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인도네시아대학교(UI) 객원교수

by 신영덕

인도네시아 도착 첫날


2009년 2월 19일 아내와 내가 탄 항공기는 7시간 만에 자카르타 근처에 있는 수카르노 하타 공항에 도착했다. 수카르노와 하타는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의 이름이다. 공항에는 초콜릿 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과 '질밥(인도네시아 이슬람 여성이 머리에 두르는 의복)'을 한 여성들이 눈에 띄었다. 드디어 인도네시아에 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마음이 설레었다.

짐 검사를 마치고 개찰구로 나오자 인도네시아대학교(UI)에 근무하는 두 명의 여사무원과 남자 대학원생이 내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 그들을 대하자 마치 낯선 곳에서 아주 잘 아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차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오자 덥고 습습한 밤공기가 느껴졌다. 한국은 추운 겨울이었고 비행기 안도 역시 추울 것 같아 겨울옷을 입고 왔었기에 더욱 훈훈했다. 우리는 ‘끼장’이라는 승용차에 짐을 싣고 차에 올랐다. 에어컨 바람이 그 어느 때보다 시원하고 좋았다.

차가 인도네시아대학교를 향해 가는 동안 우리는 영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대화는 즐겁고 유쾌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인도네시아에서는 참 많이 웃었던 것 같다.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때마다 되물어 보기가 민망해서 웃으며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야경이 근사한 공항을 벗어나자 곧 자카르타 시내가 나타났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고속도로를 ‘똘’이라고 하는데, ‘똘’이 자카르타 시내 중심을 통과하고 있었다. 도로 양쪽에 세워진 건물들은 밝은 네온사인 때문인지 서울의 건물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느껴졌다. 내가 생각했던 인도네시아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당시 나는 인도네시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객원교수로 선발된 후에는 인도네시아에 관한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구했다. 그런데 정작 필요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내가 파견되는 대학에 강의용 빔프로젝트가 있는지, 만약 없다면 환등기나 복사기 같은 것은 있는지 궁금해했던 일이 기억난다.

인도네시아대학교는 ‘데뽁’이라는 곳에 있어서 공항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 정도 가야 했다. 물론 길이 막힐 때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당시 인도네시아에는 도로가 많지 않아 종종 길이 막혔다. 이것을 인도네시아어로 ‘마쯧’이라고 한다. 자카르타는 교통정체가 심해서 홀짝제를 시행하기도 하는데, ‘코로나 19’ 때에는 교통이 조금 원활해지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한인들은 인도네시아대학교가 한국의 서울대학교와 같은 곳이라고 한다. 물론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서울대학교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해마다 이루어지는 대학 평가를 보면 조금씩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도네시아대학교는 족자카르타에 있는 가자마다대학교(UGM)와 함께 매번 1, 2위를 차지하고 있어 인도네시아 최고의 명문 대학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드디어 인도네시아대학교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열거나 닫는 문이 없었다. 단지 조그만 검문소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안에 있는 직원들은 학교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주차 카드를 주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학교는 대단히 크게 느껴졌다.

우리는 인문대 근처에 있는 일본연구소로 안내되었다. 일본연구소는 일본이 투자하여 지은 시설물이라고 했다. 외부 손님들이 이곳에서 묵으면서 세미나를 할 수 있게 만든 건물이었다. 지정해 준 숙소 문을 여니 테이블 위에는 예쁘게 생긴 용과일과 몇 가지 다른 과일이 담겨 있는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바구니에는 우리를 환영한다는 문구가 적힌 테이프가 달려 있었다. 정성이 느껴져 감사했다. 나는 잠을 청하면서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시작해 보자고 속으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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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카르노하타 공항


인도네시아대학교(UI) 한국학과와 객원교수 활동


인도네시아대학교(Univesitas Indonesia)는 1997년부터 인문대학에서 교양선택 과목으로 한국어 강좌를 운영했다. 매 학기 20-50 명의 학생들이 한국어를 수강했다. 그런데 교수 부족으로 인해 한국어 강좌 운영이 어려운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인도네시아대학교는 자카르타 주재 한국 대사관 및 한국어 세계화 재단, 한국국제협력단, 한국국제교류재단 등의 지원으로 2006년 8월에 4년제 한국학과(한국어와 한국문화 전공)를 개설했다. 한국어과 또는 한국학과는 나시오날대학교, 가자마다대학교에 이미 개설된 바 있지만 이들은 모두 3년제 과정이었다. 따라서 4년제 정규 학사과정의 한국학과 개설은 인도네시아대학교가 처음이다.

인도네시아대학교 한국학과의 인기는 매우 좋은 편이다. 한국학과 개설이 정식 인가된 2006년에는 320명의 학생들이 한국학과에 지원했다. 그런데 2007년에는 1,070명이 지원했고, 이후 지원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30-40명을 선발하다가 60명을 선발하기도 했다.

한국학과는 입학 경쟁률이 평균 20-30 대 1 정도이고, 인문대학 내에서는 영어과와 함께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한국학과에 대한 선호도가 이처럼 높은 것은 인도네시아의 한류 열풍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나 졸업 후 취직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한국학과 졸업생들은 타 전공 학생들보다 취직이 용이하여 한국의 대기업을 골라가며 선택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대학교 한국학과의 졸업 이수학점은 2015년 현재 144 학점이다. 이 중 전공 필수 학점은 98 학점이다. 학생들은 한국어 39 학점, 언어학 15 학점, 한국 문학 18 학점, 한국 역사와 문화 21 학점, 논문 5 학점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다.

한국학과 학생들은 이러한 수업을 통해 한국어 및 한국 사회와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을 함양하고 있다. 한국학과 학생들이 예의가 바른 것은 이와 같은 강좌를 통해 배운 한국 문화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례로 학생들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도 교수가 나타나면 모두 일어나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이러한 광경은 한국 대학교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것이기에 매우 흥미로웠다.

인도네시아대학교 한국학과 교수는 인도네시아인 교수, 한국국제협력단, 한국국제교류재단 등에서 파견된 한국인 객원교수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인 교수들은 인도네시아인 교수들과 함께 한국학과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강의는 물론 논문지도, 학생들의 애로사항을 해결하기 위한 면담, 한국학 관련 세미나 개최, 인도네시아인 교수들과의 화합을 위한 모임, 학교 행사 참여 등을 통해 한국 및 한국인의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노력했다.

인도네시아대학교 한국학과 졸업생들은 주로 한국 기업에 취직했다. 많은 우수한 학생들이 한국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하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소수의 졸업생만이 한국에서 유학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인 교수들 역시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싶어 하지만 소수만이 한국에서 공부했다.

인도네시아대학교 한국학과에서는 한국의 일반 대학에서 출판한 책을 한국어 교재로 사용하다가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발행한 <<인도네시아인을 위한 종합 한국어>>를 교재로 사용했다. 나머지 과목은 인도네시아어로 출판된 교재가 별로 없어서 담당 교수들이 자체 제작한 교재를 사용했다.

인도네시아 대학들은 한국과 달리 9월에 1학기를 시작해서 12월에 종강을 한다. 2학기는 2월에 시작해서 5월에 끝난다. 물론 학교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다. 게다가 매년 조금씩 변하는 ‘르바란’ 축제일에 의해 교육 일정에 변동이 생기기도 한다.

교육 일정 외에 한국과 다른 점은 학생 성적 평가 방식을 들 수 있다. 한국 대학에서는 대부분 상대평가를 하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절대평가를 하고 있다. 나는 절충적인 방식으로 평가를 했다. 성적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단지 몇몇 학생들이 성적을 올려달라고 사정한 적이 있었지만, 내가 잘못하지 않았으면 정중히 거절하여 평가의 엄정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점수를 구걸하는 학생들은 별로 없었다.

인도네시아대학교 학생들은 대체로 명랑하고 똑똑하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인지 대부분 나의 강의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따라서 가르치는 일이 즐거웠다. 학생들의 호기심에 찬 눈을 보면 가끔 공군사관학교 수업 장면이 생각났다. 내가 생도 때도 그랬지만 수업시간에 조는 생도가 많았다. 항상 심신이 피곤하니 수업시간은 안식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웬만한 명강의가 아니면 생도들의 관심을 끌기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우리나라에서 꽤 유명한 교수님이 생도들에게 강의를 해 보고 싶다고 해서 특강 시간을 마련해 드린 적이 있다. 그런데 강의를 시작한 지 10분도 안 되어 생도들이 졸기 시작했다. 교수님이 당황하시는 것 같아서 나는 조용히 돌아다니며 조는 생도들을 깨워야 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대학교 학생들은 달랐다. 특히 여학생들은 별것도 아닌 이야기에 재미있다고 웃었다. 수업시간에 웃음소리가 많으니 강의하는 것이 즐거웠다. 학생들은 내가 인도네시아에 처음 왔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나에게 인도네시아 문화에 대해 여러 가지 알려 주었다. 식사할 때나 인사할 때 모두 오른손을 사용해야 하며 왼손은 화장실 이용 시에만 사용한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또 어떤 학생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해 달라고 하면서 친절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자 한 학생이 나에게 와서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주저했더니 그 학생이 내 오른손을 잡고서는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으나 상대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표시하는 인도네시아인들의 인사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학생들의 특징은 시간 개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수업시간에 지각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학생이 면담 요청을 하고서 나보다 늦게 온 적도 있다. 이유를 물어보면 대개 ‘반지르(홍수)’ 때문에 길이 막혀서 혹은 기차가 연착되어서 늦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러한 행동들이 이해가 되지 않아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약속시간에 조금만 늦어도 마음이 불안하다. 이런 강박증은 1분만 늦어도 처벌을 받았던 사관학교 생도 생활 경험 때문에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약속 장소에 미리 도착한다. 늦을까 봐 초조해하는 것보다 미리 가서 기다리는 것이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인들의 시간 개념은 인도네시아인들의 낙천적인 성격과 환경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늦는 것에 꽤 관대하다. 이런 것을 보니 중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서양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에게는 ‘코리안 타임’이 있다며 놀렸다는 것이다.

언젠가 평소 친하게 지내는 인도네시아인 교수가 ‘한국 젊은이들은 왜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육아 및 교육 부담이 커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그랬더니 역시 한국 사람들은 과학적이라고 하면서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며 크게 웃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6년 동안 인도네시아대학교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특히 강연을 많이 했다. 인도네시아대학교, 한국문화원, 한국대사관, 자카르타 한국인학교, 가자마다 대학교, 나시오날 대학교, 세종학당, 인도네시아 고등학교 등에서 나는 주로 한국문학, 한국어교육, 한국 문화, 한류, 청소년 진로 문제 등에 대해 강연했다.

인도네시아대학교에서 근무하는 동안 나는 인도네시아의 유명한 문학잡지 <<호리손(HORISON)>>에 나의 문학평론을 게재했다. 이것은 한국전쟁 당시 남북한 소설에 대한 것이었다. 마침 같은 대학교에 근무하고 있던 로스티뉴 교수가 이 글을 인도네시아어로 번역해 주었다. 이것은 인도네시아 문학잡지에 게재된 최초의 한국문학 평론이 될 듯싶다.

이외에도 나는 국내외 학술대회에 참가하여 논문을 발표하고 인도네시아 한인신문과 잡지 등에 글을 오랫동안 게재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문화를 한국에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도네시아 사람들 이야기>>를 기획 편집하여 2015년에 책으로 출판했다. 인도네시아의 20여 대표 종족과 그들의 문화를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은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도네시아를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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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인도네시아대학교 호수 앞에서 찍은 사진


인도네시아어와의 씨름


인도네시아대학교에서 나는 주로 한국어와 한국문학에 대하여 강의했다. 그런데 한국문학 강의는 쉽지 않았다.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가며 열심히 설명했으나 학생들은 이해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어느 날, 기말시험을 보고 난 후였다. 한 여학생이 한국문학사 시험공부를 하면서 너무 어려워 눈물을 흘려가며 공부했다고 하면서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 열성에 감동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인도네시아어로 된 한국문학사 교재가 없었다. 대부분의 한국문학사는 내용이 어려운 데다가 한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마침 한글로만 되어 있는 교재를 구할 수 있어서 그것으로 강의했다. 그래도 학생들은 어려워했다. 인도네시아어로 된 교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재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선 인적 물적 자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강의를 위해서라도 빨리 인도네시아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인도네시아에 오기 전 나는 주로 영어 공부를 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객원교수를 선발할 때 요구하는 외국어 능력은 대개 영어 회화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에 와 보니 영어보다는 인도네시아어가 훨씬 많이 필요했다. 나는 학과장 교수에게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하겠다고 했다. 학과장 교수는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무료로 인도네시아어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와 아내는 첫 학기 수업이 끝날 즈음인 5월 말부터 학교 내에 있는 언어교육원(BIPA)에서 정식으로 인도네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방학 기간에 특별히 운영하는 속성반이라서 그런지 학습 진도가 너무 빨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일반 학기에서 넉 달 동안 가르치는 내용을 두 달 동안에 가르쳐야 하니 진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인도네시아어를 처음 배우는 우리에게는 이 수업이 정말 힘들었다. 두 달 동안 거의 매일 숙제만 했다. 그렇지만 우리와 같은 초보자 몇몇을 제외한 학생들은 입과 전에 미리 공부하고 와서 그런지 그다지 어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인도네시아어를 배우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듣기 수업이었다. 잘 들리지 않으니 수업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교수들은 인도네시아어만 사용하면서 그날그날 나누어 주는 프린트물로 수업하였다. 예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열심히 한 덕분에 초급 과정은 무난하게 수료했다.

중급과 고급 과정의 경우 나는 강의를 하면서 인도네시아어 수업에 참여했다. 그러다 보니 수업에 참여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50살이 넘어서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는 것이 무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하는 것보다 차라리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덕분에 1년 코스를 2년 만에 졸업했다. 무언가를 마무리하였다는 사실이 기쁨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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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어 과정 수료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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