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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Dec 17. 2019

회사 헬스장엔 외벌이들이 온다

건강이 의무인 사람들


부장님, 집에 안 가세요?

운동해야지, 살라면.



회사 건물 지하에 피트니스 센터가 있다. 직원 복지 차원에서 만들어진 곳이지만 거의 이용을 하지 않았다. 아침에 화장을 하고 와서 점심시간에 또 씻은 건 너무 귀찮은 일이니까. 거의 이용을 하지 않다가 피트니스 사우나가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점심시간에 내려갔는데, 회사 사람들이 많아 깜짝 놀랐다. 아니 이 배신자들!


특히 2030대 젊은 직원들이 많았다. 단단한 피부와 균형 잡힌 체형을 가진 그들인데, 시간을 쪼개서 열심히 운동하고 있었다. 후배 한 명에게 점심 운동 스케줄을 물어보니 11시 50분부터 30분 동안 유산소를 하고, 20분 동안 웨이트를 하고 씻고 사무실로 올라와 점심을 먹는다고 한다. 점심메뉴는 계란 2개, 닭가슴살(또는 프로틴), 고구마. 그들에게 자극받아 나도 운동을 시작했다.   


점심시간에 운동을 하니 장점이 많았다.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후루룩 국밥 하나를 해치우면 오후 내내 속이 더부룩하다. 유산소 운동을 하고 점심을 가볍게 먹으니 속이 편하고, 속이 편하니 업무에 집중도 더 잘됐다. 단, 단점이 하나 있었다. 사회적인 관계를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


사람들과 안 만나고 운동을 하니 몸은 건강해지는 것 같긴 한데 회사 오는 재미가 없었다. 동기들과 상사 욕도 하고, 후배들이랑 근황 토크도 하고, 선배들에게 조언도 얻는 귀한 시간이 없어지니 일상의 에너지가 절반 이상 사라졌다. 여자는 하루에  4만 마디를 뱉어야 한다는데 4천 마디도 못 뱉으니 우울해졌다. 결국 운동시간을 바꿨다. 저녁으로.


저녁시간에 피트니스를 가니 점심시간보다 훨씬 사람이 적었다. 하긴, 6시가 지나면 일단 이 건물에서 탈출하고 싶겠지. 러닝머신을 켜고 속도를 4.0으로 맞췄다. 빙글빙글 도는 레일에 맞춰 걷는데 누군가 옆에서 어깨를 탁, 친다.


"애 보러 안 가고 뭐해!"

예전 부장님이다. 어색하게 눈인사를 나누고 TV 채널을 맞추는데 또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보인다. 옆 부서 부장님이다. 물을 한잔 마시고 웨이트 존으로 가는데 오만상을 쓰고 운동을 하는, 우리 부장님을 만났다. 일주일 정도 저녁시간에 운동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인물들의 공통점을 찾았다. 저녁시간에 피트니스를 찾으시는 분들은 4050대 외벌이 차장, 부장님들이었다.


일단 맞벌이를 하는 3040대 직원들은 퇴근하고 집으로 달려가기 바쁘다. 운동이 하고 싶으면 퇴근하고 나서 집에서 하거나 점심시간을 활용한다. 미혼 직원들은 저녁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술을 먹으러 가거나 자기 계발을 하러 떠난다. 결국 저녁시간 피트니스에 남는 건 저녁에 딱히 할 일 없는 4050, 집에 가서 저녁을 먹기 애매(하고 미안)한 외벌이 남성들이었다.


맞벌이인 나도 저녁에 운동하는 게 쉽지 않지만 남편에게 배려를 구해서 1~2시간은 운동을 할 수 있었다. 퇴근하고 운동을 하다 보니 부장님, 차장님들과 소소하게 대화를 할 일이 생겼는데 한분이 인상에 남았다. 나와 다른 본부에서 근무하는 부장님인데, 이분은 평생 회사에서 운동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그런데 왜 운동하시는 거예요?"라고 물으니 본인이 47세에 늦둥이를 품에 안았다고 하셨다. 아! 경조사 게시판에서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건강검진 때 당뇨, 간수치 등 건강지표가 안 좋게 나와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예쁜 늦둥이 딸을 품에 안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 이쁜 아기를 건강하게 오래 보려면 건강해야 하니까. 다행히 운동을 하고 나서 건강지표가 많이 개선되었다고 했다.


이제 돌이 막 지난 딸 사진을 자랑하던 그가 다시 러닝머신으로 돌아갔다. 그는 천천히 걷고 있었지만 왠지 발걸음이 절박해 보였다. 건강해지기 위해 운동하는 게 아니라, 삶을 위해 걷는 것 같았다. 운동에도 무게가 있다면, 이들이 가장 무겁지 않을까. 괜히 마음이 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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