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드니 Oct 09. 2024

아저씨 가게 놀러올래?

삼촌?


결국 팻말은 완전히 치웠다. 노키즈존 팻말을 치우면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진 않을까 고민했지만 기우였다. 오히려 앨리스는 우리 카페가 성형외과 손님들과 비밀 상담하기 좋다면서 더 많은 손님들을 몰고 왔다. 대체적으로 그녀가 하는 대화는 시술 상담과 교육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말문이 막히거나 정적이 흐르면 화제를 나로 돌렸다.  


“여기 원래 노키즈존 이었는데, 사장님께서 배려해주셔서 노키즈존 취소해주셨어요. 젊은 분이 그런 선택 쉽지 않은데, 사장님 정말 대단하죠?”


앨리스의 말에 맞은 편에 앉아있던 고객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대단한 일 해냈다는 듯 어떤 분들은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워줬다. 하늘로 향한 단단한 엄지손가락에게 미안하지만 유난한 칭찬에 내가 할수 있는 건 고개를 떨구는 것 뿐이었다. 내가 스스로 한 선택도 아니고 건물주의 권유에 의한 것이니까.


녹담동 골목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갔다. 퇴사하고 카페를 열면 모든 게 나의 중심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혼자만의 생각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 좁은 골목길이 다른 골목으로 굽이굽이 연결되어있듯이 내가 혼자 고립되고 싶어도 세상에 나온 순간부터 작은 길들과 연결된다. 연결을 거부하고 싶어도 세상의 시스템 안에 들어오면 무력해질 수 밖에 없다. 모든 걸 맘대로 하려면 허허벌판으로 떠나거나 자연인으로 살아야한다. 평생 도시에서 살아온 내가 그게 가능할 리가 있겠는가. 다시 무력해진다.


“펑, 펑”


바닥을 보며 걸어가는데 배팅볼을 하는 소리가 들린다. 밤 7시가 넘었는데도 녹담초 야구부는 맹 연습 중인가 보다. 지나칠까 하다가 지난번에 구급차를 불러줬던 야구부 아이들 얼굴이나 볼까 해서 잠시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흩날리는 모래밭 사이로 한쪽에서는 배팅볼을 치고 한쪽에서는 수비연습을 하고 있다. 두꺼운 헬멧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지난번에 도움을 준 아이를 찾는 게 좀 어려웠다. 한참 서성이다가 포기하고 다시 교문 바깥으로 나가려는데 한 아이가 방망이를 두고 내 쪽으로 뛰어온다.


“아저씨!”

그때 그 아이다. 연습을 열심히 했는지 온몸이 땀 범벅이다.


“아저씨, 몸은 괜찮으세요?”

헬멧을 벗으며 내 안부를 묻는 아이. 운동부라서 그런지 예의범절 교육이 잘 되어있는 느낌이다.


“괜찮지. 그땐 고마웠어.”

“아니에요. 당연한 걸요.”


잠시 정적이 흐른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달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다시 연습하는 곳으로 돌려보내려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말이 나온다.


“아저씨 가게 놀러올래? 저 밑에 카페인데.”

“카페요? 저 커피 못 마시는데.”

“그냥 더울 때 땀 식히러 와.”

“감사합니다.”


순간적으로 나도 놀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키즈존 카페를 운영하던 마음이 한 순간에 바뀌었다. 사실 예전부터 이 아이를 우리 가게에 초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예의바르고 인상이 좋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도와줄 줄 아는 이 아이를.


다시 연습장으로 뛰어가려는 아이를 불러보았다.

“저기. 얘야.”

뒤를 돌며 환하게 웃어보이는 아이. 진한 눈썹과 다부진 입매만 보아도 야구를 잘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크게 될 아이라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묻는다.


“너 이름이 뭐니.”

잠깐의 머뭇거림도 없이 아이가 말한다.

“이정후요! 지난번에 아저씨 머리에 공 맞춘 저 녀셕은 고우석이에요!”


정후가 가리킨 손 끝에는 마운드에서 포수에게 투구하는 아이가 보인다. 와인드업을 해서 정확하게 포수 글러브로 공을 꽂아 넣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한쪽 발이 올라간다.


두 손을 뒤로 올렸다가 한 발을 올려 허공에 공을 꽂아본다. 또르르르, 공이 굴러가 아이들이 연습하고 있는 구장 한복판에 멈춘다. 보이지 않는 공을 집어 아이들이 홈으로 던지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래, 그냥 이런 마음으로 살아볼까. 별거 아니잖아. 공을 던진 손을 털어 주머니에 꽂고 교문 바깥으로 나선다. 어스름한 저녁시간이라 그런지 학교 앞 슈퍼 조명이 유난히 밝아보인다. 안을 들여다보니 음료수가 가득 채워진 냉장고가 눈에 띈다. 평소라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냉장고에 몸이 끌린다. 문을 열어 음료수를 한아름 꺼내 계산대에 올린다. 검정 비닐봉지에 음료수를 차곡차곡 쌓아 포장하던 슈퍼 사장님이 묻는다.


“아빠신가? 아빠기엔 너무 젊으신데.”

“아, 그냥 삼촌입니다.”

“그쵸? 애들이 좋아하겠네. 쟤네 곧 대회라서 더 열심히 하는 거 같애.”


더 이야기를 하면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라 비닐봉지를 훔치듯 집어 슈퍼 바깥으로 나섰다. 교문으로 향하는 짧은 거리 동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해방감이 느껴진다. 진즉 이렇게 할 걸 그랬나. 슈퍼에서 교문까지 거리는 3미터 남짓인데 이 거리를 건너는데 한참이 걸렸다. 교문에 발을 들이자마자 멀리서 정후가 뛰어온다. 내 손에 있는 것을 한번 보고 내 얼굴을 한번 보고 달려드는 정후에게 나도 환하게 웃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