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가 꺾이며 생긴 변화
상대방을 칭찬한다고
내가 낮아지지 않는다
2020년 35살이 되었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는 아직 안 생겼지만 나의 30대가 꺾였다. 10년 전만 해도 어디 가서 '86년생'이라고 하면 혹자는 스마트한 표정으로 '86 아시안게임?'을 외쳤다. (상식적으로 86년생인데 86 아시안게임이 기억이 안 나겠죠) 조금 더 상식적인 혹자는 '88 올림픽은 누워서 본거야?'라고 물었다. (앉아서 봤습니다)
치기 어린아이 취급받던 시절도 한 시절 (호시절이었습니다), 이제는 90년대생 후배들에게 "혹시 덴버 풍선껌 알아?"를 물어보며 격세(隔世)를 실감하는 중견사원이 되어있다. 이번에 들어온 신입사원은 96년생. 참자 참자 다짐했는데 그 아이에게 "96년에 서태지가 은퇴한 거 알아?"라고 묻고 말았다. (역사는 왜 반복되는가)
거울을 보면 푹 패인 팔자주름이 눈에 확 들어온다. 10년 동안 건조한 사무실에서 모니터만 뚫어져라 보니 피부와 뼈는 삭았다. (썩었다고 썼다 고쳤다) 심지어 애까지 낳았으니 탱탱한 피부와 단단한 골밀도를 자랑하는 후배들이 보기엔 얼마나 늙다리처럼 보일까. 그래도 우울하진 않다. 이런 외적인 변화로 우울감을 느끼기엔 10년 동안 잘 숙성된 마음이 내 안에 있다. 마음이 성숙해지니 웬만한 일에 태연해지고 때때로 능청스럽기까지 하다.
아침에 후배들 커피 사주려고 1층 카페에 내려갔는데 주문을 받는 아르바이트생이 매우 훈훈했다. 척박한 근무환경(?)에 종일 갈증을 느끼던 여직원들은 잠시 해갈을 맛보았다. '선배님 저 아르바이트생 좀 봐봐요'하며 내 어깨를 톡톡 치던 후배. 그녀 옆에 딱 붙어서 완벽한 생명체의 외형을 탐색하고 있었다. (왜 변태 같죠?) 그때 POS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시크하게 주문을 받던 아르바이트생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새침하게 눈을 내려 깔며 '우리 (너 잘생겼다는) 그런 이야기 안 했어'라는 말을 온몸으로 내뿜는 후배들. 후배에게 미안하게도 내 입에선 어떤 언어가 발사되고 있었다. "너무 잘생기셔서요." 양손으로 입을 막고 경악하는 후배들과 '왜 할 말을 못 하냐 심지어 칭찬인데'라는 스탠스로 서있는 아줌마 1명. 시크한 아르바이트생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나도 그랬다. 호형호제하지 못하는 홍길동처럼 잘생기고 예쁜 사람을 봐도 대놓고 인정하지 못했다. 혹시나 상대방이 오해할 수 있고 (저 얼굴만 보고 사람 판단하는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사실 엄청 보지만...), 그리고 내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내 입으로 누군가의 장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방을 인정할수록 나는 더 낮은 계단으로 내려가는 줄 알았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 것들은 모두 부질없다는 걸 알아간다. 좋은 말은 많이 뱉을수록 좋고 웃을 수 있을 때 가능한 많이 웃는 게 인생에 훨씬 더 도움이 된다. 새침하게 "전 모르는데요"라고 내숭 떠는 대신 "아이고~ 저 총각 참 잘생겼구먼!" 하며 억척스럽게 웃는 아주머니가 더 행복해 보인다. 아마도 그게 조금 더 현명한 삶의 방식이라는 걸 점점 더 알아가기 때문.
아이를 키우면서 보니 애들은 참 솔직하다. 나도 아이 땐 그랬다. 예쁘면 "예쁘다!"라고 외치고 멋지면 "멋지다!"라고 외쳤다. 사춘기를 지나고 힘겨운 20대를 겪으면서 내 생각을 드러내는 걸 꺼리게 되었다. 30대 초반까지도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 30대 중반에 가까워지니 어릴 때처럼 솔직해지고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점점 더 어린아이의 마음과 가까워지는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