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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Mar 13. 2023

청담동은 숨어살기 좋다

안보려면 안볼수 있는 굽이굽이 청담동 언덕


피하고 싶은 사람들을 피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





어딜 가든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분쟁이 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다들 내 마음 같지 않아서 내 예상과 다른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행히 이 동네 살면서 사람들과 큰 분쟁은 없었다. 내가 일을 해서 사람들과 접촉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도 하고 대부분 점잖은 분들이라 딱히 트러블이 날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안 마주치고 싶은 사람이 지금까지 딱 두 부류 있었다.    

    

먼저 과격한 가족들이다. 이런 경우는 부모가 과격하다기 보다는 아이가 과격한 경우다. 콩심은데 콩난다는 말이 무색하게끔 과격한 아이 부모들은 대체적으로 무기력하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에게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아이를 보며 나뭇가지를 뺏기 보다는 그루터기에 앉아 한숨만 쉬고 있다. 한번 우리 아이가 그 아이에게 맞아서 눈 주변에 크게 멍이 든 적이 있다. 그 아이 엄마가 사과는 했지만 우리 가족의 놀란 가슴을 달래는데 그 정도 사과는 역부족이었다.      


나였다면 때린 아이를 데려와서 우리 아이에게 사과를 시키고 치료비를 확인하고 우리 아이가 완전히 다 나을 때까지 종종 들여다봤을 것 같지만, 그 부모는 ‘죄송해요’가 끝이었다. 동네 병원에서 안와골절이 의심된다고 해서 아이를 데리고 대학병원으로 뛰어가 CT를 찍고 온갖 검사를 하는 도중에도 그 아이는 다른 애들을 때리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 아이 상태는 괜찮았다. 결과적으로 큰 일은 아니어서 따로 연락을 하진 않았지만 대처가 상당히 아쉬웠다. 대화가 되는 상대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피하고 살기로 했다. 그집과 집이 가까워서 한동안 마주칠까봐 조마조마하긴 했는데 신기하게도 5년 동안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또 피하는 부류는 허세 부리는 사람들. 청담동에서 허세 부리는 사람은 정말 찾기 힘들다. 이 전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드러내는 걸 조심하는 사람들이 많고 어설프게 자랑했다가 코깨지는 경우가 많이 때문에. 그럼에도 가끔 ‘해맑게’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런 분들을 보면 좀 치기어린 아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른의 대화에 적절한 상대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한번 동네 엄마초대를 받아 놀러간 적이 있었다. 떡볶이와 순대를 펼쳐놓고 허겁지겁 먹는데 보르도 와인을 들고온 서윤엄마가 말미마다 ‘제가 이 동네를 오래 살아서요’라는 말을 했다. 물론 혹자가 보기엔 순수한 의도일수도 있지만 대화 속을 들여보면 은근히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서윤엄마는 대화 내내 테이블을 둘러싼 사람들의 자산과 사회적 지위 상태를 파악하고 자신보다 낮은 사람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특히 옷을 소박하게 입고 술을 한잔도 못마시는 채원엄마를 무시하는 게 느껴졌다. 애엄마가 이렇게 입고 다니면 안된다고 사람들이 무시한다면서 자기가 아는 리셀러를 소개해줄테니 가방이나 옷을 하나 지르라고 종용한다. 그때 제재를 하고 싶었는데 같이 있는 엄마들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데다 다들 좋게 좋게 넘어가려는 것 같아서 나도 가만히 있었다. 그녀가 나에게 질문을 하기 전까지는.      

“라하엄마, 어려서 좋겠다. 이 나이에 이 동네 사는 거 여자 회사원들 로망 아니야?”


그냥 ‘네, 맞아요’하고 가만히 있었어야 했는데 그날 따라 회사에서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터였다. 눈 앞에 있는 물티슈 2장을 거칠게 두장 뽑아 입주변에 흥건히 묻은 떡볶이 국물을 훔치고 한마디 했다.     


“서윤 어머니, 이 동네 얼마나 오래 사셨어요?”

“음, 나? 나는 9년 정도 살았지. 결혼 할 때 이사왔거든.”

“아.. 그렇군요. ‘어린’ 저는 이 동네 산지 10년 넘었고, 제 옆에 진우 엄마는 청담자이 한양아파트 시절부터 살았어요.”     


서윤엄마의 동공이 흔들린다. 그리고 옆에 있던 진우엄마가 내 허벅지를 툭 친다. 굳이 왜 상대를 하냐는 듯이. 하지만 허기졌던 내 입술은 떡볶이 흡입을 멈추게 한 서윤엄마에게 분노하며 한마디 더 쏟아붓고 있었다.

“그리고 서윤어머니가 명품 옷 좀 사라고 한 채원어머니는 진흥아파트 입주하신 분이에요. 여기 허허벌판일 때 쌀포대 들고 청담공원 언덕에서 눈썰매 타던 분이고요. 그냥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려요. 그리고 저, 서윤엄마랑 두 살 차이에요.”     


나의 폭탄투하로 흥겨웠던 테이블 위가 얼음장이 됐다. 그 뒤로 술을 진탕먹어서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다음 날 아침 진우엄마와 채원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어제 너무 사이다긴 했는데 안 그래도 된다며. 저런 사람 한 두명 보냐며. 앞으로 그러려니 하고 좀 넘어가라고 한다. 역시 청담동 찐 로컬다운 반응이었다. 그날 이후 내가 피하는 건지 그녀가 피하는 건지 서로 마주친 적이 없다. 아이들이 같은 학교에 다녀서 학원에서 서윤이는 보이는데 서윤엄마가 안보여서 진우엄마에게 살짝 행방을 물었다.      


“이 동네가 그래. 여기가 안 마주치려면 안 마주칠 수 있는 동네야. 대단지 아파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 골목길 굽이굽이 있으니 숨어 다닐라고 맘 먹으면 숨어있을 수도 있고. 내 생각엔 서윤엄마가 라하엄마(나) 무서워서 도망 다니는 것 같애.”      


진우엄마의 말을 듣고 찬찬히 이 동네를 살펴보니 정말 안 마주치려고 마음을 먹으면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무걸음 정도 걸으면 골목이 하나 나오고, 또 스무걸음 정도 걸으면 골목이 나온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보이면 대략 보폭과 속도를 파악해서 아는 척 할 수도 있고 모르는 척 옆길로 새어버릴 수도 있다.      


아마도 넓은 공간을 공유하고 대형 상가를 가진 대단지 아파트에서는 쉽지 않을 수 있다. 대단지에 사는 친구가 매번 마주치는 불편한 사람들에 대해 고민을 토로했던 적이 있다. 같은 마트를 다니고 같은 상가를 쓰기 때문에 편하든 불편하든 사람들과 계속 마주친다. 골목이 많고 주거형태가 균일하지 않은 이 동네는 내 동선의 경우의 수를 다양하게 할 수 있다. 안 마주치려 다짐하면 같은 단지에 살아도 마주치지 않게 할수 도 있는 거다.      


가장 좋은 건 피할 사람이 없는 거다. 가능하면 이웃주민들과 허허실실 잘 지내보려 한다. 하지만 모두 내 마음 같지 않기 때문에 크고 작은 분쟁은 피하기 어렵다. 그래도 그런 분쟁이 있을 때 후일을 걱정하며 남 눈치를 보기보다는,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한마디씩 할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곳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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