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드니 Dec 16. 2019

부원장님의 빨간 립스틱

예뻐요의 힘


아무 계산하기 싫을 때

그저 행복하길 바라며




"여자들은 왜 서로 예쁘다고 하는 거야?"

분유 타던 첫날 한 손엔 젖병을, 한 손에 스푼을 들고 우왕좌왕하던 얼굴로 남편이 묻는다.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양손으로 꽉 잡고 한수 가르쳐주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알아? 예쁘다는 거 진심이다?"



5분 전 상황. 엄마 아빠와 떨어지지 않겠다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강제로 밀어 넣고 나오는 길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울고 불며 발버둥 치는 아이를 낚아채듯 데리고 교실로 사라졌다. 요즘 어린이집 관련 흉흉한 사건들이 많은데, 생난리를 치는 아이를 선생님이 예쁘게 볼까 하는 불안감과 이렇게 아이를 떨어트려가며 회사를 가야 하는 것인가 하는 착잡한 마음이 뒤섞였다. 한 숨을 크게 쉬고 문을 나서려는데 안에서 부원장 선생님이 뛰쳐나오신다.


"걱정되시죠? 금방 적응할 거예요."

날 위로하는 그녀의 말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새빨간 입술이었다. 방금 막 바른듯한 립스틱은 아직 윤기가 남아있었다. 코랄이나 버건디도 아닌 아닌 핏빛에 가까운 립스틱은 부원장 선생님의 수수함을 더 돋보이게 했다. 마치 초등학생이 엄마 립스틱을 훔쳐 바른 것처럼 어색했다.  


그런 부원장 선생님에게 갑자기 해주고 싶은 말이 생각났다. 아니, 생각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나가갔다.

"선생님, 오늘 예쁘세요." 평소 아이들에게 단호하고 학부모에게 노련한 부원장 선생님 얼굴이 립스틱 색깔과 비슷해졌다. "아이고, 무슨 말씀을." 그날 한 번도 본 적 없던 부원장 선생님의 덧니를 봤다. 잠시 동요하던 부원장 선생님은 "어머니가 더 예쁘시죠." 하며 금세 평소의 노련함을 되찾았다.  


문 밖에서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남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묻는다. 여자들은 대체 왜 서로 예쁘다고 하는 거냐고. 남편에게 말했다.


"하루 종일 애들만 보는 선생님이 립스틱을 왜 바르겠어. 누가 보지 않더라도 여자는 항상 예뻐 보이고 싶은 거야. 어린이집은 여자들만 모여있으니 '예쁘다'는 말을 하지도 않을 거고. 그래서 누군가 '예쁘다' 해주면 종일 그 말에 매몰되서 행복해지겠지. 부원장 선생님이 기분이 좋으면 담임도 편할 거고 결국 우리 애가 혜택을 받겠지. 100% 순수한 목적은 아니지만 그래도 '예쁘다'는 건 진심이야. 외모, 성격 전부 포함해서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남편이 간단하게 정리한다.

"그럼 잘 보여야 하니까 그러는 거네?"

"아,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니까 이 사람아. 물론 잘보여야하는 것도 있는데 잘보여야하는 부장한테 멋지다,예쁘다가 자동으로 나가지 않지. 별로 이 사람에게 계산하고 싶지 않을 때 그때 하는 말이야. 계산 없이 좋은 말만 하고 싶은 사람이 있잖아. 날 위로해주시고 아이도 봐주시고 케어해주시니까 계속 이 사람이 기분 좋았으면 하는 거지."

  


<계산에 대하여>   -  나희덕

계산을 하지 말고 살아야겠다
모든 계산은
부정확하지는 않아도
불가능한 거라는 생각이 든다
계산을 하는 동안에도
자본은 운동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구좌에선가 이자가 올라가고 있고
수수료와 세금과 연체료가 빠져나가고 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재산은 불어 가거나 녹아 가고 있다
모든 존재는
언덕 아래로 굴러내리는 눈덩이와 같으니
모든 계산은
그 눈덩이의 지름을 재는 일과도 같다
계산을 한다는 것은
순간을 환산할 수 있다는 장담처럼
영원을 측량할 수 있다는 믿음처럼
어리석은 일, 계산을 마치는 순간
 그 수치는 돌덩이가 되어 나를 누르고
구르는 동안 욕망의 옷을 입기 시작할 것이다
부디 계산을 마치지 말자
그래도 우리는 그 위에 꽃 피우며 잘도 산다
돌 위에 뿌리내린 풍란처럼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제법 향기롭게


사무실에 앉아 바쁜 일처리를 끝내니 아이 생각이 났다. 연락을 할까말까 갈팡질팡 하다가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담임선생님께 메시지를 남겼다.


"예쁜 선생님~ 아침에 00 이가 너무 울고 가서 걱정되네요ㅠㅠ 시간 날 때 연락 주세요!"


한 시간쯤 지나서 답장이 왔다.


"어머니~ 00이 너무 잘 놀고 있어요! 교실 들어와서 잠깐 울고 너무너무 잘 놀았답니다^^"


아침마다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 찍는 요 녀석이 엄마 아빠 심난하게 해 놓고 태연하게 놀고 있다니. 배신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데 선생님의 카톡이 왔다.


"예쁘다는 건 과찬이세요 ㅠㅠ"


사실 '예쁜 선생님'은 정말 아무생각 없이 한말이었다. 마치 선생님들이 자기 자식도 아니면서 '우리00(아이이름)'이라고 하는 것처럼. 그저 넘겨도 되는 말을 '짚어내는' 선생님을 보며 어린이집 내부인들끼리 예쁘다는 말은 잘 안 한다는 게 확실해졌다.

이왕 알게 된 거 확실하게 서비스를 하기로 한다.

"선생님~ 얼굴도 작고 키도 크시고 피부도 좋으시고 눈도 사슴 같으셔서 너무 부러워요~ 저는 뭘 입어도 선생님처럼 핏이 안 살아서 선생님 볼 때마다 부럽답니다!!"


상대방이 난리가 났다. 담임선생님이 가진 모든 이모티콘이 쏟아져 나왔다.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해주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싶고.


다음날, 여전히 아이는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을 찍고 있다. 일찍부터 문 앞에 나와있던 담임선생님은 어제처럼 아이를 낚아채서 들어가셨다. 울고불며 들려가는 아이를 보는데 앞만 보고 뛰던 선생님이 갑자기 뒤돌며 소리친다.

 

"어머니, 가수 청하 닮으셨어요."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그래, 우리 모두 말은 공짜니까 마구 뱉읍시다!  



(c) 뷰티매거진 BEAUTY +


청하는 이렇게 생겼다. 안 닮았다. 청하님 미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