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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Dec 23. 2019

나밖에 없는 사람에게 화내지 말자

내가 화내면 세상이 끝나는 사람들


내가 등을 돌리면

그들의 세상은 끝난다



요즘 아이가 잠들기 전에 물을 세 번씩 네 번씩 마시고 잔다. 기관지염과 폐렴을 앓기도 했고 겨울철이라 공기가 건조해진 탓에 물을 찾으려니 했다. 그런데 자기 전에 물을 먹는 게 습관이 됐는지 물을 양껏 먹은 후에도 또 물을 찾는다. 몇 주간은 잘 받아주다 이제는 버릇을 고쳐야 할 것 같아 잠들기 전에 신신당부했다. 자는 방으로 들어가면 더 이상 나갈 수 없다고. 관성은 무서운 법이다. '방에 들어가면 물 안 찾을게'라고 엄마의 말을 되뇌던 아이가 누워서 다시 물을 찾는다. 잠이 거의 들었는데 아이가 채근하니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물 그만 먹으라고 했지!"


이불을 박차고 나와 정수기 버튼을 거세게 눌렀다. 쪼르르륵 물이 떨어지는 사이 감긴 눈을 비볐다. 정말, 잠도 맘대로 못 자는구나. 한번 잠들었다 깨면 다시 잠드는데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인데 오늘 밤은 망했다 싶었다. 차오른 물컵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방안 구석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에게 물컵을 내미는데 받을 생각이 없다. 나를 처연하게 바라보던 아이는 "엄마가 화냈어." 하며 으앙 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물컵을 내려놓고 아이를 안아줬다. 순간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서러움을 이기지 못한 채 구슬프게 운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사랑하는 연인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울고 있었다. 한참 엉덩이를 토닥이고 등을 쓰다듬고 있는데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이는 금세 잠들어 있었다. 아이를 품에 꼭 안고 '미안해'라고 말했다. 너는 엄마가 세상의 전부 일 텐데, 세상이 너를 거부한 느낌이 들었겠지. 엄마가 이런 걸로 다신  안 낼게. 다른 방법으로 저녁에 물먹는 습관을 바꿔보자.


밤중 작은 소동으로 잠이 다 깨버렸다. 오늘은 꼭 일찍 잠들어서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려고 했는데. 계획이 어그러졌다. 뭐 상관없다. 글 하나 쓰는 것보다 가족이 훨씬 중요하니까. 그런데 가족 구성원 중에 성인 남성 한 명이 여전히 소식이 없다. 시계를 보니 12시다. 핸드폰을 보니 아무 알림이 없다. 저 밑에서부터 뜨거운 분노가 차오르고 목이 뻣뻣해진다.


"띡, 띡,,, 띡,,,,띡,,,,,띡,,, 띡"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와 박자만 들어도 얼마나 취했는지 가늠이 된다. 만취한 남성 하나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지만 두렵지 않다. 엉거주춤하며 신발을 벗는 남성에게 소리를 지른다. "대체 지금 몇 시야!" 남편은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 거실소파에 널부러 진다. 얼마 전까지 폐렴으로 고생하던 사람이 만취해서 들어오니 복장이 터진다. 대체 이 남자는 몇살까지 생을 유지하고 싶은 건지 의문이 든다. 다 떠나서 책임감 없는 모습에 화가 솟구친다. 인간다운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서 등을 돌리는데 남편이 꼬인 혀로 힘겹게 입을 연다.

"여보, 나한테 화내지 마."


지금 어떻게 화가 안 날 수가 있는지 좀 알려달라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쏟아냈다. 한참을 듣던 남편은 오늘 회식자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풀어놓기 시작한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은 결국 남편의 상처로 귀결됐다. 회사에서 동료들과 관계로 힘들어하는 남편. 어린 연차 시절에 격의 없이 지냈던 사람들과 시간이 흐르면서 생겨버린 변화에 남편은 아파하고 있었다. 아파하는 사람 앞에서 더 이상 날 선 말을 뱉을 수 없었다. 그저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변명, 고백, 아픔, 슬픔을 오가던 언어의 결론은 이랬다.

"나는 와이프가 있잖아. 그럼 괜찮아."


밖에서 무슨 일이 있던 아내가 있으니까 괜찮다는 남편. 평소 같으면 '부부관계는 영원하지 않다'라고 일갈해줬을 거다. 남편이 계속 진상(본인 몸이 아픈데 술 먹고 들어옴)을 부리면 마더 테레사 같은 아내라도 버텨낼 재간이 없을 테니. 그런데 축 처진 눈매를 따라 처진 어깨를 보니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래, 당신한테 나밖에 없잖아.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가족이 있으니까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건강하기만 해." 처진 눈은 감동으로 가득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 박준



난 평범하고 보잘 것없는 사람이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다. 일이 잘 돌아가지 않아도, 일상에 문제가 생겨도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가끔은 그런 생각이 틀릴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하루하루를 내 이름을 지어다가 약처럼 먹고 버틴다. 힘든 일이 있어도 역경이 와도 나의 존재만으로 모든 것이 치료되는 사람들.  사람들에게만은 절대 화를 내지 말자고 다짐한다.  손목을 잡아주고 등을 토닥여주는 것만 하자고. 조용히 다짐한다.



ps. 그래도 아플 땐 술 먹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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