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싱글즈를 보다가...
짧고 간결한 메시지였다. 본인에게 맞는 커피를 찾느라 헤맸었다는 그녀는 우리 카페 커피를 좋아했다. 특히 일반 아메리카노보다 카페인 함량은 높으면서 가벼운 풍미가 있는 콜드브루를 좋아했다. 마치 임팩트는 강하지만 뒷맛이 깔끔한 그녀와 같다고 할까. 앨리스가 올린 커피 사진을 보며 잠시 상념에 빠져있다가 재 빨리 메시지 버튼을 눌렀다.
<인스타그램 메시지>
-앨리스님 안녕하세요. 블록 카페 사장 김치올입니다.
메시지를 보낸 후 10초도 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오! 사장님, 안녕하세요. 제 계정을 찾아내셨군요?!
-네네. 드릴 말씀이 있어서.
-뭔데요?
-제가 갑작스럽게 일이 생겨서 내일 하루 쉴 것 같습니다. 단체손님들과 오신다고 한게 기억이나서 급히 연락드렸어요.
-어머, 큰일이 있으신 건 가요? 네네. 제 걱정은 하지마세요.
-아, 큰일은 아니고 좀 컨디션이 안 좋아서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네. 오픈하시는 날 연락주세요. 몸 조리 잘하시고요!
앨리스의 마지막 말에 울컥 눈물이 났다. 최근 계속 혼자가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나보다. 사람들과 어울리면 피곤함은 있지만 온정을 느끼게 된다. 최근 계속 혼자 카페를 오픈하고 사람들을 맞이하고 혼자 설계작업을 하면서 혼자가 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짓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괜찮지 않았다. 혼자 있는 시간은 군더더기는 없지만 외로웠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나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더 빈 껍질로 만들었다. 조금 귀찮더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하루 정도 지나니 컨디션이 돌아왔고 앨리스에게 다음날 방문해도 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앨리스는 바로 눈에 하트가 새겨진 이모티콘을 보내줬다.
오픈 준비를 끝내고 가게 문을 열자마자 앨리스와 여자 6명이 카페 안으로 들어온다. 테이블이 적어 단체손님을 맞기에는 불편한 카페지만 앨리스와 여자들은 학익진처럼 금세 대형을 만들더니 자신들이 서로 대화하기 가장 좋은 자세로 앉아있었다. 여자 일곱명이 수다떠는 소리는 상당했다. 최대한 그녀들의 이야기를 안들으려고 했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역시나 절망적인 예감은 사실이 맞았다. 내 이상형에 근접한 앨리스는 엄마가 맞았다. 자신들이 몰고 온 여자들과 학교 이야기, 학원 이야기, 아이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녀들의 다채로운 대화는 종잡을 수 없었는데 가장 귀가 솔깃한 건 남편 이야기를 할 때였다.
"맨날 늦게 들어오면서 주말에 골프를 간다는 거에요."
"골프만 가면 다행이지. 낚시도 가. 그러면서 애들이 자기를 은행으로 안다고 투덜거려. 제정신 아냐."
"우리 남편은 이와 중에 돈을 다 시댁에 퍼줬어요. 시누이가 사업을 하는데 말아먹거든. 그때마다 돈을 주는거야."
”그래도 돈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 서후아빠는.“
난잡한 엄마들의 대화 속에서 한 엄마가 앨리스를 가리키며 말한다. 앨리스는 고개를 한번 절레절레 젓더니 목에 핏대를 세운다.
”그럼 뭐해요. 자기 새끼도 못 챙기는데. 저는 이혼녀나 다름없어요 지금.“
앨리스의 ‘이혼녀’라는 말이 귀게 정확히 꽂혔다. 얼마 전 돌싱들이 나오는 한 TV프로그램을 봤던 게 기억났다. 다양한 이혼사유로 아픔을 겪은 사람들. 한 때 사랑했지만 불가피한 사정으로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인연도 있는 거다. 그게 앨리스일까? 앨리스가 만약에 이혼을 한다면 나는 자녀가 있는 여자와 연애를 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무래도 자녀가 있는 여자는 부담스럽다. 괜히 연애를 하다가 자녀에게 상처를 주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내가 초혼이니 괜찮지 않을까. 아니, 내가 괜찮아도 우리 부모님이 뒤집어질 거다. 그래도 해볼만 하지 않을까?
앨리스와 결혼식장에 오른 상상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내 눈 앞에 서있다.
"벌...써 가시게요?"
"빨리 가드리는 게 좋은 거죠. 내일 또 와도 되죠?"
"그럼요. 언제든 편하게 오세요."
앨리스는 다음날 또 다른 단체손님을 데리고 내 가게를 방문했다. 다양한 화제로 대화를 끌어가는 앨리스지만 그녀가 카페에서 사람들과 하고 있는 일은 성형외과 시술상담이었다. 리쥬란, 울쎄라, 써마시, 토닝 등 영어로 된 전문용어들이었지만 시술이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앨리스가 가져온 서류에 뭔가를 기입했다. 가만 보면 마음을 열게 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상황에 공감하고 이해해주면서 따스하게 올바른 방향으로 끌어주는 느낌이랄까. 그러면 안되는 걸 알지만 내 마음도 그녀를 향해 점점 열리고 있었다.
앨리스가 내 카페를 상담소로 활용하면서 점점 카페 매상이 오르고 있었다. 하루에 10-20만원 하던 카페 매상이 30-40만원으로 뛰고 있었다. 일 40만원이면 한달 25일 근무하면 매출이 천만원이다. 여기서 임대료 및 재료비를 빼면 직장인 일 때 받던 월급은 넘어섰다. 거기에 소소하게 하고 있는 건축일까지 하면 일반 직장인 부럽지 않은 수준의 소득이었다.
시간을 내서 그녀에게 감사마음을 전해야겠다 생각하다가 나도 뭔가 시술을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가격을 결제하는 앨리스에게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런데, 남자들도 리쥬란 많이 맞나요?"
영수증과 카드를 받아들던 앨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럼요, 사장님 진짜 한번 오세요. 진짜 후회 안 하실 거예요."
"그럼, 내일 퇴근하고 한번 들릴게요."
"정말요?! 마침 제가 내일 저녁에 있어요! 이번에 새로 들여온 기계가 있어서 이벤트도 같이 진행해드릴게요. 넘 잘됐다!"
파안대소하는 그녀를 보니 뭔가 뿌듯했다. 나는 다른 상담없이 카페에서 들은 귀동냥으로 성형외과를 방문하게 된 고객이니까. 그녀의 고객획득비용을 덜게 해준 것 같아 보람찼고 그간 매상을 올려준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음날 퇴근 후 앨리스가 근무하는 성형외과에 방문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왜 앨리스가 본인을 이혼녀나 다름없다고 했는지 한번에 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