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조나 정보는 필요가 없으니까
각자의 '마음카페'가 있을 뿐
아이를 낳고나서 가장 막막했던 건 동네에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당장 복직이 코앞이라 어린이집 대기부터 넣어야하는데 어디에 대기를 넣어야할지 모르겠다. 유모차를 끌며 물어볼 사람을 찾다가 용기를 내서 놀이터에서 손주를 놀리고 있는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주름이 고운 할머니께서는 이 동네에서는 E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 가장 좋다며 강력추천을 해주셨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에 빠르게 집으로 돌아와 아이사랑포털에 들어가 대기를 걸었다. 당시 5개까지 대기를 걸수 있었어서 E초등학교 병설유치원, 강남구청 어린이집, 국공립어린이집 3개를 넣었다.
그런데 복직이 한달 밖에 안남았는데 대기가 줄어들 생각을 안한다. E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은 대기가 줄어드는게 아니라 더 늘어나고 있었다. 동네 맘카페라도 있지 않을까해서 그때부터 청담동을 포괄하는 맘카페를 찾았다. ‘청담동 맘’을 검색했더니 이상한 게시물만 보였다. 결국 청담동 맘카페를 찾길 포기하고 결혼할 때 도움 받았던 레몬테라스와 맘스홀릭에 글을 올렸다. ‘혹시 청담동 어린이집 아시는 분’. 댓글은 0.
다행히 알고리즘에 의해 ‘향기맘’이라는 강남,서초,송파를 권역으로 하는 맘카페를 찾아냈다. 그곳에도 똑같은 글을 올렸는데 한동안 댓글이 없다가 어떤 은혜로운 분께서 여기서 물어보지 말고 어린이집들에 전화를 걸어보라고 조언해주셨다. 그분말대로 아이사랑포털에서 어린이집을 검색해서 전화를 쫙 돌려보니 자리가 꽤있었다. 아니 그런데 내가 등록한 어린이집들은 왜 연락이 없었던 거지? 알고보니 국공립은 맞벌이 첫째아이면 최소 3-4년은 지나야 연락이 온다. 게다가 두 번째로 대기를 걸었던 강남구청 어린이집은 구청 자녀들만 갈 수 있는 곳이라 대상도 아니었다.
혼자 고군분투하며 느낀 점들을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담동에는 왜 맘카페가 없지? 사람이 모인 곳에 온라인 커뮤니티는 요즘같은 세상에 필연적인데. 대체 왜 청담동에는 다른동네 다 있는 맘카페가 없을까?
첫 번째, 신축 대단지가 없다. 같은 강남권이지만 신축이 많은 대치, 잠실쪽으로만 가도 맘카페가 활발하다. 사람들이 모여있으니 상권이 발달하고 변화가 많다. 다양한 선택지 중에서 가장 최선의 것을 선택하고 싶기 때문에 온라인 커뮤니티로 사람들이 모인다. 하지만 청담동은 언덕배치 지형특성상 신축 대단지가 별로 없다. 청담동에서 가장 세대수가 많은 아파트는 그나마 강변쪽에 있는 청담자이(708세대) 일텐데, 그 앞 상가를 가보면 적막하다 못해 황량하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접근성이 떨어지고 유동인구가 적다보니 생활상권 발달이 덜하다. 이런 환경에서 타인과 나눌 정보는 거의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게 전부니까.
둘째, 청담동은 맘(Mom)이 별로 없다. OECD 출산율 꼴찌를 실감하고 싶다면 청담동에 오면 된다. 길거리에 애가 별로 안 보인다. 언덕배기 지형에 생활 인프라가 부족하다보니 아이를 키우는 가족들에게 선호되지 않는다. 애들 수가 적다보니 아이랑 손을 잡고 청담동 골목길을 산책하면 우리를 불러 세우는 어른들이 많다. ‘아이가 참 예쁘네요.’하며 꽃을 보듯 따뜻하게 바라봐주시는 분들. 터진 보자기에 쏟아지는 햇콩처럼 애들이 많은 위례, 잠실, 동탄에서 받을 수 없는 시선이라고 할까.
그래도 유치원에 가면 엄마들이 모여 있긴 하다. 엄마들과 대화를 해보면 별로 맘카페 가입에 나처럼(?) 열성적이진 않은 듯하다. 일단 나 같은 일반 직장인보다는 사업가나 디자이너, 연예계 쪽에 종사하는 분들이 많다. 맘카페 활동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자신을 타인에게 노출시켜야 하는데 (최소 운영진에게) 직업 특성상 타인에게 자신들의 정보가 노출되는걸 꺼리는 분위기도 청담동에 맘카페가 없는데 한몫 하는 듯하다.
세 번째, 사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동조를 별로 요구하지 않는다. 맘카페 기능은 딱 두가지라고 본다. 정보공유와 공감. 정보공유는 위에서 언급했듯 다양한 선택지중에 최선을 택하려는, 소비자행동론의 정보탐색 단계라고 본다. 이는 맘카페가 아니라 부동산, 주식, 자동차 커뮤니티에서도 똑같은 양상이 나타난다.
이런 커뮤니티와 맘카페의 차이점은 공감과 동조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맘카페를 눈팅하고 있으면 하소연하는 글이 많이 올라온다. 하소연의 주 타깃은 남편, 시댁 등 가족에 대한 고민들이다. 자극적인(?) 제목에 이끌려 사연을 읽어보면 드라마 한편을 보고 난 것 처럼 뛰어난 개연성과 디테일에 감탄하곤 한다. 근데 이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니. 세상에는 아직도 드러나지 않는 신기한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다.
신기한 이야기들보다 더 신기한 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그 글을 보고 공감해주고 동조해준 다는 점이다. 저도 그런 적 있어요. 무조건 이해해요. 사실 자주 보는 친구에게도 ‘무조건 이해한다’는 말이 나오기 쉽지 않다. 그런데 맘카페 구성원들은 평생 같이 살아온 친정엄마처럼 보듬어주고 감싸준다. 그래서 맘카페에 대한 여러가지 사회적 이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맘카페는 성행 중이다.
그런데 청담동에는 맘카페가 활성화 되지가 않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단지 아파트도 없고 엄마들이 없는 것도 한 몫 하지만 무엇보다 별로 동조와 공감을 요구하지 않는 분위기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한번 반찬가게에서 봉변을 당해서 유치원 엄마들 방에 가볍게 화제를 던졌는데 ‘그랬군요’,‘어머, 저런’ 정도의 무덤덤한 반응에 놀란 적이 있다. 대체적으로 이 동네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데 소극적이다. 매사 담담하고 차분한 모습에 배울 점도 있지만 좀 답답할 때도 있다.
답답함을 느끼던 어느 날, 쪽지가 하나 날아왔다. 동네에 대한 정보공유는 포기하고 아이 교육이라도 잘 시켜보자는 마음에 상위1% 카페에 가입해서 눈팅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회원분께서 내 글을 눈여겨보고 있었다며 만남을 제안한 거다. 사실 교육 쪽은 아는 게 없어서 글은 쓰지도 못했고 댓글에서 회원들끼리 분쟁이 생기면 어릴 적 기억을 살려 중재(?)를 하곤 했었다. 그 댓글이 큰 힘을 얻었다는 한 분께서 정모를 추진하는데 나를 초청해주신 거다.
흔쾌히 참석하겠다고 답장을 보냈지만 사실 무서웠다. 치타 앞에서 멋모르고 뛰노는 노루처럼 기쎈 대치동 엄마들 사이에서 나 잡아먹어라 하고 나서는 꼴이 아닌지. 두려웠지만 미리 정보라도 얻자는 차원에서 용기를 내서 나갔다. 결과적으로 그분들을 만나면서 맘카페에 대한 니즈가 사라졌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회원 수가 넘쳐나는 맘카페보다는 1-2년을 앞서간 선배 엄마들이 조언이 훨씬 더 도움이 된다. 요즘엔 어떤 교육이 트렌드인지, 뭘 읽혀야하는지, 뭘 안 해도 되는지 이런 것들을 세세하게 알려주신다. 가끔 아이 교육에 대해 조급해지곤 하지만 그분들에게 상담을 받고 나면 조급함이 사라지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돌아보면 아마도 청담동에 사는 엄마들은 이미 선배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각자 자신들만의 ‘마음카페’가 있으니 맘카페가 필요 없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