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용한 점쟁이가 되어갑니다
사람만 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겠다
연차가 쌓이면서 무서운 건, 일도 사람도 월급도 아니다. 그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이 된다는 것이다. 예측이 되니까 미리 답답하고, 예측이 되니까 미리 좌절한다.
얼마 전 우리조직은 조직개편을 했다. 2-3년 동안 마케팅부서에서 인사이트 업무를 했던 나는, 다시 매출의 압박이 심한 영업부서로 돌아가게 됐다. 해외출장을 못가는 상황에서 영업부서에 가는 게 무슨 의미일까 싶었지만 곧 코로나 봉쇄도 풀리고 활기가 돌 것 같아서 기대를 안고 자리를 옮겼다.
원래 자리를 정리하고 짐을 싸는데, 싱그러운 향이 확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 "선배님 안녕하세요!"하고 큰 소리로 인사하는 z세대 후배들. 원래 내가 있던 마케팅부서에 93~95년생 후배들이 잔뜩 들어왔다. 아마도 해외 마케팅 트렌드 속도를 따라가려면 80년대생들 보다는 90년대생이 적합하다는 판단 일 듯했다.
어리고 생그러운 아이들이 모여있는 걸 보고 다른 사람들은 젊은 에이스들이 모여있다며 부러워했다. 그중에는 원래 나랑 같은 부서에 있던 똑순이 후배 나나도 있었다. 나나는 나처럼 묵직(?)한 선배들과 있다가 또래들과 근무하게 되어 신나보였다. 입사가 조금 늦은 나나가 또래들과 어울릴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였다.
그런데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케팅부서 아이들을 보는데 이상하게 불안했다. 특히 눈감고 의자에 앉아있는 부장님을 보니 더 불안이 커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 저 부장님. 저런 성향 때문에 같은 부서에서 근무할때 답답한 적이 많았다. 의사결정 하지 않는 부장과 젊고 패기 넘치는 아이들... 왜인지 하루이틀 안에 무슨 일이 생길지 눈에 보였다. 자리를 정리하고, 뒷자리 앉아있는 비슷한 연차의 동료에게 불안한 마음을 털어놨다.
나 "아무래도 나나 걱정이 되는데."
동료 "왜? 또래들이랑 있으니 괜찮을 듯 한데?"
나 "음... 쟤네 금방 싸울 것 같은데?"
동료 "왜? 왜싸워?"
나 "음... 뭔가 조정을 해줄 사람이 없다."
이 말을 하고 정확히 다음날, 나나에게 메신저가 왔다. 또래들과 있어서 좋을 줄 알았는데, 다들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서 업무분장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거다. 특히 PR업무는 서로 하겠다고 하는데, 부장이 넷이 알아서 정하라고 하고 자리를 떠버렸다고 한다.
그 뒤 일은 불보듯 뻔했다. 넷이 회의실에 들어가서 끝없는 논쟁을 하고 결국 해소되지 않은 채 감정만 상하고 나왔다고 한다. 그중에 가장 연차가 오래된 A가 부장에게 조정을 요청했지만, 부장은 '업무분장이 명확하지 않아야 모두 힘을 합쳐서 열심히 하지'라는 희대의 망언을 하며 또 회피해버렸다고 한다.
나나에게 동료와 했던 말을 꺼내놨다. 사실 너네들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아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거다. 사람의 잘못은 아니고, 조정 안하는 의욕없는 부장을 앉혀놓고 의욕 넘치고 자존감 높은 너네들을 모아놨으니 분쟁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나나는 속상한 표정을 지으며 이제 어떡해야 해야하냐 물었다.
"논리가 필요하지. 하고싶다고 떼쓰는게 아니라, 내가 그 일을 해야하는 논리. 왜 PR을 나나가 해야하는지 부서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증거를 가져와봐. 그럼 애들이 납득할거야."
다음날, 다시 업무 분장으로 협의하려고 모인 마케팅부 부서원들. 여전히 네명 모두 PR을 하겠다고 난리였다. 그때 나나는 "저는 PR대행사 000와 협업한 적이 있고, 여기있는 여러분들 중에 유일하게 보도자료를 쓴 경험이 있습니다." 결국 하고싶다고 떼만 쓰던 애들보다 PR업무에 대한 논리를 만든 나나가 그 업무를 하게됐다.
원하는 일을 하게 된 나나가 음료수를 들고 내 자리로 왔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나나가 나를 바라본다.
나나 "신기해요. 이상하게 선배님이 말하는 대로 돼요. 돗자리 까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돗자리는 무슨. 그냥 회사에 오래 다니다보면 사람 구성과 조직 구조만 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히 보인다. 그래서 미리 좌절하고, 미리 슬퍼하고, 미리 두려움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듯하다. 이렇게 미리 좌절감을 느끼는데 장점도 있다. 그건 무슨일이 생겨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 다는 것. 기대치가 바닥이기 때문에.
그래서 가끔 연차가 오래되었어도 항상 새 사람처럼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면서도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그들의 약 90% 정도는 경험이 없는 치기어린 열정이지만, 남은 10%의 사람들을 보면 겪을 걸 다 겪고 모든 게 다 파악이 된 상태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품어낸다.
중간관리자가 된 지금, 내가 해야하는 건 후배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불행한 일'에 대해 예언하는 것보다 불행한 와중에 방향을 주고 해결책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게 아닐까. 물론 여전히 점쟁이 역할은 할 테지만 이왕 같은 점쟁이라도 나쁜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팁을 주는 용한 점쟁이가 되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