원한 나는 폐 절제 수술을 받기로 했다. 이전에는 수술하지 않고 공기만 빼내는 시술만 했었다. 군 규정상 수술 부위가 크면 전역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수술한 병사들의 모습을 보니 끔찍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가능하면 수술하지 않고 고쳐보려 했다. 그런데 자꾸 재발하자 군의관은 수술을 권했다. 마침 담당 군의관은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새로운 기흉 수술 방법을 배웠다고 했다. 옛날과 달리 수술 부위도 크지 않아서 전역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나는 편한 마음으로 수술에 임했다. 다행히 수술 결과도 좋았다.
퇴원하기 전 나는 감사의 뜻으로 군의관과 간호 장교에게 소갈비를 대접했다. 그랬더니 군의관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느 의사가 간호사들에게 소갈비를 사 주었는데, 간호사들이 너무 잘 먹어서 식후에 맛있냐고 물었더니 간호사들이 아주 맛있다고 했다. 그러자 의사는 “나는 자네들이 갈비를 뜯을 때마다 내 갈비가 뜯겨 나가는 것 같았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서 우리는 모두 웃었다. 사실 소갈비는 비쌌다. 하지만 아깝지 않았다.
퇴원하는 날, 군의관은 나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 것을 당부했다. 담배를 피우면 죽을 수도 있다고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 기회에 담배를 끊기로 했다. 담배를 피우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머리가 맑아진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지럽거나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했다.
담배를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담배 냄새가 구수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하는 아내에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억지로 참다 보니 종종 담배를 피우는 꿈을 꾸었다. 담배를 피우면서 피우고 있는 사실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꿈이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꿈인 것이 다행이어서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다.
이후 재발은 없었다. 공군사관학교에 복귀한 후, 처음에는 재발이 염려되어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점차 몸이 회복되는 것을 느끼면서 천천히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이후에는 달리기도 하고, 수영, 테니스 등도 해 보았다. 괜찮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나는 재발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때 아들이 태어났다. 1988년 7월 24일이었다. 만삭의 아내가 진통을 느껴서 아침에 청주 시내 산부인과로 갔다. 분만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얼마 안 되어 간호사가 나와서 아들이라고 했다. 첫째가 딸이고 둘째가 아들이면 백 점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나는 병원 근처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소주 한 잔을 기분 좋게 마셨다. 아들 이름은 동주라고 지었다. 나라의 훌륭한 기둥이 되라는 의미였다.
제4절 고려대 대학원 박사학위 과정 졸업
몸이 괜찮아지니까 나는 박사학위 과정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국어과 교수에게는 박사학위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국어과 교수는 교양과목만 가르치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동기생이 6명이나 되어서 언제쯤 박사과정 위탁 교육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나는 자비로 박사과정을 하기로 했다.
석사학위를 받은 지 2년 후인 1989년 3월에 충북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4월 1일 소령으로 진급한 나는 학교에 출근하면서 두 학기 동안 수강을 했다. 그런데 근무하면서 박사과정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박사과정에서 학점을 취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제대로 공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관학교에 출근하면 잡일이 많아서 공부에 집중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기생들이 모두 외국 유학이나 국내 대학에 공부하러 가는 것을 보니 부러웠다. 나는 교수부장을 찾아가서 위탁 교육을 받고 싶다고 했다. 교수부장은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위탁 교육을 받고 오는 것이 좋다며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어렵게 여겨졌던 박사과정 위탁 교육 파견 명령이 나왔다.
기쁜 마음에 나는 김윤식 교수님을 찾아뵙고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교수님은 나를 받아 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 당시 교수님 제자 중에는 박사과정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일부 교수에게 편중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교수별 선발 인원을 제한하고 있다고도 했다.
마침 교수님 방에는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는 후배가 조교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다른 대학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렵게 주어진 위탁교육 기회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고려대학교 박사과정 시험에 응시하겠다고 하니까 김윤식 교수님은 추천서를 써 주셨다. 고려대학교 학과장 김흥규 교수님께 추천서를 드리고 나오니까 한 여학생이 말을 걸었다. 어떻게 여기에 왔냐고 해서 박사과정에 응시하러 왔다고 했다. 그랬더니 대뜸 하는 말이 여기가 서울대에 갈 수 없는 사람들 받는 곳인 줄 아느냐고 했다. 나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 여학생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당시에는 고려대학교 역시 박사과정에 들어가려고 하는 학생들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시험 보는 날, 시험장에서 김윤식 교수님의 제자 한 명을 만났다. 경상대학교를 나와 서울대에서 같이 석사학위를 받은 이상갑 씨였다. 낯선 곳에서 아는 얼굴을 보니 무척 반가웠다.
고려대 박사학위과정 입학시험에 응시한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공군사관학교 후배 교수 가족들과 함께 야외로 놀러 갔다. 그런데 배가 갑자기 아팠다. 처음에는 맹장염인가 싶었다. 초보 운전자인 아내가 대신 운전하여 군 의료원에 갔더니 탈장이라고 했다. 할 수 없이 서울에 있는 국군수도통합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기흉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싶었지만 자주 입원하다 보니 아내에게 미안했다. 수술을 받고 얼마 후 병원에서 박사과정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때 공군사관학교 교수부장이 위문을 와서 합격을 축하해 주었다. 우울한 기분이 다소 사라졌다.
퇴원 후 나는 공군사관학교에 복귀했다. 그리고 1991년 2월에 고려대 박사학위 과정 위탁교육 파견 명령을 받았다. 우리 네 식구는 어머니가 계시는 서울로 다시 이사했다. 당시 어머니는 신정동 연립주택에서 신월동 시영아파트로 이사한 후 혼자 살고 계셨기 때문이다.
서울 아파트는 18평이지만 방이 3개여서 다섯 식구가 그런대로 지낼 만했다. 하지만 아이들 때문에 공부에 집중하기는 쉽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아이들을 불러놓고 이야기했다.
“아빠도 너희와 많이 놀고 싶어, 하지만 아빠가 열심히 공부해야 너희에게 맛있는 것을 사 줄 수 있어. 그러니 너희가 아빠를 도와줘. 이제부터는 아빠와 시간을 정해서 놀자.”
아이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이후 우리는 점심을 먹고 나서 30분 동안 같이 놀았다. 4살, 7살 아이들이 기특하게도 약속을 잘 지켰다. 아빠의 공부를 위해 조용히 놀거나 밖으로 나가서 노는 것이 신통했다.
고려대 박사학위 과정은 1991년 3월 2일부터 시작했다. 학교 분위기는 서울대와 많은 차이가 있었다. 시대 변화 탓이겠지만 일단 전쟁과 같은 시위가 없었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붕괴와 김영삼 정부의 출현은 대학생들의 시위를 사라지게 한 것 같았다. 덕분에 나는 새로운 분위기에서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 시기 나는 3년 안에 박사학위를 받으려고 노력했다. 3년 안에 학위를 받지 못하고 사관학교에 돌아가면 생도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 많은 업무가 있어서 논문에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국외 박사과정은 5년, 국내 박사과정은 3년 기회를 주었다. 외국 대학이 학위 받기가 더 어렵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런데 당시 고려대에서는 3년 안에 박사학위를 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했다. 게다가 나의 지도교수님 밑에는 과정을 수료한 지 오래인 제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후배들은 선배의 눈치를 보며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김인환 지도교수님을 찾아가 박사학위 논문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다. 군에서는 3년 안에 학위를 받아 오라고 한다는 말도 했다. 그러니 기간보다는 논문의 내용으로 평가해 달라고 어떻게 들으면 좀 시건방진 요청을 했다. 교수님은 “나도 기간보다는 내용을 볼 것이다.”라고 하면서 제자들이 논문 제출 마감 기한인 10년째에 논문을 가져오면 받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나는 며칠 후에 박사학위 논문계획서를 작성하여 교수님께 다시 찾아가서 의견을 들었다. 계획서를 보신 교수님은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당시 나는 한국문학사를 공부하면서 한국전쟁기 문학이 대부분 공백기로 서술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시기 작품에 대한 약간의 언급이 있더라도 사실관계가 불분명했고 그마저도 대부분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문학사에서는 한국전쟁기 문학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실제 작품을 읽어 보니 같은 선전문학이라도 북한에서는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반공 문학이라고 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나는 김윤식 교수님을 찾아가서 조언을 구했다. 교수님은 일단 남한의 종군작가단을 연구해 보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순간 나는 빛을 발견한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이것도 문학 연구가 될 수 있을까 염려했지만, 교수님이 인정해 주시니 가능하리라 확신했다.
이때부터 나는 정말 신나게 연구를 했다. 석사과정 때와는 달리 이론과 실천의 괴리로 인한 어려움도 적었다. 세상도 바뀌고 문학 연구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당시에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이 넘쳐났지만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주로 자료를 찾고 정리하는 데 집중했다. 대학도서관, 국립도서관, 국회도서관, 군사편찬위원회, 3군 사관학교 도서관과 박물관 등을 뒤지고 다녔다. 이 과정 중에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귀한 자료들을 발견하면서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또한 나는 3년 안에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현대문학 전공 고려대 교수님들을 모두 찾아뵙고 논문계획서를 보여드리면서 의견을 들었다. 교수님 한 분만이 문학 논문으로서의 적합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을 뿐, 나머지 교수님들은 모두 괜찮다고 했다. 나는 교수님들께 논문을 통해서 종군작가단 관련 내용을 정확하게 밝히겠다고 했다.
나는 3년 안에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서 수업 시 부여된 과제는 가능한 한 학위 논문과 연관 있는 것으로 주제를 정해서 작성했다. 그리고 마지막 6학기 때에는 이제까지 작성한 글을 종합하고 수정 보완해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했다.
김인환 지도 교수님은 논문 심사위원으로 김윤식, 최동호, 김명인 교수님 등을 초빙했다. 부족함이 많은 논문이었지만 교수님들은 나의 논문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주었다. 3년 안에 학위를 받아야 하는 나의 처지를 고려한 교수님들의 배려 덕분이었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고려대 박사학위 과정 졸업 사진
제5절 평가관리실 평가계획 담당 장교 발령
내가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1994년 1월이었다. 1981년 3월에 국문학 공부를 시작했으니 13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은 셈이다. 그때 나이는 만 37살이었다. 40살 이전에 학위를 받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뜻대로 되었으니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국가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2월 1일부로 공군사관학교 교수로 발령이 나서 청주에 있는 공군사관학교 관사로 이사했다. 18평 아파트였는데, 조금 기다리면 24평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여 어머니는 그때 오시기로 했다.
박사학위를 받고 나니 자신감도 있고 여유도 있어 좋았다. 생도를 가르치는 일이 즐거웠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은 잠시였다. 7월 1일에 중령으로 진급한 나는 8월 1일부터 공군사관학교 평가관리실 평가계획담당장교 보직을 받았다.
생도 선발과 평가 업무가 주 업무인 이곳은 공군사관학교에서 꽤 바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생도 수업은 최소한의 시간만 담당해야 했다. 보통 3시간짜리 한 과목을 담당했다. 당시 공군사관학교에서는 박사학위를 받고 오면 흔히 이런 말을 했다.
“공부 끝났으니 이제는 일 좀 해야지!”
일반대학 교수들은 보통 박사학위를 받은 후부터 제대로 된 공부를 시작하는데, 공군사관학교 출신 교수들은 대부분 보직을 받음으로써 행정 일에 몰두해야 했다. 그 결과 생도 수업은 석사학위를 받고 군에 온 단기 장교들이 주로 담당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생도 교육 차원에서만 보면 상당히 비효율적이었다.
나는 보직을 받자마자 생도 선발 업무를 담당하였다. 생도 선발 기간에는 국어 시험 문제 출제관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바쁘게 돌아갔다. 이런 현실 속에서 연구를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연구에 대한 미련이 많았지만, 논문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평가관리실에서 1996년 5월까지 있었으니 1년 10개월 정도 근무한 셈이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큰 사고 없이 일을 마치게 되어서 기뻤다. 처음에는 힘들었으나 평가관리실장 및 실원들과 함께 재미있게 일을 하면서 보람도 많이 느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여생도를 선발하게 되었던 일이다. 여생도 선발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어서 당시 언론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다른 사관학교가 거부하는 가운데 공군사관학교는 가장 먼저 여생도를 선발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함으로써 앞서 나가는 사관학교의 이미지를 보여주게 되었다. 그리고 평가관리실에서는 3군 사관학교 중 가장 세련된 홍보 책자를 만들어 이러한 이미지를 더욱 부각했다. 이후 나는 사관학교 교장으로부터 공로상을 받았다.
제6절 일본 쓰쿠바 대학 연수
평가관리실 보직을 마친 후 나는 1996년 8월에 일본 쓰쿠바 대학 연수 파견 명령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미국으로 갔지만 나는 일본을 택했다. 한국 근대문학에 미친 일본의 영향이 컸기에 평소 일본에 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쓰쿠바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온 후배 교수가 공군사관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박사과정을 쓰쿠바 대학에서 할 예정이어서 여름휴가 때 일본에 갈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우리가 살 집과 자동차 등을 미리 구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그의 비행기 표를 사 주었다.
8월 17일에 우리 가족은 도쿄 공항에 도착했다. 일본은 전반적으로 깨끗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공항버스를 타고 쓰쿠바에 갔다. 쓰쿠바에서 기다리고 있던 후배를 만나 식당에 갔다. 일본의 식당 종업원들은 아주 친절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졌다. 특히 여성 종업원의 목소리는 억지로 지어서 내는 것 같아 우습기도 했다.
이튿날 후배의 지도교수인 나나미 교수님을 만났다. 당시 나는 일본어로 유창하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읽고 쓰는 것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사관학교에서 1년간 일본어를 배운 적이 있고 위탁교육 시절 일본어로 된 책을 읽은 경험이 있었다.
나나미 교수님은 교수회의 시간에 교수들 앞에서 일본어로 인사를 하라고 했다. 나는 간단하게 메모해서 연습한 후 교수들 앞에서 인사를 했다. 인사를 마치고 나니 땀이 났다.
나나미 교수님은 매우 친절했다. 우리 가족을 두 번이나 집에 초대했다. 어느 날 그는 나의 박사학위 논문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제출하면 명예박사학위를 주겠다고 했다. 솔깃했지만 이번에는 가족들과 여유 있게 지내고 싶었다. 나는 여기에 있는 동안 일본어 공부를 하면서 논문 관련 자료를 찾고 싶다고 했다. 대학에는 마침 외국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주는 어학 센터가 있었다. 교수님은 어학 센터에서 무료로 일본어를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어학 센터에 가니 처음에는 일본어 능력 테스트를 했다. 테스트 후 중급 1단계에서 공부하라고 했다. 당시 일본어 프로그램은 초급 1-2 단계, 중급 1-4 단계 등이 있었다. 나는 연구보다는 일본어 공부에 주력했다. 덕분에 중급 1단계를 마친 후, 다음 학기에는 월반하여 중급 3단계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일본어를 공부하니 재미도 있었다. 일본어 수업이 없는 날에는 도서관을 뒤지면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자료들을 복사했다.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내야겠다고 생각해서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 결과 몇 가지 도움이 되는 자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 유학생들이나 일본 학생들과도 어울리며 많은 대화를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일본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했다. 한국 유학생들의 말에 의하면, 일본의 경우에는 별로 유명한 작가가 아니더라도 그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잘 되어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우리나라 국문학계는 외국 이론에 매달리느라 실증적 작업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집 근처에 있는 일본 초등학교에서 공부했다. 5학년인 딸아이는 처음부터 잘 적응했다. 그런데 2학년이었던 아들은 그렇지 못했다. 첫날 일본인 선생님께 아들을 데리고 갔더니 염려 말고 가라고 했다. 우리는 염려가 되어 숨어서 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가 악을 쓰며 울었다. 낯선 환경인 데다가 엄마 아빠가 보이지 않자 놀라서 우는 것 같았다.
나는 교장 선생님을 만나서 우리 아이들에게 일본어만 가르쳐 주고 아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다. 나머지 과목은 집에서 따로 가르치겠다고 했다. 교장 선생님은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걱정을 했었는지 내 이야기를 듣고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이후 아이들은 비교적 학교생활을 잘하는 것 같았다. 딸은 기악부에 들어가서 악기를 연주하며 즐겁게 생활했다. 아들도 처음에는 힘들어했지만 석 달 정도 되니까 친구들과 일본어로 이야기하면서 재미있게 놀았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고 왔지만, 일본어를 공부하면서 이웃에 사는 일본 사람들과 사귀더니 얼마 후에는 나보다 말을 더 잘했다.
일본의 여름은 한국보다 훨씬 더웠다. 햇살은 뜨겁고 습기가 많아서 걸어 다니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 후배가 구해 준 집은 다다미방으로 되어 있어서 여름에는 지내기에 괜찮았다. 처음에는 집이 너무 허름해서 아내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일본 물가가 하도 비싸다고 해서 후배에게 가능하면 싼 집을 얻어달라고 했더니 정말 싼 집을 구해 주었다.
집은 두 개의 다다미방과 거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전에 살던 사람이 청소를 제대로 안 했는지 군데군데 먼지가 쌓여 있었다. 아내와 나는 종일 쓸고 닦았다. 그리고 티브이, 오디오 등 전자제품을 새로 사서 방 안에 들여놓았다. 이제는 제법 살 만해 보였다.
문제는 겨울이었다. 날씨가 추워지니 다다미 틈새로 찬 바람이 들어왔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신문지를 잘게 접어서 모든 틈을 막았다. 그랬더니 바람은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추웠다. 집에는 냉난방이 가능한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으나 전기료가 너무 비싸다고 해서 거의 사용하지 못했다. 일본 사람들도 이것은 손님이 올 때만 잠깐 사용한다고 했다.
게다가 우리 집은 에어컨을 사용하면 다른 전기 제품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전압이 낮았다. 그래서 석유풍로로 난방을 해 보았다. 따뜻하기는 했으나 석유 냄새가 지독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일본 사람들처럼 ‘코다쯔’를 사용했다. 이불 같은 것을 덮은 상 안에는 조그만 전구가 달려 있었다. 외투 같은 것을 걸치고 그 상 밑에 발을 집어넣으면 생각보다 따뜻했다.
집에는 ‘오후로’(목욕통)도 있었다. 그 통은 어른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설명을 들으니 일본 사람들은 여기에 물을 넣고 전기로 물을 데운 다음 통 안에 들어가서 목까지 잠근 후 몸이 더워지면 나와서 몸을 씻는다고 했다. 나도 한번 해 보았더니 추위를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후부터는 모든 식구가 저녁이 되면 ‘오후로’를 사용했다.
‘오후로’ 얘기가 나왔으니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날 아내를 통해 알게 된 일본인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들은 일본인 남편들이 하루에 세 마디밖에 안 한다고 했다. “오후로와?(목욕물은 준비되었는가?), 다베로(먹자), 네로(자자)” 뿐이라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한국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고 했다. 한국의 경상도 남자들은 주로 “아는?(아이들은?), 묵자(먹자), 자자, 됐나?(만족하나?)”라고 얘기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일본인 여성들은 웃으면서 “그래도 한국 남편들은 아이들과 부인을 배려하고 있네.”라고 하면서 한국 남자들이 더 낫다고 했다. 일본이 한국보다 훨씬 더 가부장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겨울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따뜻했다. 쓰쿠바의 경우 기온은 최하가 영도 정도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에는 겨울에도 반 팔 상의에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아이들이 많았다. 일본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일부러 춥게 키운다고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일본 서민들의 ‘겨울나기 방법’인 것 같았다.
우리는 밖이 집안보다 더 따뜻했기 때문에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은 아침을 먹자마자 동네 근처에 있는 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은 깨끗하고 따뜻했다. 일본은 나라는 부자인데, 개인은 가난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도서관에서 아이들은 주로 애니메이션을 보고, 우리 부부는 책을 읽었다. 날씨가 따뜻한 오후에는 도서관 앞에 있는 공원에서 햇빛을 즐기기도 했다.
일요일에는 집 근처에 있는 일본인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일본인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일본인 교회를 택했는데, 마침 한국 유학생이 목사님의 설교 내용을 한국어로 통역해 주어서 좋았다. 담임 목사인 세이노 목사님은 외국에서 10년 정도 선교사 생활을 해서 그런지 교회가 국제적인 느낌을 주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많은 일본인을 알게 되었다. 특히 가깝게 지냈던 사람은 쓰쿠바 대학의 독일어 강사인 미야자키 씨와 회사원이었던 이나모또 씨였다. 그들은 우리를 집에 초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동경대를 나온 이또 씨의 부인은 우리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주고 집에도 초대해 주었다. 이외에도 많은 분이 우리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일본인들의 생각과 문화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방학 때에는 가족과 함께 여행했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던 곳은 도쿄 디즈니랜드였다. 도쿄 디즈니랜드는 지방에 사는 일본 아이들이 가장 가 보고 싶어 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만큼 시설이 좋았다. 아이들이 좋아하니 우리 부부도 모처럼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 가장 좋았던 것은 홋카이도 여행이었다. 홋카이도는 일본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고 해서 귀국하기 전에 꼭 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경비가 만만치 않았다. 마침 아는 사람이 ‘잘란’이라는 여행 잡지를 보면 싸게 여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잡지를 보니 정말로 싼 프로그램이 있었다. 비수기의 여행비는 성수기의 3분의 1 정도였다. 우리는 학교의 허락을 받은 후, 6월 초순에 홋카이도에 가기로 했다.
먼저 여행사에 전화로 예약을 했다. 일본어가 서툴러서 제대로 의사전달이 되었는지 염려되었으나 ‘팩스’를 통해서 다시 확인했다. 여행사에서는 공항에서 자동차를 자기네에게 맡기라고 했다. 나중에 공항에 도착한 후 전화를 하면 우리에게 자동차를 돌려주겠다고 했다. 공항에서의 주차비가 비싸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라 염려스러웠지만 믿고 그렇게 했다.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홋카이도 공항에 도착해서 차를 빌려주는 곳으로 갔더니 5,000Km 정도 주행한 깨끗한 차를 주었다. 여행비가 싸서 싸구려 차가 나올까 염려했었는데 기우에 불과했다. 새 차 냄새가 나는 그 차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1,500CC의 소형차였다. 운전을 해 보니 승차감도 좋았다. 우리는 차를 몰고 시내에 있는 마트로 갔다. 마트에서는 간단하게 요리해 먹을 수 있는 음식과 간식을 샀다.
홋카이도는 우리가 살고 있던 도시에 비해 훨씬 시원했다. 밤공기는 약간 쌀쌀하게 느껴져서 온천욕을 하는 것도 괜찮았다. 여행 중에는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아이들은 차를 몰고 산을 넘어가다 여우를 만난 일이 생각난다고 한다. 굶주린 여우에게 떡을 주었더니 여우가 떡을 먹다가 떡이 입에 달라붙었는지 떼 내려고 애쓰던 모습이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3박 4일 동안 우리는 안내서에 적혀 있는 대로 여행했다. 설명이 잘 되어 있어서 초행길임에도 헤매지 않고 관광을 즐길 수 있었다. 숙박은 여행사에서 제공해 준 호텔에서 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마지막 하루는 산장 같은 곳에서 잤다. 역시 괜찮았다. 홋카이도 여행은 겨울에 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기회가 되면 겨울에 홋카이도 여행을 해보고 싶다.
1년 동안 일본에서 지내면서 위험에 처한 일도 있었다. ‘나스’라는 곳에 놀러 갔을 때이다. 사화산 지대였는데 산은 꽤 높았다. 우리는 유학생 가족들과 함께 차를 타고 산 중턱에 있는 산장으로 갔다. 산장 근처에 온천이 있다고 해서 짐을 푼 다음 남자들은 모두 온천으로 갔다. 경치 좋은 산에서 온천욕을 하니 기분이 아주 좋았다.
오후 5시쯤 온천욕을 마치고 나왔더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안개가 껴서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비상등을 켠 후 중앙선만 보고 갔다. 그런데 길을 잘못 든 것 같았다. 유턴해서 돌아가야 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길 한쪽은 낭떠러지 절벽이었기 때문에 위험했다.
서서히 후진하며 차를 돌리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다리가 덜덜 떨렸다. 차가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무사히 산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때 일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처음 일본에 가기로 했을 때는 지진이 가장 걱정되었다. 그런데 후배 말에 의하면, 쓰쿠바 도시는 비교적 안전하다고 했다. 실제로 가 보니 쓰쿠바는 깨끗하고 잘 기획된 도시였다. 넓은 도로와 여유 있는 주차장이 우선 눈에 띄었다. 특히 자전거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어디든 자전거로 이동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지진이 나서 긴장한 적이 있다. 학교에서 테니스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딛고 서 있던 땅이 좌우로 움직였다. 순간 조금 어지러웠다. 놀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후 지진이 멈추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같이 운동하던 일본인이 웃으면서 집에 가서 가스나 전기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해 보라고 했다. 집에 갔더니 물건들이 조금 떨어져 있을 뿐 큰 이상은 없었다.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일본에서 사는 동안 나는 여러 부류의 일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 사람들에 대한 편견도 많이 사라졌다. 사람 사는 모양이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발전해 있어서 그런지 배울 점도 많았다. 일본인과 한국인은 비슷하게 생긴 것 같으면서도 달라서 재미있게 느껴졌다.
내가 다니던 일본인 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교회에 온 지 얼마 안 된 한국인 유학생이 교회에서 외국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주면 좋겠다는 내용의 건의를 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미리 계획하지 않은 일이라 당장은 곤란하니 내년 계획에 반영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실제로 일본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학생은 이후 나오지 않았고 공부하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없었는데, 마침 우리 부부가 들어와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번은 일본 무관이 일본에 파견된 장교들을 불러서 함께 식사한 적이 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찻집에 갔다. 찻집에는 8명이 함께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우리는 두 자리를 합치면 안 되냐고 하니까 종업원은 안 된다고 했다. 그랬더니 무관이 “얘들은 되는 게 없어!” 하면서 우리에게 두 자리를 합치게 했다. 그랬더니 종업원들은 우리들의 행동을 보고만 있었다. 자기네는 안 된다고 했으니 자기네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나는 이것이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한국 사람은 미리 계획이 되어 있거나 규정이 있어도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바꾸려고 한다. 하지만 일본 사람은 계획이나 규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나는 1년간 일본에서 살면서 일본과 일본인을 조금 이해하게 된 것이 일본 연수 체험의 가장 큰 소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가족에게도 새로운 에너지를 준 매우 값진 선물이었다. 내가 매일 공부한다, 근무한다고 하면서 함께 하지 못하다가 일본에 와서는 거의 매일 함께하니 아내와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언제 기회가 되면 일본에 다시 한번 가 보고 싶다.
일본 여행 기념사진
제7절 사관생도 교육과 연구 활동
1997년 8월 16일에 귀국한 후 나는 공군사관학교에서 다시 생도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는 주로 국어와 작문, 의사전달 등에 대해 강의했다. 장교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그런데 생도들을 가르치면서 수업 내용도 중요하지만 수업 방법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생도들은 힘든 훈련을 받으면서 학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생도들이 졸지 않고 재미있게 수업에 임하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열심히 준비해서 가르치고 있는데 생도들이 졸면 화가 났기 때문이다. 화날 때마다 나는 생도 때 공포 분위기 속에서 우리를 가르치던 교수님을 생각했다.
생도들이 활발하게 수업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나는 여러 가지 수업 방법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토론식 수업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주입식 교육이 일반적이던 사관학교에서 토론식 수업을 하는 것은 다소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나는 생도들에게 토론 주제를 정해주고 미리 준비해 오게 해서 토론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책상을 토론 대형으로 재배치하고 서로 마주 보게 하였다. 그리고 사회는 내가 맡았다. 처음에는 생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나는 생도들에게 돌아가면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도록 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수업을 하니까 생도들은 졸지 않았고 나중에는 토론에 적극 참여하였다. 생도들은 강의 평가 때 토론 수업을 통해 토론 주제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면서 토론 수업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후 나는 생도들이 졸지 않고 수업에 적극 참여하게 함으로써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어느 날, 나는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에 대한 토론수업을 했다. 어린이를 유괴하고 살해한 김도섭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죄에 대한 반성보다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오히려 아이의 어머니를 위로하는 내용에 많은 생도들이 분개하며 기독교인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나는 이 작품이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의 구원론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음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문학과 종교의 거리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어쨌든 이때 생도들은 졸기는커녕 매우 진지하게 토론했다. 그런데 이때 기독교를 강하게 비판하던 생도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나중에 기독교인이 되어 지금 열심히 믿음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믿게 된 것은 토론 수업 덕분이었다고 했다.
나는 국어 교재도 새롭게 바꾸었다. 그 일환으로 모윤숙의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빼고 국문학계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시들을 교재에 넣었다. 좋은 시들도 많은데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시를 굳이 사관학교의 국어 교재에 넣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군사관학교 생도들은 이 시를 모두 외워야 했다. 못 외우면 수업 시간에 벌을 받았다. 시험 문제도 이 시를 외워서 쓰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일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었기 때문에 이 시를 국어 교재에서 뺐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 선배님이 나에게 이유를 묻더니 약간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이 시는 그 선배님이 유일하게 외웠던 시였기 때문이다.
나는 또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출판하기 위해 노력했다. 설명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추가 설명을 하였다. 이 책은 1998년에 <<한국전쟁기 종군작가 연구>>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후 이 책은 2002년에 <<한국전쟁과 종군작가>>라는 제목의 증보판으로 출판되었다. 이전의 책에서는 소설가만 다루었지만, 이번에는 시인에 대해 논의한 논문을 추가하고 한자로 된 글자를 모두 한글로 바꾸었다. 그리고 종군작가의 시, 소설, 평론 목록 등을 추가하였다. 이후 나는 <<한국전쟁과 세계문학>>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는 한국, 북한, 중국, 미국, 일본, 터키의 한국전쟁문학에 대한 연구 논문을 게재하였다. 한국전쟁을 다룬 세계문학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라는 점에 그 의의를 두었다.
그리고 2007년에는 그동안 발표한 논문들을 다시 정리하여 <<전쟁과 소설>>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는 한국전쟁기 남북한 소설, 한국전쟁소설, 군 기관지 소설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책은 이후 우수 학술 도서로 선정되었는데, 나도 기뻤지만 출판사 사장이 더 기뻐하는 것 같았다.
흔히 교육과 연구는 별개의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교육과 연구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연구해야 교육도 자신 있게 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시기 나는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