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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Oct 05. 2024

부탁인데 이것 좀 치워주시면 안 될까요?

촌스러워요


"건물을 사셨다고요?"

"네, 뭘 그렇게 놀라세요. 제가 이 건물 샀다고요. 어후, 대출 무지 땡겼어요."


카페 오픈준비를 하는데 누군가 카페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재료품 배송을 온 기사님인가 싶어 ‘두고 가세요’라고 성의없게 답하고 계속 머신 세팅을 하는데 나가는 소리가 안 들려 돌아보니 계산대 앞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그럼 건물주가 이제 앨리스 인건가요"

"그러겠죠? 등기부등본도 제가 떼왔어요. 사장님 700원 아껴드릴라고요. 여기 신분증도 가져왔어요.'


귀 뒤로 머리를 넘긴 앨리스 얼굴 옆에 그녀의 한글이름이 쓰여있다. 이희정. 평소라면 이름이 이미지에 비해 조금 촌스럽다고 농담이라고 했겠지만 그럴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아,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별 말씀을."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서류를 다시 집어 가방에 넣는 앨리스. 여전히 수더분하고 털털한 모습이지만 기분 탓인지 조금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앨리스는 월세는 올릴 생각도 없고 임대차보호법 때문에 당분간 올릴 수도 없다고 하면서 앞으로도 지금처럼 장사 잘 해달라는 말을 하고 떠났다.


평소라면 계산대 앞에서 인사를 하고 말았겠지만 신분이 바뀐 상황이라 문 앞까지 배웅을 했다. 녹담동 좁은 골목을 당차게 걸어가는 앨리스의 뒷모습을 보는데 잠시나마 믿음 이상의 마음을 품었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잠깐 귀신에 홀려 현실감각이 너무 떨어졌달까.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가게 운영과 설계에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멀어지던 앨리스가 갑자기 등을 확 돌리더니 종종 걸음으로 다가온다. 뭐 놓고간 물건이라도 있나 싶어 유리창 너머 가게 안을 살피는데 두고 간 물건은 없어보였다. 어느 새 내 코앞까지 다가온 앨리스는 입을 가리고 눈웃음을 치더니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건 ‘No kids, On the block. 어린이의 입장이 불가합니다.’라고 써놓은 팻말이었다.


“부탁인데 이것 좀 치워주시면 안 될까요?”

“네? 이건 왜...”

“아니, 여기 초등학교 근처인데다 2,3층에 애들 왔다갔다하는 학원도 있는데 좀 그래서요. 이전에는 제가 간섭할 일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저도 의견은 낼수 있는 상황이니까 말씀 드리는 거예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앨리스가 윙크를 했다. 가벼운 눈두덩의 움직임이었지만 마치 도장을 찍는 듯 했다고나 할까. 당장 팻말을 안 치우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불편함을 줄 것 같았다. 게다가 나는 그녀에게 여러모로 수혜를 입고 있지 않은가. 카페에 몰아다주는 손님들, 성형외과 시술 할인 그리고 아직 확답은 못들었지만 설계 발주까지.


카페를 오픈하고 오래 된 건 아니지만 이 팻말을 치우는 건 카페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앨리스도 당장 치우라는 건 아니고 한번 생각해보라는 거니 천천히 생각해봐야겠다. 팻말을 들어 각도를 가게 입구쪽으로 틀었다.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덜 보이는 위치라도 두는 게 건물주에 대한 예의니까.


고개를 들어 앨리스가 가는 방향을 바라보는데 그녀가 가만히 서있다. 몸은 가던 방향이 아니라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팻말을 치우는지 안 치우는지 보고 가려던 것 처럼. 그녀는 양손을 동그랗게 모아 자기 입으로 가져가더니 영화 러브레터의 히로스에 료코 마냥 큰 소리로 외친다.


“그거 촌스러워요! 마치 제 이름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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