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치과의사가되었습니다만,

운이 좋았던 걸까? 나빴던 걸까?

2001년 겨울, 17평쯤 된 집 공기가 침울하다. 고3 여름 아빠는 해외파견으로 동생과 외국으로 나갔다. 나의 고3 마지막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남은 엄마가 학교 1분 거리에 구한 집이었다. 전화기가 쉴 새 없이 울렸다. 엄마는 전화선을 뽑아버렸다. 1년의 고생을 단 하루로 결정한 그날, 나는 집에서 죄인이 되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주목받는 학생은 아니었다. 반에서 상위권 정도. 그냥 모범생이지만 특출 나지는 않은. 학교의 특별관리 대상에 속하지는 못했다. 그러더니 고3 때 성적이 수직 상승했다. 의대 지망생 카테고리에 들었다.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모의고사를 전과목에 1개 틀린 적도 있었다. 그렇다. 자랑이다. 의기양양했다. 수능 보기 전날까지의 일이다.




수능 당일 열이 나고 몸이 으슬으슬했다. 타이레놀 같은 해열진통제를 먹었어야 했는데 종합감기약을 먹었다. 종합감기약에 잠 오는 성분이 있었던 걸 엄마도 나도 몰랐다. 언어영역 듣기 평가 5개 중 4개를 틀렸다. 조느라 못 들었다. 무슨 정신으로 1교시 시험을 본지도 모르겠다.


역대 본 적도 없던 성적이 나왔다. 그 전 해 수능은 만점이 즐비했던 해였다. 2002년 수능은 불수능이었는데 우리 모녀는 좌절감에 빠져있느라 알 수 없었다. 전화선도 뽑았고 티브이 전원도 꺼버렸다. 배치표 상 내 점수로는 지방대 의대도 힘들었다. 재수는 기정사실이었다.


그런데...


조상님이 보우하셨나.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수능 못 봐도 대학 간다. 영어만 잘해도 대학 간다."를 주장하신 분이 교육부 장관님이셨다. 눈치를 보던 대학들이 정부의 등쌀에 최초로 수능 총점 반영을 하지 않고 영역별 점수를 반영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그것도 수능은 1차 3 배수 커트라인 가이드로만 기준을 잡고 2차부터는 제로베이스로 심사하는 것으로 말이다.


이게 무슨 복인지.

그렇게 나는 망한 언어영역을 버리고 수리와 과탐, 외국어 영역만 가지고 원서를 썼다. 그래도 의대는 좀 불안했다. 치대가 조금 의대보다 낮겠지. 치대나 의대나 의사 되는 건 똑같겠지. 치대로 원서를 넣는다.


그렇게 교육부 장관님이 보우하사 생각지도 못한 치과대학에 입학한다.




명문대 치대생의 타이틀은 달콤했다. 어디 가나 우쭈쭈 대접을 받았다. 대한민국은 참 공부 잘하는 학생은 살기 좋은 나라다. 물론 내 앞에서 필리핀 출신 치과의사가 많아서 치과의사는 사양길이라는 말을 걱정인 척 건네는 어른들도 있었다. 걱정이라 했으니 걱정일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명문대 치대 합격생의 타이틀은 황홀했다.


본과생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치과 공부를 배우기 시작했다. 매일 손톱보다 작은 치아를 들여다보며 1,2mm 오차가 생기지 않게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매번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현타가 오게 만들었다. 이 길이 아니다 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주위의 달콤한 시선을 뿌리치기에 겁은 많고, 경험은 없었다. 순간을 버티며, 학교 수업 외에서 즐거움을 찾으려고 부유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졸업을 했고, 인턴을 했으며 이제는 전공과를 정하라 했다. 교정과를 가고 싶었는데 여자를 안 뽑는다 했다. 보존과(신경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과)는 경쟁률이 너무 높았다. 대학을 정할 때처럼 또 안전하고 비겁한 선택을 하기로 한다. 떨어지지 않을 과. 내가 디디고 있는 것이 길인지 뭔지도 모른 곳에서 내려가지 않을 선택.


그것이 과연 선택이었을까.


학생 때는 아이들 울음소리가 싫어 근처도 잘 안 오던 과를 나는 그렇게 선택한다.


그렇게 얼떨결에 소아치과의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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