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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Nov 29. 2019

나쁜 선배들에게 책선물을 한다면

굳이, 굳이 선물할 일이 생기면 이 책을 주세요


사회생활하면서 좋은 선후배를 훨씬 더 많이 만났지만, 요즘처럼 날씨가 추워지고 뒷목이 뻐근해지면 날 괴롭혔던 나쁜 인간들이 떠오른다. 이 나쁜 인간들의 특징은 강약약강(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함)은 기본이고 상대방이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하는 소시오패스 성향을 가지고 있다.


사회 초년생 때 유독 이런 인간들과 많이 부대꼈는데, 울기도 많이 울었고 투서도 쓰고 별 짓을 다 했다. 가장 심하게 괴롭힌 인간에게는 근로기준법을 복사해서 책상 위에 올려두기도 했었다. 그래도 별 소용은 없었다. 평생 그렇게 살아온 인간이 내가 내민 종이 쪼가리 하나로 바뀔리가 없으니.


연차가 쌓이고 회사에서 자리를 잡아가면서, 하나 깨달은게 있다. 나쁜 인간들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절대 안된다는 것. (괜히 울었다) 약한 먹이를 보면 벌떼처럼 달려드는 게 그런 인간의 본능이다. 이런 인간들을 만나게 되면 나는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단단하고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는 걸 알려줘야 한다.     


몇가지 방법을 쓰다가 책 선물을 해봤다. 생각보다 효과적이었다. '나 좀 그만 괴롭혀요!'하고 백마디 하는 것보다 지금 나의 감정과 생각을 응축 해놓은 '남의 말'을 인용하는게 훨씬 효과적이었다. 내가 선물해본 책 몇권을 공유해본다.





Level 1. 90년생이 온다 [임홍택]

 

- 선물 받으신  : '나때는 말이야' 선배

이 분은 주변에서 흔히 볼수 있는 수준의 꼰대 선배다. 라떼는 말이야 (Latte is horse!)를 입에 달고 살면서 요즘 아이들은 근성이 없고 책임감이 없다는 말을 하고 다닌다.

- 이분에게 브런치가 낳은 최고의 작가 임홍택의 '90년생이 온다'를 선물했다. '이건 선배님이 좀 보셔야 할 것 같아요'같은 자존감을 건드리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이거, 요즘 핫한 베스트 셀러인데 선배님 같은 New팀장이 보면 조직관리에 도움이 되실 거에요!'하면서 줘야한다. '선배님 같은'을 '선배님처럼 멋진'으로 자체해석한 그는 눈을 반짝거리며 책을 받아들었다. 책을 선물하고 그 다음 월요일, 책에 대한 소감을 물으니 '어, 재...재밌더라..'하며 내 눈을 피했다. 기분탓인지 '라떼는~'도 약간 줄어들었다.



Level 2. 보통의 존재 [이석원]


- 선물 받으신 분 : 학벌로 돌려까는 선배

나도 나쁘지 않은 대학 나왔는데, 가끔 학벌로 돌려까는 사람이 있다. 그 대학에서 어떻게 우리 회사에 들어왔어? 이 정도는 직설적이니 받아칠 수도 있다. 심기가 불편할 때는 지능적으로 돌려깔 때. 요즘 신입사원들 스펙이 대단한데 신입사원 중에 필자의 모교도 있다면서 신기하다는 그. 선물했다. 이석원의 보통의 존재.

- 노오오란 책을 받아든 선배의 표정은 O.O 이런 얼굴이었다. 태어나서 책선물은 처음 받아본 사람 같았으니 특별부록으로 한 부분을 낭독해드렸다.

 

『 여기는 수족관. 
28인치 평면 티비만한 작은 수조 안에 깨달같이 작은 해파리들이 저마다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나는 친구에게 유난히 활발한 몸짓을 보이며 물속을 부유하고 있는 한 녀석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저 위에서 보면 결국 이런 것일 거야. 이렇게 작고, 단지 여러 개체 중의 하나일 뿐인 아무 것도 아닌 삶." - p.76 』


잘 들었지? 이 해파리야. 하는 표정으로 책을 내려놨다.



Level 3. 이 인간이 정말 [성석제]

 

- 선물 받으신 분 : 사사건건 잔소리 하는 선배에게.

내가 잔소리하고 싶게 생겼는지 어떤지 모르겠는데, 옆자리에 누군가 앉게 되면 나의 용모, 화법, 스타일에 대해 많은 잔소리를 해댄다. 사실 이런 선배들은 나쁜 선배라기 보다는 17차원을 넘나드는 오지라퍼라 귀여운 수준.

- 성석제 작가의 '이 인간이 정말'. 그가 나에게 잔소리를 할때마다 하고 싶은 말이다. 표지가 꽤 귀여우니 본 의도를 들키지 않을 수 있다. 안에 단편소설이 여러개 수록되어있는데, 우리네 인생의 사소한 순간들이 잘 담겨있다. 단점은 이 소설을 읽고 더 세세하게 나에게 잔소리를 할지도...



Level 3-1. 1인용 식탁 [윤고은]


- 선물 받으신 분 : 매일 같이 밥을 먹자는 상사

- 누군가 좋아하는 작가를 물으면 무조건 '윤고은'을 외친다. 그녀의 소설은 기발하지만 허황된 부분이 없고 깊이가 있다. 1인용 식탁은 도입부부터 시선을 휘어잡는다. 쨉을 날리는 경쾌한 문장과 스토리를 따라 가다보면 '혼자 밥을 먹는 법을 알려주는 학원'이 등장한다. 


『  강사의 말은 요령이라기 보다는 공식에 가깝고, 공식이라기 보다는 주문에 가까웠다. 주말보다는 평일을,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보다는 그 사이 시간대를 공략하라. 정 가운데 테이블보다는 귀퉁이를 공략하라. 바 형태의 좌석도 좋다. 외투나 가방을 맞은편 의자에 얹어둬라. 

이런 모든 요령들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것이었다. 시선을 초월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가야할 방향이긴 하지만, 당장 힘들다면 일단 시선을 마주치치 말라. 내가 그들을 쳐다보기 때문에, 그들도 나를 쳐다보는 것이다. 내가 보지 않으면, 누가 나를 쳐다보는지도 알 수 없으리니. - p.18 』


얼마나 친절한가. 상대방이 선물의 포인트를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밑줄이라도 그어 주고싶다.  앞으로 밥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혼자 잘 드시길.  



Level 4.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 선물 받으신 분 : 굳이 설명 안해도 되죠?

- 인간 대우를 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줬다. 후배의 성과를 가로채고, 사건이 터지면 후배를 사지로 몰아넣은 사람의 '생일'을 맞아 선물했다. "일본에서 엄청 유명한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의 소설입니다. 세계문학전집에 실린 글이에요. 2차 세계대전 전후 일본에 대한 묘사가 탁월해요."라고 포장을 해서 주긴 했다. 선물 받은 의미를 알았을지는 의문이나 어쨌든 통쾌했다. 그 책이 그에게 있다는 자체만으로.  


『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 p.131 』



Level 5.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 선물을 아직 한적이 없다. 할 일이 없길.

- 사실 간절히 주고 싶은 사람이 있긴 있었다. 입사 초년생 때 만났던 상사인데, 'Little much'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 분. (네, 좀 많이) 어떤 결과물을 가져가도 쌍시옷 음절로 맞아주던 그분에게 드리고 싶었던 책이었다. 너무 직관적인 책 제목이라 선물하진 못했지만(사실 그에게 돈을 쓰고싶지 않음), 그와 밥을 먹으면서 직장동료끼리 칼부림이 났었던 사건에 대해 웃으면서 말하긴 했었다. 아주 소심하게.  





됐고, 이 인간 때문에 돈쓰기 싫고 짜증만 나면 요즘 탐독하는 소설이 있다고 하면서 이 소설을 링크를 공유하자.


현진건 [운수 좋은 날] 

- 너에게 하고싶은 말:  이 오라질X!



이런 인간들하고 잘 지내려고 노력 할 필요 없다. 업무적으로만 대하되, 선을 점점 넘으려고 하면 가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응축한 책을 찾아 선물해보자. (빌려줘도 되고). 책의 힘은 항상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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