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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Sep 02. 2021

청담동은 편의점보다 이게 더 많다

필라테스가 편의점보다 더 많은 동네


청담동은 편의점보다 필라테스 센터가 더 많다




정확히 빈땅 레몬에 스낵면을 생으로 부숴먹고 싶은 날이었다. (*빈땅은 맥주브랜드) 하루종일 회의만 주구장창하다가 정작 일을 못해서 10시까지 야근하고 퇴근 한날. 말복에 삼계탕집으로 흘러 들어가듯 집 앞 편의점에 들러 맥주코너로 바로 향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어제까지 있었는데. 빈땅이 있던 자리엔 타이거 맥주가 버티고 서있었다. 빈땅어디갔어. 오늘 나의 씁쓸하고 답답한 마음은 오로지 빈땅의 톡 쏘는 달콤함만 달랠수 있다고! 라고 타이거맥주 호랑이 그림 앞에서 포효하고 싶었지만 금세 평정을 찾았다. 흥. 편의점이 뭐 여기 한 개냐. 다른데 가면 되지.


편의점 사장님께 죄송한 눈인사를 건네고 바깥으로 나갔다. 아, 그런데 여기 말고 편의점이 어디 있더라. 핸드폰 검색 어플을 켜고 ‘청담점 편의점’을 검색했다. 헉! 뭐야. 방금 들린 편의점과 지도앱이 알려주는 가장 가까운 편의점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게다가 한겨울에 눈썰매를 신명나게 타기 딱인 청담동 언덕을 내려갔다 다시 올라와야한다. 허탈한 마음에 포기할까 하다 오늘은 꼭 빈땅 레몬에 스낵면을 먹어야하는 숙명을 다시 한번 느끼고 발걸음을 옮겼다.      


한 블록 정도 걸어갔을 때 필라테스 센터 X배너가 눈에 들어온다.


"여름준비! 필라테스 1회 체험권 49,000원!"


필라테스고 나발이고 딱 저 자리에만 편의점이 있었어도 좋았을텐데. GS나 CU본사에 전화를 걸어 여기 빈 상권이 있다고 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녁도 못먹고 경사진 언덕을 걷다보니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허기짐과 탈수현상으로 눈 앞이 살짝 흐려지려고 하는데 또 필라테스 간판이 보인다. 아니 저 자리에 편의점을 열어야지 무슨 필라테스야.      


 번째로 찾아간 편의점에 다행히 빈땅이 있었다. 만약 없었다면 진짜 울었을지도 모른다. 소중한 빈땅 4개를 한아름 안고 언덕 위로 올라가는데 맥주 무게 때문에 어깨가 빠질  같다. 오늘은  재수없는 날이구나. 가던 길을 멈추고 벤치에 앉아 맥주 한캔을 땄다.      


땀을 흘려서 그런지 맥주가 더 시원하고 달콤했다. 달궈진 마음을 식히고 주변을 돌아보는데 필라테스 간판이 또 눈에 들어온다. 이상하지만 합리적인 의문이 떠올랐다. 진짜 편의점보다 필라테스가 많은 거 아냐? 핸드폰을 켜고 포털에 ‘청담동 필라테스’와 ‘청담동 편의점’을 각각 검색해봤다. 오마이갓. 진짜로 편의점보다 필라테스가 더 많다!  (필라테스: 50개+ α / 편의점: 49개)    


청담동 필라테스는 50개. 피트니스/생활체육시설까지 합하면 훨씬 더 많다
편의점은 49개 (청담역 안에 있는 편의점은 삼성동쪽이다)



혹시 몰라 성수동, 종로 등 내가 예전에 살았던 다른 동네들도 검색해봤다. 필라테스 붐인지라 그곳도 필라테스가 꽤 많았지만 그래도 편의점보단 많지 않았다. 사실 독립된 필라테스 센터만 따져서 저 정도. 피트니스센터나 구청체육시설 안에 있는 필라테스 센터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많아진다.      


청담동 사람들을 보면 태릉선수촌 버금가는 생활 체육인들이 많이 보인다. 일상복 보다는 기능성 티셔츠나 레깅스 등 운동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어쩌다 만나는 지인들 보면 대부분 운동복을 입고 있다. 운동하다 장보러 나오고, 운동하다 커피 사러 오고, 운동하다 애 픽업하러 나오는 느낌.      


왜 이렇게 필라테스 센터가 많을까 생각해봤다. 일단 첫 번째는 먹고 살만해서다. 여가시간에 필라테스나 PT를 받은 사람들이 많은데 이건 부자들이 많다는 반증이다. 필라테스나 PT는 1:1 레슨기준 회당 비용이 7-9만원이다. 월 8회 기준 60만원 정도가 드는데 일반 직장인에게 상당히 부담되는 비용이다. 이런 고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필라테스 센터가 망하지 않고 잘 운영되고 있다. 수요가 지속적으로 받쳐준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환경적인 부분인데, 청담동은 평지와 공원이 없다. 성수동이나 분당을 가면 널찍한 공원들이 많다. 그곳에서 산책하거나 축구를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수 있다. 하지만 청담동은 도시계획 기술이 발달하기 전 (땅을 깎아 신도시를 만드는) 만들어진 동네라 언덕지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사람들이 차로 잘 다녀서 모르지만 청담동은 눈 내린 날 쌀푸대를 엉덩이에 깔고 고속으로 썰매타기 좋은 지형이다. (물론 차가 많이 다녀서 절대 하면 안된다) 차가 많은 가파른 언덕에서 매일 조깅하는 건 교통사고와 퇴행성 관절염을 언제든 맞이하겠다는 강한 의지로 보여진다. 그래서 대부분 동네사람들은 안전한(?) 실내 체육시설을 선호하는 듯하다.


지형만 보면 이곳은 살기 좋은 동네는 아니다 접근성을 택하고 환경을 포기한 경우도 다수


나도 최근 필라테스를 정기적으로 다녔었다. 정적인 운동을 싫어하지만 필라테스를 시작한 이유는 단순했다. 주변 사람들이 다 해서. 게다가 필라테스'권'에 살고 있다고 할만큼 필라테스가 범람하는 동네에 살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야간 폭음으로 인해 먹음직스러운 얼굴이 되어가고 있었다. 동네언니들에게 물어물어 괜찮은 필라테스 센터 10회권을 끊었다. 결과적으로, 동작을 하다 무릎 부상을 입어 정형외과를 다니고 있다. 의사선생님 말로는 인대에 이상이 생긴건 아니라곤 하는데 무튼 몇 개월째 낫지 않고 있다.      


역시 사람은 생긴대로 살아야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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