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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Dec 12. 2019

송년회에 나타난 아이유

임슬옹이 왜 "그만하자" 했는지 알 것 같아


송년회에서는

좋은 말만 합시다

제발요



어제 송년회를 했다. 아이유가 우리 회식장소에 나타났다. 그것도 여러 명이. 부러운가? 아이유는 과즙미 터지는 귀여운 가수 아이유가 아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널 위한' 잔소리만 해대는 늙은 아이유다.


피해자에게 재 진술이나 복기(復棋)를 시키는 건 2차 피해지만, 자기반성의 의미로 한번 기억을 떠올려보려 한다. 꽤 취한 탓에 제대로 받아치지 못한 게 한이 돼서.  




[ 잔소리 리스트 (ft. 업무) ]

1. 곧 중간관리자 급인데, 준비는 됐니?

    (님이 제일 준비가 안돼보여요)

2. 그 Project, 난 이런 부분이 아쉽더라고.

    (님이 하지 그랬어요)

3. 신제품에 그려진 사과그림, 빼면 안 돼?

    (응. 안돼요) 

4. 능력의 100%를 쓰고 있다고 생각해?

    (님은요?) 

5. Creative 한 일을 해봐.  

    (님이 먼저 해봐요)



[ 잔소리 리스트 (ft. 개인) ]

6. 영어유치원 안 보낼 거야?    

    (알아서 할게요)

7. 집 거기 말고 저기가 낫지 않아?

    (알아서 할게요)

8. 둘째 진짜 안 낳을 거야?

    (알아서 할게요)

9. 운동 좀 해야지.

    (알아서 할게요) 

10. 옆자리 H과장 소개팅 좀 시켜줘.

    (알아서 하겠죠)





역시 복기를 하니 정답이 생각난다. 정답이 생각났는데 화가 난다. 대체 송년회에서 왜 저러는거야. 송년회는 한 해를 보내는 자리인 만큼 1년 동안 서로 수고했다고 격려하자는 게 취지다. 부서 회식이나 삼삼오오 모여서 하는 회식이면 모임의 특성에 맞는 대화와 조언이 오가면 되지만, 송년회는 '위로'가 1차 목적이다. 우리가 1년 동안 이렇게 열심히 일했구나. 너 나 모두 고생했고, 우리 내년도 잘해보자.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무대 위는 파티가 벌어지고 있다. 한 달 내내 송년회를 준비한 신입사원들이 온몸을 날리며 진행을 하고 있다. 나도 신입시절 3년간 송년회 진행을 했다. 열심히 준비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선물은 호응인걸 알기에 열심히 물개 박수를 치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어깨를 톡톡 친다. 라떼와 그녀ㄴ이다. 잠깐 내 옆으로 좀 와보라며.


이 분위기에 적응 못한 얼굴로 날 내려보니 또 안 갈 수가 없다. 무대에서는 젊은 아이들이 신조어 맞추는 게임을 하고 있다. "얼죽아", "얼죽코"의 뜻 아시는 80년대생 선배님! 을 외치는 신입사원의 목소리가 울린다. 아, 나 저거 아는데... 손을 번쩍 들고 싶지만 손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들려있다. '시드니, 잠깐 앉아봐봐.'


라떼와 그녀ㄴ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들이 입에서 뱉어낸 것은 단어와 문장이었지만 기능, 본질, 의도를 아무리 분석해도 '잔소리'라는 개념 외에는 분류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해하는 척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아, 오늘따라 목이 아프네.



   



싫은 얘기 하게 되는 내 맘을 몰라

좋은 얘기만 나누고 싶은 내 맘을 몰라 
그만할까 그만하자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널 위한 소리
내 말 듣지 않는 너에게는 뻔한 잔소리
그만하자 그만하자
사랑하기만 해도 시간 없는데

머리 아닌 가슴으로 하는 이야기
니가 싫다 해도 안 할 수가 없는 이야기
그만하자 그만하자
너의 잔소리만 들려


- 아이유 <잔소리> 中





솔직히 도망갈 수 있다. 나는 라떼와 그녀ㄴ들 대처법까지 브런치에 쓰지 않았는가. 그래도 도망 안 갔다. 내가 도망가면 누가 피해자가 될지 뻔히 보여서 촉석루에 선 논개의 심경으로 왜장 몇을 붙들고 있었다. 


앞에 앉은 선배의 잔소리를 듣고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 참 외롭구나. 얼마나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이렇게 나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사랑 못받고 자란 사람은 그저 불쌍히 여기자, 마음 속으로 되뇌며 자작했다.   


이 글을 보시는 많은 선배님들! 송년회에서는 좋은 이야기만 합시다요. 제발요. 제가 부탁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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