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가 왜 글을 쓰세요?
성실성은 타고났으므로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했다. 어느덧 손재주도 좋아지고 실력도 늘어, 나를 보고 찾아오는 환자들도 늘어갔다. 내가 맡은 아이들의 성장을 바라보며 미약하지만 보람도 느꼈다. 결혼과 출산에 대해 안할 수 있다는 옵션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튀고 싶지 않았다. 평생을 튀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강의실에서도 늘 가운데 앉았었고, 어느 집단에 가도 무리부터 형성했다. 혼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것,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결혼과 출산도 그것의 연장선이었다. 남들이 하니 나도 당연히 해야 하는 것. 그 뿐이었다. 그래도 아이를 다루는 직업이니 조금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내가 출산에 대한 아는 전부였다. 몰라서 용감했다. 아이를 낳는 것을 관장하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 아이를 쑥 빼내고 나면 그 전처럼 홀가분해질 줄 알았다. 어쩜 이리도 몰랐을 수 있을까.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어이가 없지만, 그 시절 나는 그랬다.
아이를 낳으면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것이 좋다 그랬다. 그래서 그러기로 했다.
출산휴가 3개월 후 나는 4일을 일했고, 3일은 아이를 돌보았다. 그런데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가장 끔찍했던 기간이 바로 파트타임으로 일했던 시간들이었다. 직업인으로서도 엄마로서도 죄책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는 풀타임으로 일하는 후배들에 비해 환자 수가 잘 늘지 않았으며 내 환자가 응급 상황으로 예약이 아닌 날 찾아올 때에 다른 선생님들의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다. 진료를 한다는 것은 딱 떨어지는 일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일이기 때문에 내가 일하는 날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았고 그런 일들이 내내 버거웠고 일을 제대로 해내고 있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나를 억눌렀다.
일을 나가지 않는 요일은 집에서 아이를 돌보았다. 백일도 안 된 아이를 타인에게 맡겼다는 죄책감이 작용했고, 몸이 부서져라 쉬는 날은 아이를 돌보았다. 시판 이유식은 잘 안 먹는 아이였기에 이유식까지 다 만들어 먹이는 정성을 보였다. 당시 조리원동기 모임이 있었는데 그 중 일을 나가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임은 빠지면 안 될 것 같다는 쓸데없는 성실성으로 아이를 데리고 꾸역꾸역 참석하고 피곤함에 토할 것 같았다.
심리학자인 제니퍼 스튜어트는 예일대학 졸업생 한 그룹을 연구하고 나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사회적 경력과 어머니 역할을 병행하려고 노력하는 여성이 걱정스럽다. 그들은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완벽을 추구하므로 그만큼 낙담할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높은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면 직장에서 집으로, 아니면 집에서 직장으로 도피할 가능성이 크다.”
여느 때와 같은 퇴근길이었다.
운전대에 앉아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고, 좌회전 신호가 떨어지자 엑셀을 세게 밟았다. 이모님을 퇴근시켜 드리려면 빠른 시간에 집에 도착해야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몸이 휙 돌았다.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처한 현실이 아닌 것처럼 '사고가 난 건가?'라고 남의 일처럼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믿기 어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
다행히 심하게 다친 것은 아니었다. 허리 디스크가 다쳐서 1주일간 입원을 해야 했고, 젊은 나이에 난소에 종양이 발견된 정도? 그보다 이대로 죽으면 참 편안하겠다. 는 생각이 든 것이 충격이었다. 평소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인지라 삶의 대한 욕망이 누구보다 크다 생각했는데 사고의 순간 죽음, 이후의 해방감을 느끼다니.
내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일을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일복 많은 여자는 쉴 수가 없다. 바로 지금 병원에 오퍼가 왔고 또 그냥 그렇게 직장을 옮겼다.
햇살이 눈부시던 어느 날이었다. 쉬는 날이라 각종 일들을 처리하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흘렀다. 숨이 안 쉬어졌다. 눈앞에 보이는 심리상담소 아무 곳에나 들어갔다. 오늘이 아니면 영원히 못 갈 것 같았다.
상태가 너무 심각해 보였을까?
아니면 예약환자가 없으셨을까?
조금 기다리라 하더니 상담사님은 곧 상담을 시작해주었다. 그냥 나의 이야기를 했다. 조금은 시원해진 것 같았다. 숨이 쉬어지기 시작했다.
상담을 좀 받아보기로 했다.
그 후 몇 개월간 그녀는 몇 가지 질문들로 속을 뒤집어주셨다. 10년 전 동기가 말한 억울한 말이 떠올라 새벽에 벌떡 일어나기도, 20년 전 엄마의 행동이 떠올라 야밤에 가슴을 치기도. 그동안 꾹꾹 눌러놨던 감정들이 어찌나 많던지 몇 개월을 토해내도 계속 올라왔다.
치과치료를 할 때도 염증이 너무 심하면, 고름을 먼저 짜내지 않는다. 자칫 잘못 건드리면 염증이 더 퍼져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항생제를 먹어서 넓게 퍼져있는 염증을 한 곳으로 모은 뒤에 고름을 짜낸다.
돌이켜보니, 1년간의 심리상담은 감정의 염증을 모으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염증은 한 곳에 닿아 익어가고 있었다.
“아직 자라지 못한 어린 시절의 나”에 멈추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