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아빠에게 폐렴을 옮기다
"컹컹컹"
처음엔 강아지가 짖는 줄 알았다. 반려견 천만 시대지만 우리 집엔 강아지가 없다.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보니 '우리 강아지'가 고사리 손으로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하고 있다. 체온을 측정하니 다행히 열은 없다.
후두염이 기관지염으로 전이된 터라 어린이집을 일주일 동안 못 보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남편과 내가 아껴둔 연차를 쓰면서 돌봤을 텐데, 유독 바쁜 11월이었다. 남편은 그룹사 시스템을 구축하는 대형 프로젝트에 투입되었고, 나는 10개국에 출시될 신제품 출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 친정엄마를 불렀다. 아이와 할머니를 두고 출근길에 나서는데 남편이 아들 기침소리가 심상치 않다며 계속 걱정했다. 결국 남편이 점심시간에 회사에서 나와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이래서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 직주근접이 중요합니다)
그때 나는 출시 예정인 제품을 가지고 분과회의 중이었다. [*분과회의: 제품 관련하여 각 부문(BM, 연구소, 제조, 디자인)이 모여 협의하는 것] 담당 BM이라 회의를 주도하는 입장이었지만 틈틈이 카톡을 봤다. 질병에 둔한 엄마지만 그래도 그 기침소리는 심상치 않았으니까.
점심을 먹으러 가는 동안 남편에게 전화를 하니 아들과 병원에 도착했다고 했다. 의사 진단을 받으면 바로 전화를 달라고 해놓고 밥을 먹으러 갔다. 회의시간에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정신이 업무와 아이에게 동시에 팔려서 그랬는지 뜨끈한 콩나물 국밥을 순식간에 뚝딱했다. 10분 정도 정신없이 밥을 먹고 핸드폰을 보니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10통 와있다.
'헉'을 외치며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 화를 잘 안내는 남편이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라고 언성을 높였다. 점심도 굶고 아들을 병원에 데려간 남편에게 '밥 먹느라'라고 할 순 없어서 '어, 미안'이라고 말을 짧게 끊었다.
아들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청진을 해보던 의사는 폐 쪽 소리가 굉장히 안 좋다며 역 근처에 있는 영상의학과에 다녀오라고 했다. '폐렴'일 가능성이 높고 입원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폐렴'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남편의 멘털이 붕괴되었다. 멘털을 조금이라도 붙잡으려고 나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때 난 콩나물 국밥 삼매경이었다.
점심식사 메이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택시를 탔다. 병원에 도착하니 마침 아들과 남편이 진료실에 있었다. 화면에는 X-ray화면이 띄워져 있었다. 검정 바탕에 하얀 갈비뼈가 도드라져 있고, 곳곳에 장기가 보였다. 진료실 분위기는 매우 심각했지만 나는 어째 아들이 X-ray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렴 위험이 있는 화면을 보고 "귀엽다"라고 하다니. 나도 정말 정신없는 엄마인 것 같아 고개를 도리도리 돌리며 정신을 차렸다. 옆을 보니 미간에 주름이 잔뜩 가있는 남편과 공룡 X-ray를 찍었다며 신나 하는 아들, 그리고 묘한 표정의 의사가 있었다.
의사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소리는 굉장히 나빴는데 X-ray를 보니 생각보단 염증이 덜하다는 거였다. 요즘 마이코플라즈마 폐렴이 유행 중이라며 그 폐렴과 관련된 항생제(마이크로 라이드계)를 처방해주셨다. '항생제'라는 단어에 내 동공이 흔들리는 걸 포착한 의사 선생님은 "항생제는 절대 임의로 끊으시면 안 됩니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네네 알겠습니다.
우리 아이가 폐렴이라니. 남편도 나도 한 번도 폐렴이 걸려본 적이 없다. 주변 동료들 가운데 아이가 폐렴이 걸려서 입원한 경우는 많이 봤는데, 아이와 부모 모두 엄청나게 고생했다. 다행히 폐렴 초기에 발견되고 열이 없어서 입원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폐렴'이라는 단어가 주는 공포는 엄청났다.
결과적으로 아이는 진단 5일 만에 쾌차했다. 의사의 처방대로 약을 잘 먹이고 홍삼, 생강청, 배 도라지청 등 기관지에 좋다는 모든 식품을 다 먹였더니 금방 나았다. 불안했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주일 내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는데.
겨우 한숨을 돌리는데, 이제 남편 차례였다. 아이 완쾌로 오랜만에 숙면에 취했는데, 누군가 내 얼굴을 톡톡 친다. 옷을 단단히 챙겨 입은 남편이 앞에 있다. "나 잠깐 병원 좀 갔다 올게."를 속삭이며 나간 남편. 새벽에 기침을 했는데 가래에 피가 섞여 나왔단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보니 폐 소리는 괜찮았다고 했는데, X-ray와 CT를 찍어보니 심한 폐렴이었다. 같은 종류의 폐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들-남편 순서로 걸린 것 봐서는 전염이 된 듯했다. 아니, 어른도 폐렴 걸리는 거였어? 건강한 30대 남자가? 검색을 해보니 종종 자녀에게 전염되는 부모도 있는 것 같았다.
남편은 바로 병가를 내고 쉬고 있다. 입원을 해야 할 수도 있는 상태인데, 미열이 있는 걸 제외하고 컨디션은 괜찮다고 했다. 잠잠했던 마음속 쓰나미가 다시 치고 올라왔다.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괜찮아"를 말해주던 사람이 아프니, 속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다.
오전 내내 남편에게 연락했다. "약은 먹었어?", "응", "항생제 주사는 맞았어?", "응". 질문세례를 쏟아내는 내가 신경 쓰였는지 "여기 의사, 간호사 다 너무 친절하다"라고 말을 돌리는 남편. 지금 친절한 의료진 칭찬할 때냐고 하고 한마디 싶지만, 상대방을 안심시키고자 하는 당신 마음 모르지 않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이 글을 쓰는 순간, 내 기침소리에서도 뭔가 동물의 향기가 난다. 설마, 다음은 내가 아니겠지...
ps. 다들 건강 조심하세요. 폐렴, 독감 돌고 있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