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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Feb 27. 2021

승진누락자의 소회

너무하네 진짜


잠깐 방심했어요

노력하면 진짜로 호구됩니다





폭풍 같은 한주였다. 그렇게 적게 먹고 운동을 해도 살이 안빠지더니 5일 만에 1킬로가 쏙 빠지다니.      


최근 인사철이었다. 1년동안 가장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시간. 우리 본부도 마찬가지. 눈에 띄지는 않지만 술렁이는 분위기는 느껴졌다. 나도 5년 만에 승진테이블에 올랐다. 공채 중에서는 승진연차(직전 승진년도), 업무난이도, 평가 등을 포함한 점수가 1위였다.      


보통 공채는 1-2명은 꼭 시키는 분위기라 되겠지 하고 있었다. 게다가 유독 한해동안 상사가 일을 많이 줬다. 마치 쐐기를 박으려는 듯, TFT에 5번 이름을 올리고 어려운 수입상을 상대하게 했다. 게다가 KPI와 전혀 관련없고 담당자가 있는데도 상사가 관심이 있다며 그쪽 일을 나에게 시켰다. 너가 잘하니까,라고 하며. 그런데 승진이 되지 않았다.       


발령 하루 전, 부장에게 전화가 왔다. 나에게 항상 애정을 쏟고 있는 부장님, 하루에 8시간은 대화하는 듯한 직장선배. 부장님의 목소리 톤을 듣자마자 뭔가 잘못됨을 느꼈다. 최선은 다했지만 이번에 TO가 역대급으로 적게 와서 쉽지 않겠다. 아, 그렇군요. 할 수 없죠. 담담한 척 전화를 끊었다. 그제야 내 경쟁자들이 누구였는지 떠올랐다. 나랑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나이가 좀 있으신 경력직이었다. 그들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들이 업무를 못하는 건 절대 아니다. 적당히 담당분야에서 퍼포먼스를 내는 분들이고 경력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냈다. 그분들에 대해서는 큰 불만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할만 한 사람이 했을텐데, 왜 화가 나지? 하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상사가 나에게 잘못한 건 이거다.           



상사가 나에게 잘못한 것


1. 나이를 승진지표로 삼았다

“미안해, 그런데 걔네들이 너무 나이가 많아. 한해는 쉬어간다고 생각하자.”

승진 발표가 나고 정확히 상사에게 들었던 말이다. “나이가 많아.” 나이가 성과의 지표라는 게 어이가 없다. 나이가 많으면 불쌍하고 나이가 어리면 안 불쌍한가. 마치 사회가 20대 청년층에게 ‘그 나이에는 고생 좀 해야해’하는 것과 뭐가 다른지. 심지어 본인들이 20대일 때는 고생하지도 않았으면서. 게다가 “한해를 쉬어가라”니. 회사가 기사식당도 아니고 쉴 때 되면 쉬는 곳인가? 내 인생과 커리어를 왜 당신이 결정짓는지. 평생 이 회사만 다닐 것도 아닌데.       


2. 회사에 애정을 갖게 만들었다

경력직들은 해당분야로 입사하신 분들이기 때문에 딱 그일 만 한다. 톱니바퀴가 일하듯 단순하게 그 일만 한다. 그런데, 나같은 10년넘은 공채들은 회사의 밸류체인을 모두 이해한다는 이유로 (때로는 부리기 쉽다는 이유로) 회사에 대한 고민을 시킨다. 각종 자료를 찾고 조사업체들과 지지고 볶으면서 우리 업종에서 우리 브랜드가 나가야하는 방향성을 찾아내고 상사를 포함한 경영진들에게 보고를 한다. 몇 번에 수정에 생고생을 하는 과정을 거치지만 보고는 대체적으로 잘 끝나고 한동안 회사의 비전을 제시했다는 성취감에 젖는다. 그러고 나면 회사가 좋아진다. 내가 제시한 비전을 가지고 성장해내는 회사를 계속 지켜보고 싶어진다. 그런데 승진이 안됐다니. 이건 무슨 메시지로 받아들여야하는지 혼란스럽다.      


3. 육아휴직을 들먹인다

이건 상사가 직접 표현한 건 아니지만 조직 내 만연한 분위기다. 사실 과거 임신 중에 승진을 한적이 있는데, 당시 (지금과 다른) 상사가 욕을 먹었다. 그럼에도 임신 안한 사람들보다 훨씬 퍼포먼스를 냈기에 별 이슈는 없었다. 하지만 육아휴직을 갔다오니 분위기가 달라졌다. 쟤는 애엄마고 육아휴직을 썼던 사람. 승진연차가 되도 애엄마니까 좀 밀려야 하는 사람이라는 분위기다. 뭐 이해할 수 있다. 1년 쉬다 왔으니 1년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계속 프레임을 씌우는 건 부당하다.

          


다행히 연휴 주간이라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있다. 게다가 6살 아들을 키우다보니 우울해할 겨를도 없다. 엄마를 보자마자 달려와서 목을 꼭 끌어안는 아들. 하루 종일 적립된 분노가 한순간에 날아간다. 착한 남편은 내 눈치 보느라 바로 부엌으로 달려가 밥을 해준다. 행복할 이유만 있다.      


그럼에도, 상사에게 묻고 싶다.     


CEO가 갑자기 회사 미래사업을 찾아서 일주일 안에 보고하라는 미션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누구와 이 프로젝트를 수행할 것 입니까?
a. 동영상만 찍을 줄 아는 알버트
b. 통역만 하는 줄리아
c. 신사업담당 10년 시드니      



답은 정해진 질문이다. 그런데 시드니는 더이상 당신과 일할 생각이 없다.      


다음주가 되면 상사와 면담하면서 지금 부서 R&R이 아닌 업무를 조정해달라고 요청할 생각이다. 사실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너무 많다보니 정작 집중해야하는 일에 전혀 관여를 못하고 있다. 관련팀원들도 고생하는 중이고. 앞으로 상사가 승진시킨, 인정하는 동영상기사와 통역가에게 일을 맡기라고, 정중하게 말할 생각이다.      


비록 승진누락으로 삐져서 업무를 안 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인생 길게 보고 이겨내라고 할수도 있겠지. 하지만 상사여, 당신은 현자처럼 ‘인생 길게 봐라’라 한다. 어차피 나중에 다 만난다? 길게 보면 똑같다? 회사를 위해 일한 시간과 노력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폭력적인 발언임을 왜 모르는지. 상사의 범위는 제 성과와 노력을 판단하는 것이다. 내 인생을 왜 당신이 판단하나.      


나는 인생을 길게 본다. 살다보니 전화위복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안좋은 일이 생겨도 좋은 일이 생기기 마련. 심지어 브런치에 리뷰한 위화의 ‘인생’이 최애인데. 그럼에도 인생을 길게 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사람과는 가까이 지낼 수 없다. 특히 입발린 말로 부려먹고 도망가는 사람은 더더욱.           


분노한 상태로 글을 썼지만  위로연락을 많이 받았다. 이게 무슨 일이니, 서운하겠다. 화나지? 대체 왜 그런 거야? 등등. 그중에서 가장 뭉클했던 건 “2주간 파업해”라는 한 선배의 말이었다. 어쩌겠니, 참아야지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당사자 관점에서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이들 땜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사무실로 나갈 힘이 생긴다.      


그래도 업무조정은 요청할 거다.      

어디, 한번... 해보세요.  




ps. 브런치라는 대나무숲이 있어 감사하다. 글 정말 오랜만에 썼다. 일하느라 못들어왔다. 브런치에 글도 못쓰고 승진도 못하다니 최악이다. 앞으로 브런치에 충성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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