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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Mar 09. 2020

무급휴가 중입니다만

가족 돌봄 휴가 중에 오는 연락, 받는 게 맞나요?


돌봄 휴가 중에 계속 오는 연락

손가락은 일일이 답장을 하고 있지만

저기 끝에서부터 분노가 차오른다





가족 돌봄 휴가(이하 돌봄 휴가)를 쓰고 있다. 재택근무를 하고 싶었지만 임산부와 특정지역에 다녀온 사람만 가능하다고 해서 돌봄 휴가를 신청했다. 부장님 표정이 싸하다. 하필,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이번 승진인사에서 탈락했다. 부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노려보더니 (너 승진 떨어져서 화나서 휴가 쓰는 거지?) 돌봄 휴가 결재를 승인해준다. 나도 똑같이 눈빛으로 말한다.  아니, 저는 승진은 상관없고요. 애 때문이에요. 정말이에요.


우리 사무실에 미취학 또는 저학년 학부모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돌봄 휴가를 신청한 사람은 나 혼자다. 시댁 친정 도움 없이 맞벌이를 하고 있는 사람이 나 혼자니까. 든든한 백업이 있는 분들 사이에서 과감히(?) 용기를  낸 내 소문이 났나 보다. 아이 엄마 몇몇이 호기심을 갖고 신청방법을 묻는다.


자세히 신청방법에 대해 알려주면서 국가재난 상황이니 눈치 보지 말고 이런 건 쓰자고, 시위대 선봉장처럼 외쳤다. 그랬더니 한 선배가 말한다. "그래, 일도 하기 싫고 그냥 써버릴까?" 천진하게 웃는 그녀의 입꼬리가 내 가슴을 깊게 찌른다. 지금 내가 일하기 싫어서 돌봄 휴가 쓰는 사람처럼 보이는가? 난 정말 애 봐줄 사람이 없어서 쓰는 거라고!


어쨌든, 최소한의 업무만을 남겨놓고 돌봄 휴가에 들어왔다. 회사에 안 나가서 좋아야 하는데, 딱히 그렇지 않다. 미취학 아동과 함께하는 24시간은... 끊이지 않는 노동만이 있을 뿐. 애 없는 싱글이었다면 이런 휴가가 좋았을 테지만, 싱글이면 애초에 '돌봄 휴가'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아침/점심/저녁을 해먹이고 중간중간 아이와 놀아주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난 절대 전업주부는 안 해야지. 일단 설거지를 하루에 10번은 하는 것 같다. 물론 이건 사람 성향이라서 쌓아두고 1번 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지만 일이든 설거지든 빨래든 '쌓이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성격이라 매번 손에 물을 묻히고 있다.


아침
점심. 내밥도 같이 찰칵.
저녁. 사진은 보기 좋지만 엄마의 노동은...ㄷㄷ (노른자는 뜨거운 스파게티 찍어먹는 용도입니다. )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나 새벽 배송에 돈을 엄청 썼다. 카드값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무급휴가라니. 한숨이 나오는데 갑자기 카톡 알림이 울린다. 메시지를 보자마자 내 미간이 좁아진다.


"휴가 중에 미안한데, 잠깐 통화 가능해요?"

일단 하나는 감각적으로 알겠다. 이 일은 전혀 급한 일이 아니다. 만약에 급한 일이었으면 그는 전화를 바로 했을 거다. 그와의 3년의 시간을 보낸 감으로 이 연락은 개인적인 호기심을 확인하기 위한 건이다. 메시지를 읽지 않고 (카톡의 1을 없애지 않은 상태)에서 고민했다. 답을 할까 말까. 결국, 일이 쌓이는 걸 싫어하는 나는 그에게 전화를 했다. 역시 전혀, 전혀, 한 1년 후에 확인해도 아무 영향 없는 그런... 그런 일이었다. 휴...


다음 날, 집에서만 있는 게 좀이 쑤신 아이가 있는 떼 없는 떼를 다 부리고 있다. 베란다 창밖에는 마스크를 하지 않고 야구를 하고 있는 초등학생들이 보인다. 아이가 밖에 나가고 싶다고 떼를 쓰는데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동네는 확진자가 많지 않아서 지금 당장 (마스크를 하고) 외출을 하더라도 문제가 안 되겠지만, 만약에 외출을 하게 됐는데 바이러스에 감염이 됐다면? 그럼 회사에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 집에서 아이를 돌보라고 돌봄 휴가를 쓰게 해 줬는데 아이와 돌아다니다가 감염이 되면? 왠지 고개를 들 수가 없을 것 같다.


결국 생떼를 부리는 아이를 휘어잡고 훈육을 했다. "너 바이러스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아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한창 밖에서 뛰어놀아야 할 시기에 집콕이라니. 아이가 불쌍해서 미간을 풀고 바로 안아줬다. 그래, 너도 나도 이게 무슨 일이니.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수밖에. 아이를 안고 토닥이고 있는데 핸드폰이 또 올린다. 이번엔  다른 부장님이다. "자리에 없네? 전화 가능해요?"


아... 이번엔 약간 꼭지가 돌려고 하는데? 무급... 무급휴가라니까. 무급이야. No payment!! 그 순간 소설 하나가 떠올랐다. 노예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다룬 콜슨 화이트헤드의 장편소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전에 노예 순찰대들은 자유인이건 노예 건 흑인의 땅을 제멋대로 수색했다. 이제 권한이 커지니 그들은 누구의 집 현관이든 두드리고 붙잡아가고 치안의 명목으로 불시 검문도 할 수 있었다. 단속 담당자들은 가장 가난한 사냥꾼부터 가장 부유한 치안 판사의 집까지 때를 가리지 않고 들이닥쳤다. 마차와 짐수레들은 검문소 앞에서 섰다.


연락 좀 왔다고 노예라니. 비유가 과격할 수 있지만 기분은 딱 맞았다. 유급휴가 중에 연락이 와도 상대방에 대한 무례함이 느껴지는데, 무급휴가 중에 연락이라니! 시시각각 수색당하고 감시당하는 기분이다. 사실 좀 처참했다. 조금만 배려해주면 안 되는 건지. 5일 못 기다리는지.


웬만하면 연락하지 맙시다. 연차가 아니고 '무급'이니까요.



ps. 좀 알아보니 돌봄 휴가 중에 발생한 상해에 대해서는 회사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 더더욱 회사 업무에 지배받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연락 좀 적당히... 작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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