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중요한 건 없어. 너무 이기적인 말일까?
34세.
유치원. 아니 그 이전 피아노 학원으로 시작된 나의 사회생활은, 바야흐로 20년 여 년 차.
생각해 보면, 어느 시절이든 크고 작은 문제들이 존재해 왔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시간이 지나가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을 가슴에 품고 내내 끙끙 앓곤 했었다.
지금 나의 직장은, 20대 후반부터, 지금 30대 중반까지. 어떻게 보면, 나의 “리즈”시절을 함께 흘려보내며 같이 성장해 온 나의 분신 같은 곳이다. 구석구석 어느 곳에나 나의 손때가 묻어있는 나의 사랑스러운 나의 직장. 나의 모든 것을 갈아 넣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새로운 “대가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나는 셰프로서, 남들보다 조금 빠른 손과 남들보다 조금 빠른 눈치(센스)로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해 왔고 별다른 탈 없이 조직에 순응하며 살아왔다. 어쩌면, 셰프를 하려고 태어난 사람인 듯, 이 모든 것이 나의 체질이라고 생각했던 나날들이 어언 10년. 그러던 어느 날, 6년간 손발을 맞춰오던 헤드 셰프가 개인 사정으로 퇴사를 하게 되었고, 그렇게 나의 암흑기가 갑자기 찾아왔다. 새로운 “대가리”의 첫인상은, 글쎄다.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무언가 자유로워 보이고 호탕해 보이는, 하지만 전문성은 없어 보이는 그 가벼운 캐릭터가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다. 첫인상은 그대로였다. 나의 상사로 모시기엔 너무나도 모자란 그. 였다. “모지리 대가리”그는, 실력도 책임감도 눈치도 없는 꼰대력 만렙의 슈퍼 게으름뱅이였다.
“하.. 어쩌다 나에게 이런 시련이..” 지난 6개월간, 나의 많은 노력과 고생에도 불구하고 그는 1도 나아진 것이 없었으며 그렇게 나의 스트레스 지수만 올라가고 있었다. 지난 10년간, 이런 상사는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더욱더 피곤해져만 갔고 그는 내가 피곤한 만큼의 실적을 그의 커리어로 쌓고 있었다. 참고 참고 또 참았다. ‘호주’라는 나라의 특성상 나는 늘 이방인일지도 모른다.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회사는 내게 주요직을 영원히 맡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기가 한국이었다면, 내가 오지(호주인), 아니 코지(이민 2세대)였다면. 수천 번, 수만 번 생각해 보았다. 지금 이 순간의 문제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되겠지만, 지금 당장 괴로워서 미칠 것 같았다. 남편과의 수많은 싸움보다 지금 이 싸움이 더 힘들고 괴롭고 어려울 만큼.
나는 점점 더 피폐해졌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잠도 이루지 못했으며, 몸도 이곳저곳 아프기 시작했다. 7년간 3일 쓴 병가를 10일 연달아 쓰게 되는 기록도 세우게 되었다. 정신과 상담도 받기 시작했으나, 답답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한국으로 돌아갈까? (돌아가도 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사실, 그것이 더 괴로웠다.)
답답한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일주일, 병가를 내었다. 일터를, 대가리를 생각하면 숨이 조여 오는 상황까지 왔다.
첫 며칠은 나는 살아도 죽은 사람 같았다. 그냥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세상이 나한테 왜 그러는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끝나지 않는, 답도 없는 생각을 하루 종일 했다. 사춘기 때도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는데.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병가를 내서 자유시간은 생겨났는데, 나는 어디에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냥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의 일터는 나 없이 잘 돌아가고 있는지, 물품 주문에는 이상이 없는지 체크를 했다.
나는 안다. 어떤 곳이든,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간다는 것을. 굳이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직업 특성상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속에, 그 이치를 아주 일찍이 깨우쳤다. 그럼에도, 나는 내 사랑하는 일터를 놓지 못하고 남몰래 스토킹 했다. 스토킹을 하다가, 티브이를 보다가, 유튜브를 보다가 의미 없는 며칠이 지나갔다. 나 없이 일하고 있을 팀원들에게, 고래싸움에 등 터지고 있을 나의 새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몇 차례의 인사과와의 만남은, 지난 7년에 대한 회의감을 가져다주었고 회사에 대한 로열티마저도 앗아갔다.
쉬는 동안 나는 결국, 이직을 결심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배울 것도, 애정도 남지 않은 나의 일터에 남아있기에는 “나 자신”에게 너무 미안했다. 나에게 명쾌한 방향을 지시해 주지 않은 인사과의 행동도 나의 결정에 한몫했다. 나에게는 나 자신이 더 소중하다. 나보다 더 소중한 건 없다.
그래. 그만둬 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