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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Dec 26. 2019

대리님, 성격이 멋져요

전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데...


어제 막말해서 미안했어

뭐가 미안해요??

니 말은 이미 쓰레기통에 있어요




< 무슨 말인지 정말 모르겠다 >


회사 생활은 참 어렵다. 연차가 쌓일수록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는데, 문제 유형이 바뀔 분 체감 난이도는 비슷하다. 요즘 가장 고민거리는 동료들과의 관계다. 영업부서에 있을 때는 주로 바이어와 소통하기 때문에 내부 사람들과 부딪칠 일이 없었는데 제품부서에 온 이후로는 내부 사람들과 소통이 주요 과제다.


소위 '브랜드 매니저'라고 불리는 일을 하고 있는 터라 (이름이 거창해서 '저는 브랜드 매니저입니다'라고 말하지 못함) 회사 Value chain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일을 한다. 하루에 연락하는 사람이 하루 적게는 5명에서 많게는 30명에 달하기도 한다. 그중 감성과 생각이 통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올해 많은 사람들과 부딪치고 깨졌다. '너는 왜 기본이 안되어있니'라는 인격모독을 당하기도 하고 철석같이 믿었던 후배에게 뒤통수를 맞기도 했다. (일을 야무지게 잘 마무리하는 걸로 알려진 후배라 맡겨놓고 잊어버렸는데 치명적인 사고를 침) 입사 초와 달리 내공이 쌓여서 그런가, 문제가 터지고 모독을 들어도 타격감이 덜하다.



나는 쓰레기통이 아니니까

나는 천사의 엄마니까



이 생각을 주로 했던 거 같다. 누군가 기분 나쁜 말을 하면 그 말을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발로 차 버렸다. 쓰레기 같은 말을 가슴에 안고 앓지 않았다. 나는 우리 아이의 엄마인데, 미래를 살아갈 아이의 엄마인데 그딴 말들을 품고 있으면 안 됐다.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말을 들으면 조금 마음이 아프긴 했다. 그래도 집에 돌아가서 아이를 만날 몸이시니 그런 쓰레기들을 집에 가져갈 수 없었다. 컴퓨터를 끄면서 전부 쓰레기통에 버려 버렸다.


집에 가면 천사가 내 목을 꼭 끌어안아줬다. "엄마가 있어서 너무 행복해", "엄마가 치킨 이모(BHC 광고모델... 무려 전지현)보다 커피 이모(맥심 모델... 무려 김연아... 죄송) 보다 훨씬 예뻐!" 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이런 아이가 있는데 어떻게 내 마음에 쓰레기를 담아둘 수 있겠는가. 아이와 있으면 자동 세차장에 들어간 것처럼 몸과 마음이 정화되었다.  


작은 변화가 생겼다. '회사 가기 싫어요' 병에 걸린 중환자였는데, 아침에 회사 가는 게 부담이 없었다. 아이 천사의 성은을 입어 매일 아침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되어 출근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본부 선배인 S를 만나 반갑게 인사했는데 어째 상대방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침 드셨어요? 이건 뭐예요?" 하며 관심을 표하는 나를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던 그. 사무실 내 책상에 앉으면서 생각났다. 어제 회의시간에 우리가 지독하게 싸웠다는 사실을.

   

아침 회의가 끝나고 자리에 오니 S선배가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다. "시드니, 어젠 나도 미안했어". 나는 그에게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우리가 뭐 개인적인 걸로 싸운 것도 아니고 회사 잘 되자고 잠시 토론을 벌인 것뿐이다. 물론 토론은 격하 긴 했다. 그래도 인간 S와 나 사이에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그는 라떼아재와 그녀ㄴ같은 사람도 아닌 보통의 존재였다. 오히려 그에게 되물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죠?"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무슨 일을 하던 '감정'이 표현이 된다. 상대방이 내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면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순간이 끝나면 나쁜 감정은 바로 쓰레기통에 넣어버리는 게 좋다. 좋은 감정은 인간적으로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만, 나쁜 감정은 내 심신을 파먹을 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으니까.  


그렇게 2019년을 지냈다. 우리 본부는 연말마다 '칭찬받아 마땅할 사람'을 뽑는데, 거기서 뽑혔다. 어린 연차 때는 지원업무(라 쓰고 노예)를 많이 하다 보니 이런 선심성 이벤트에 많이 뽑혔는데 연차가 찰 수록 이런 곳에 이름을 올릴 일이 없었다. 거의 10년 차가 다 돼가는 지금, 이름을 올리니 기분이 새로웠다. 이건 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회사에 왔기 때문인지 아닌가 싶다.  


이 감정을 꽤 오래 마음에 품고 있고 싶다. 나쁜 감정은 바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지만 이렇게 동료들이 마음을 모아 주는 좋은 감정은 가슴에 품고 그들이 새긴 글자 하나하나를 매만지고 싶다. 매일 마음 리셋을 하는 나지만, 연말의 이 순간과 감정은 잊지 않고 싶다.    


따뜻한 연말을 기대하지만 결산이다 지출이다 마감이 많아서 다들 예민하다. 누군가에게 쓰레기를 받았다면 가슴에 품고 있지 말고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진하고 태연하게. 그게 진짜 내공이다.  



< 격론을 벌였던 선배에게 받은 메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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