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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Jan 10. 2020

퇴사가 펭수냐

펭수는 집이 남극이잖아


너답게 살아! 안맞으면 퇴사해!

라고 '듣고 싶은 말' 외치는 책들

그거 아세요? 우리는 돈도 기술도 없어요



펭수가 몸값이 5~7장에 육박한다고 한다. 광고업계에 몸담고 있는 지인의 말에 의하면, 7장을 받는 연예인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사람도 아닌 펭수가 A급 연예인 수준의 몸값을 자랑하는 건 대세기 때문이다. 여길가도 저길가도 펭수가 빠지는 곳이 없다. 2020 펭수 다이어리는 예약판매 10분 만에 1000권이 팔렸다. 속지의 재질이나 디자인, 퀄리티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펭수' 자체로 지갑을 연 거다.


서점에 가면 대세 펭수에 버금가는 키워드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퇴사'. 부장님이 말도 안되는 꼬투리로 내 마음을 헤집어 놓은 날이면 이런 책에 지갑을 열고 싶다. 2030 직장인들이 펭수를 보며 지친 마음을 위로받는 것처럼 퇴사하는 상상은 잠시나마 지친 직장생활에 활기를 불어넣어준다.   


죽음을 생각해야 더 잘살듯이, 퇴사에 대해 생각을 해보면 지금 일상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정리가 된다. 사직서를 써서 부장님 책상위에 탁 올려놓고 씨익 웃는 상상. 옆에서 새근새근 잠든 아이와 통장잔고를 보면 그 생각이 싹 사라지지만 그래도 잠깐 행복했다. 부정적인 건, '퇴사'라는 키워드가 머릿속에 남아 실행을 자극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퇴사로 시작하는 책을 두 세권 펴봤다. 깜짝 놀랐다. 그 책은 '퇴사'에 대한 책이 아니었다. 세계 각국의 창의적인 사업가를 소개하는 책이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성공한 사업을 꾸리는 사람들의 업적을 모아놓은 책에 왜 '퇴사'와 관련된 제목을 붙였을까. 솔직히 어그로(억지)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출판시장이 어렵고 경쟁이 치열한 건 알지만 제목과 내용이 어느 정도 연관성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작년에 아끼는 후배가 퇴사를 선언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저 아이가 우리 조직에 있어서 회사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Management가 되면 저 아이를 꼭 데리고 일을 하고 싶었다. 성실하고 손끝 야무지게 일하던 아이의 선언에 하루 종일 힘이 없었다. 그 아이를 데리고 카페에 갔다.


"무슨 결정이든 지지해. 네가 정한 건데, 맞겠지. 그런데 준비는 되어있어?"

".... 아니요."

"로스쿨을 간다든지, 자격증을 딴다든지."

".... 아니요. 그냥 지금 부서가 너무 싫어요."


후배는 이 상황을 간절히 벗어나고 싶어 했다. 내가 봐도 그 후배가 속한 부서는 엉망이었다. 그런데 딱히 삶의 비전이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회사를 그만두는 건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 후배는 서울 명문대학 어학 전공을 한 인재였고 해외사업본부에 들어왔다. 원하는 부서에 배치되어 행복했다는 후배, 그에게 말했다.


"네가 똑똑한 아이라고 생각해. 네 생각이 대체적으로 맞을 거야. 그런데 아예 다른 진로를 택하는 게 아니라 회사에서 회사로 옮기는 결정을 내린다면 난 무조건 반대할 거 같아. 어딜 가나 저 정도의 또라이나 격무는 있어. 그리고 솔직히 넌 일을 매우 잘해. 차리리 3년을 채워서 이직을 해."


< 거기도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아 펭수야 >


후배는 머뭇거리다가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자기 결정을 번복하긴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자기는 행복이 중요하니까. 지금은 불행하다고 했다. 고집이 있는 아이라 더 이상 설득은 어려울 것 같았다. 퇴근길에 후배에게 책을 선물하려고 서점에 들렀다. 이석원의 '보통의 존재'를 골라 계산대에 올렸다. 변호사가 되든, 의사가 되든, 대통령이 되든 모두는 보통의 존재이며 각각의 개인에게 주어진 행복의 크기는 다르지 않다는 걸 후배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계산을 기다리고 있는데 서점 한편에 번뜩이고 있는 책들이 보였다. 서점 MD가 기획한 "퇴사하고 싶을 때" 컬렉션이 눈에 들어왔다. 줄을 떠나 그곳으로 갔다. 표지가 꽤 귀여운 책을 하나 들춰봤다. 후배에게 도움되는 내용이 있는지 살폈다. 퇴사를 하기 전에 준비해야 하는 것이나 마음가짐, 그리고 계획에 대해 나와있을 거라 기대했다. 실상은 전혀 달랐다. 저자의 대부분은 이미 프리랜서(번역가, 디자이너, 칼럼니스트 등)가 쉬운 업계에 종사하는 분들이었다. 4년제 대학을 나와 특별한 기술 없는 우리들이 참고해야 할 내용은 거의 없었다. 몇몇 책은 정말 퇴사를 '판매를 위한 어그로'로 사용하고 있었다. 책을 탁 하고 내려놨다. 화가 났다.  


한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 있는 '퇴사'를 출판 트렌드로 활용하다니. 만약 후배가 퇴사를 해서 잘 풀리면 다행이지만, 통계적으로 그러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대체적으로 일반 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은 기술도 돈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 결국 퇴사했던 곳보다 조직문화가 퇴화한 곳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많이 봤다.


퇴사를 고민하고 있는 경력 3년 이하의 후배님이 계시다면 3년은 채우라고 말하고 싶다. (10인 이하 사업장인 경우에는 보통 복지&처우가 개판인 곳이 많으니 이곳은 제외) 최소 3년은 지나야 경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 좀 더 업그레이드해서 이직을 할 수도 있다. 그 후에 결정하는 건 늦지 않다.


자신은 조직에 만족하는 데도 주변에 퇴사를 고민하는 후배를 뒀다면, 그 후배를 설득했으면 좋겠다. 3년 이하 후배들은 낮은 연차에 발생한 일들이 영원할 거라고 믿는다. 그런데 10년 이상 조직에서 버틴 선배들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주변에 준비없이 나가는 후배들이 보이면 따뜻하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줬으면 좋겠다.  


일본 도자기 수리법 중에 킨츠기(金継ぎ) 기법이 있다. "금으로 수리하다"라는 뜻으로, 깨진 도자기를 송진이나 금 등을 이용해 보수하는 일본 도호쿠 예술의 한 형태다. 깨진 부분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 그 부분에 귀한 재료를 덧붙여 예전의 그릇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게 해주는 것이다.


© Maker's Base

매년 신입사원들이 들어오고, 보송보송한 복숭아털 피부를 자랑하던 아이들이 찢어지고 깨진다. (사실 나도 신입시절에 많이 방치당했지만) 그런 아이들이 보이면 선배들이 나서서 킨츠기 기법을 활용했으면 한다. 깨지고 조각난 후배들을 다독여주고 위로하며 금을 덧붙여주면 깨져있던 아이들이 서서히 조각품이 되어가는 걸 목도할 수 있다. 상처를 끌어안을수록 아름다움을 발하는 킨츠기처럼 잠시 깨졌다가 멋지게 성장하는 동료와 함께 하는 시간. 굳이 박물관에 가지않아도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기분이 든다.


참, 퇴사하겠다고 엉엉 울었던 후배는 내 옆에서 잘 살고 있다. 하나의 예술품처럼 아름답게.



ps. 글을 올린지 30분도 안되서 조회수가 천이 넘어간다. 나도 '퇴사'와 '펭수'로 어그로를 끌었나보다. 내용에 집중해서 봐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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