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 토박이의 아이들
누구도 허투루 살지 않았다
평소 주변인들에게 온화한 성격으로 정평이 난(?) 나지만 가끔 속에서 독을 품은 뱀이 똬리를 틀며 불을 내뿜을 때가 있다. 바로 집을 고쳐야 할때. 집을 고치는 데 왜 화가 나는지? 방금 스스로 온화하다고 했으면서 언행불일치 무슨 일이냐고 물을 수 있다. 집을 고칠 때 화가 나는 이유는 하나다. 이 집이 우리집이 아니기 때문.
고친지 얼마 되지 않은 주방 전등과 안정기가 또 나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장실 배수관 물이 새기시작했다. 관리실 아저씨는 전등과 배수관 둘다 전체를 다 뜯어서 고쳐야 할것 같다고 자기 능력으로는 무리라며 고개를 저었다. 대략 못해도 20-30만원은 나온다는 천불나는 한마디를 남기고 관리실 아저씨는 사라졌다. 아무리 오래된 헌집이지만 이렇게 자주 고장이 나도 되는 건지 싶어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까했지만, 지난 전세갱신때 대서비용 내기 싫어서 부동산 뒷문으로 도망친 구두쇠 집주인에게 그 돈 받으려 하다간 계약기간 내내 밤마다 촛불을 켜야할 듯해서 집주인 대신 철물점에 전화를 걸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나보다 훨씬 더 온화한 인상의 아저씨가 나타났다. 아저씨는 주방과 화장실을 번갈아 보더니 화장실이 더 급해보인다며 자신의 도구들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셨다.
"아이고, 배수관이 삭았네. 삭았어."
17년이 된 아파트다 보니 세면대에서 물이 내려가는 배수관이 삭아서 물이 새고 있었다. 살면서 배수관이 깨진 건 봤는데 삭다니. 철이 삭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철물점 아저씨는 무림의 고수처럼 도구함에서 절단기를 꺼내더니 금세 배수관을 새로 갈아놓았다. 아저씨의 솜씨에 감탄하면서도 또 뱀이 춤을 춘다. 아놔 집주인....
다음은 주방이다. 높은 천장에 붙어있는 안정기를 새로 붙여야해서 단단한 의자를 갖다드리고, 옆 테이블에 앉아서 회사일을 하고 있었다. 그날 따라 해외업체에 전화가 와서 영어로 대응을 하고 있는데, 묵묵히 수리작업만 하던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재택하세요?"
의외였다. 아저씨의 인상은 온화했지만 느낌은 강철처럼 냉철해보였다. 많은 집들을 돌아다니면서 오직 본업에만 집중해서 처리하고, 고객들의 개인정보나 타인에 대한 관심은 끄고 살았을 것 같은 그가 나에게 사적인 대화를 시도해서 다소 당황했다.
아저씨의 다음 말을 듣고 왜 나에게 말을 걸었는지 알수 있었다.
"우리 딸도 재택하거든요. 마이크로 소프트 다녀."
평소 어려운 어른들 (특히 회사 본부장님들)이 자식 자랑할 때 물개박수를 치는 관성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자동으로 리액션이 튀어나왔다.
"어머, 어머! 엄청난 회사에 다니네요!"
"하핫."
일상적으로 많이 듣는 리액션인지 아저씨의 반응에 여유가 있었다. 말씀이 많은 분은 아니었지만 수리를 하는 동안 딸이 생각났는지 나와 대화하면서 몇번 활짝 웃어보이던 아저씨. 아침일찍부터 남의집에 와서 성실히 작업하는 아저씨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하고자 내가 아는 마이크로 소프트에 대한 모든 정보를 털어 호들갑을 떨었다.
"거기 광화문 앞에 있잖아요. 저도 거기 지나가면서 와, 이런데는 어떤 사람들이 다닐까 항상 감탄했는데. 정말 따님 대단하시네요. 영어로 대화하고 일할텐데! 정말 뿌듯하시겠어요!"
내 머릿속에는 아저씨의 따님의 얼굴이 그려졌다. 철물 일을 하는 부모님 밑에서 열심히 공부하며 부모님에게 마음으로 효도하는, 소위 개천에서 용난 한 소녀를 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딸 자랑을 늘어놓던 아저씨는 잠시 자랑을 멈추고 나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애엄마 같은데, 아이가 몇살이냐 물으셨다. 아이 나이를 말씀드리자, 영어를 시키고 있냐 되물었다. 나는 마치 생선을 훔치려다 걸린 고양이처럼 입맛을 다시며 처연하게 고개를 늘어뜨렸다. 아저씨는 안정기 전선을 잇는 걸 멈추고 날 쳐다보며말했다.
"우리 애들은 다 저기 구청역에 있는 000영어학원 오래 다녔어. 애들 엄마가 딴건 몰라도 영어는 열심히 시키더니 애들이 다 미국으로 대학을 갔네."
000영어학원이라면 여전히 이쪽지역에서 유명한 학원이다. 배수관이나 안정기를 만지며 다른 것들은 잘 모를 것 같은 아저씨 입에서 전문용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아저씨와 나 둘중에 지적우위를 점한 사람은 아저씨였다. 높은 의자에 올라가 있기까지해서 마치 강단에 선 교육전문가에게 일장연설을 듣는 기분이었다.
아저씨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신 후, 000영어학원을 바로 검색해봤다. 그리고 그 주변 유명한 영어학원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 중 맘에드는 한두곳을 연락해서 상담을 받았다. 말빨 좋은 학원 선생님들에게 완벽하게 설득당한 나는, 그중 한곳에 입학금을 넣었다. 돈을 넣은 후 잠시 커피를 한잔 마시는데 기분이 묘했다. 비슷한 또래 엄마들이나 친구들을 만나면 절대 영어유치원이나 학원은 보내지 않을 것처럼 말하고 다녔던 나인데, 아저씨의 어떤 모습에 그렇게 설득되서 귀신에 홀린듯 영어학원에 등록하게 되었을까.
우리 아이가 아저씨 딸처럼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유명 대기업에 들어가길 바라는 마음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저 청담동에서 오랜시간 자리를 지켜낸 아저씨의 성실함, 철물점을 운영하면서도 자식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은 아저씨의 면밀함, 자신의 영역에서는 빠른 시간 안에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는 냉철함과 상대방과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섬세함. 이 모든 것에 매료되어 아저씨의 조언을 그대로 행동에 옮겼다. 왜인지 저분의 말대로 하면, 이곳에서 꾸준하게 잘 붙어서 살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좋은 어른들을 만나기가 힘든 세상이다. 어른이 되서 만난 어른 중 팔할은 뒷문으로 도망한 집주인 같은 사람들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작은 인연이 된 아저씨에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삶의 작은 경험을 공유해준 인생 선배에게 감사한 마음이든다.
다음 전세갱신까지 잘 붙어있을 수 있길. 기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