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키즈존을 반대하며...
원래 결말은 이게 아니었습니다. 녹담동에서 노키즈존 카페를 운영하던 치올은 동네 주민들에게 철저히 소외 당해서 결국 건물에서 쫓겨나는 결론이었죠. 현금영수증 발행을 잊었다가 가산세를 내고 대량 주문을 받았다가 노쇼로 정성스레 만든 쿠키를 폐기하고 건물 누수 때문에 이곳저곳 사진을 찍다가 같은 건물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피아노 선생님이 몰카범으로 오인해서 경찰서를 들락거리다가 건물주한테 쫓겨나는 결론이었습니다.
몇 년 만에 들춰본 소설을 한번 쭉 읽어보니 글 곳곳에 화가 많아보였습니다. 당시 두세살 되는 저희 아이를 데리고 마실을 나갔다가 노키즈존이라고 입장을 거부당한 곳이 많았거든요. 허탈한 마음에 집에 돌아오며 그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만약에 이 아기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래도 노키즈존을 고수했을까. 그래서 미래 의사, 경찰관, 건물주라는 상상을 더해서 글을 썼었죠.
인간은 경이로운 탄생과 동시에 유약함을 안고 태어납니다. 태어나자마자 직립하는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주변의 돌봄없이는 생존할 수가 없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도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인간의 아기는 무력하여, 여러해 동안 어른들이 부양하고 지키고 가르쳐야 한다. … 인간을 키우려면 부족이 필요했고 진화에 선호된 것은 강한 사회적 결속을 이룰 수 있는 존재였다.’
이 글을 읽는 분, 가게 사장님, 판사, 의사, 권력자 등 모두 사회적 관심과 배려를 받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받은 사회의 시혜는 잊어버리고 타인을 배척하는, 특히 가장 약한 아이들에게 화살을 돌리는 분들에게 되 묻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나이 들어서 위험에 처했을 때 이 아이들이 자라서 도와줄 거란 기대는 없는 것인가요.
시대가 빠르게 변합니다. 많은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경험이 가르침이 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프라인이 중심이었지만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것들이 비대면으로 이뤄집니다. 그럼 오프라인 세상에서 업적을 쌓은 어른들의 가치는 떨어지게 되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미래도 똑같을 겁니다. 번잡한 세상 변화 속에서 어른들의 길라잡이가 되어줄 것은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들 뿐입니다. 그런 메시지를 이 소설에 담고 싶었습니다.
다시 소설을 정리하면서 치올에게 물었습니다. 나의 결론을 너도 원하냐.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에게 한번 더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 하며 마무리를 수정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화가 올라오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기다리신 분들게 죄송합니다.) 건물주에게 쫓겨나는 대신에 그는 노키즈존 팻말을 치우고 녹담초 야구부 아이들과 어울리는 일상을 택합니다. 지금 어디선가 치올같은 마음으로 사는 분들이 계시다면 한번 더 아이들에 대해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시간이 흘러 우리가 병들고 약해졌을 때 몸으로 머리로 도와줄 사람은 지금의 어린 아이들이니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