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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Sep 20. 2024

울쎄라, 리쥬란

아픔 뒤에는 행복이 올까?



성형외과 한쪽 벽은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마 이들 중 한명이 앨리스 남편일 거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며 의사들 얼굴을 하나하나 봤다. 요즘 의사들은 얼굴도 잘생겼군. 공부도 잘하고 관리도 잘하는 알파메일들의 집단이었다. 하지만 맨 끝에 있는 얼굴을 보니 긴장감이 확 풀렸다. 아마 이 사람이 앨리스의 남편이겠지.


접수대가 있는 6층에 올라가니 앨리스가 데스크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머, 사장님 시간 맞춰오셨네요!"

첫 성형외과라 뻘쭘하긴 했지만 그래도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녹담동에 와서 처음 알게된 동네사람인데다 카페 단골이 하는 곳이니까. 게다가 할인까지 받을 수 있었다. 앨리스가 다른 직원분에게 몇마디 건네니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온다.


"김치올씨, 저 따라오세요."

직원이 안내한 곳은 사진을 찍는 곳이었다. 타이트한 정장차림의 그녀는 무표정으로 내사진을 여러장 찍었다. 1번 보세요, 2번 보세요, 3번 보세요. 말만 존댓말이지 친절이라고는 없는 직원에 대해 기회가 되면 말해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밝고 명랑한 앨리스의 밑에 있는 직원이라고 믿을 수 없는 냉랭함이었으니까.


얼음장 같은 직원은 침대 3개가 나란히 있는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옷을 갈아입을 줄 알았는데 그냥 침대에 누우라고 해서 조금 신기했다. 옷 갈아입고 가운 입고 하얀 조명 속에 파묻히는 거 아니었나? 일단 침대에 누워 기다리니 아까 그 무표정 직원이 나타나 얼굴에 크림을 발라준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니 마치크림이라고 한다. 크림을 바르고 20분 정도 지나니 한 남자 의사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김치올씨, 오늘 울쎄라, 리쥬란 하시네요."

목소리를 들어보니 젊은 의사였다. 이 남자가 앨리스 남편은 아닌 건 확실했다. 경계심을 풀고 의사에게 작게 네, 라고 했다. 사실 리쥬란만 맞는 거였지만 앨리스 덕분에 울쎄라라는 리프팅 서비스를 받게 됐다. 역시 앨리스는 언행일치를 하는 여자였다. 의사가 말하는 뉘앙스를 들어보면 내가 울쎄라를 서비스로 받는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사실 서비스를 받는다고 했을 때 조금 하대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센스있게 처리해준 앨리스에게 감동 받았다.  


"원래 왼쪽이 좀 비대칭이시죠?"

의사의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차가운 기기가 얼굴에 닿자마자 태어나서 처음 겪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왼쪽 얼굴을 정육점 고기커터가 잘라내는 느낌이랄까. 피부가 썰려지는 느낌이라 이를 꽉 깨물었다. 안면근육의 움직임을 느꼈는지 젊은 의사는 아프냐고 물었다. 고개를 젓고 얼른 끝내달라는 손짓을 보냈다. 실제 울쎄라 시술시간은 3분 남짓이었지만 30년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고 한숨을 확 쉬는데 앨리스가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아프죠?"

"아, 아프네요. 괜찮아요. 감사해요."

"리쥬란은 제가 옆에서 좀 봐드릴게요. 이것도 상당히 아프거든요."

"방금 한 것보다 아픈가요?"

"그렇진 않아요. 이건 그냥 바늘이 얼굴에 바로 들어가는 건데 따끔따끔 정도? 금방 지나갈거에요 혹시 원하시면 손 잡아드릴게요."


손을 잡아준다니 이게 무슨 소릴까 했는데 이미 시술이 들어간 순간부터 앨리스는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바늘이 눈 밑 피부를 찌르는 순간 이미 온몸이 경직되듯 조여왔기 때문. 눈을 질끔 감고 얼른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는데, 앨리스가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근데 카페는 왜 노키즈에요? 애들도 카페 오면 좋을텐데. 요즘 초등학교 고학년들이나 중학생들은 스타벅스에 공부해요. 위에 학원도 있겠다, 도서관처럼 해도 좋을 것 같은데."


상황과 시간에 맞지 않는 질문이라 조금 놀랐다. 그래도 이 공간에서 만큼은 그녀에게 빚을 졌으니 속마음을 조금 드러내기로 했다.


"제가 좀 아픈 기억이 있어요. 어린이와 엄마한테 좀 상처받은 일이 있거든요. 아이들을 싫어하는 건 아닌데, 좀 그렇습니다."

"그러시구나. 그래도 건물 앞에 떡하니 노키즈 쓰여있으니 좀 오해는 하겠던데요. 사장님이 나쁜 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사실 아닌데."


앨리스의 마지막 말이 들리는 순간 잠깐 바늘이 얇은 피부를 찌르는 고통을 잊었다. 그래, 사실은 나 아이를 싫어하거나 그런 사람은 아닌데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거니까. 그녀와 대화를 하다보니 고민 하나 정도는 털어내도 될 것 같아 시술을 마무리하면서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고민 상담할게 있는데, 얼마 전부터 아이들이 자꾸 편지를 보내는 것 같아요."

"그래요? 무슨 편지요?"

"사진을 좀 보여드려야하나. 잠시만요."


앨리스에게 아이들에게서 받은 편지를 보여줬다. 미래 경찰관, 소방관의 편지. 편지를 본 앨리스는 몸을 뒤로 젖히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게 뭐에요? 어머 애들 너무 귀엽다 무슨 일이야."

"귀엽긴 한데... 좀 불편해서, 도와주시면 안될까요?"

"애들이 장난치는 것 같은데 방법이 있을까요? 음, 그럼 제가 녹담초 단톡방에 한번 말은 해볼게요.. 세상에 애들 너무 웃겨."


심각한 내 표정과 달리 까르르 웃어대는 앨리스. 괜한 말을 했나 싶기도 했지만 속이 후련하기도 했다. 사실 이런 고민은 어디 털어놓기도 뭐하니까. 그녀가 도움을 줄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좀 후련했다. 바늘로 난도질 된 얼굴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나중에 아물기라도 할테지만 누군가의 혐오의 말은 마음을 계속 갉아먹었다.


"근데 언제부터 이 편지가 온거예요? 신기하네요. 저도 이동네 오래 살았지만 이런건 첨봐서요."

"한번 피아노학원 다니는 아이를 맡아달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형편상 봐줄수가 없었거든요. 그날 뒤로 편지가 와요. 가게에 CCTV가 있긴 한데, 우편함 앞에는 CCTV가 없다 보니 범인을 알 수가 없고 또 이 것땜에 설치하긴 또 뭐해서..."

"그렇구나. 뭐 심각한 거 아닌데 어때요. 애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그렇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기분이 좀 상하니까."


앨리스는 의아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기분이 상하는 걸로 이런 부탁을 한다는 것에 대해 공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왜인지 도와줄 것 같았다. 카페에서 모습만 보면 확실히 그녀는 이 동네 실세였으니까.


시술 결제를 하고 1층으로 내려가 건물 바깥으로 나가려는데 앨리스가 갑자기 쫓아나온다. 뭔가 결제가 잘못 된건가 싶어 보는데 앨리스가 손가락으로 한 공간을 가리킨다.


"근데 건축하신댔죠? 저희 성형외과 1층 너무 휑하지 않아요? 여기 쫌 나무라도 심어야하나. 한번 디자인 의뢰해도 될까요? 왜인지, 사장님은 실내디자인도 잘하실 것 같아서요. 예산은 3억 이내로요."


3억..? 3억이면 자재비, 시공비, 노무비를 다 빼도 직장인 몇 달 월급이었다. 비록 혼자 다 할 순없으니 도움을 좀 받아야겠지만 건축사 개인으로 받은 큰 발주건이었다.

 

병원을 나서면서 인적이 드문 녹담동 길을 천천히 걸었다. 뭔가 새로운 시작이 될 것 같은 이 곳. 비록 피부는 찢어질 듯 아팠지만 얼굴을 부여잡고 성큼성큼 가파른 언덕을 올라갔다.


이런 기운을 느낀 건 성인이 되고 처음 인 것 같다. 앞으로 좋은 일이 계속 될 것 같은 느낌.  






이야기가 끝나갑니다. 3회 남았네요. 3-4년 전 글이라 좀 촌스럽지만, 그래도 예쁘게 봐주세요 :) 옛날 글을 쭉 다시보니 이 다음에는 더 잘 쓸 것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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