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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 Sep 09. 2022

내 가족에서 당신들을 지웠습니다.




평생 끊어내지 못할 것 같던 내 부모라고 하는 사람들을 끊어버린 것은 아빠의 죽음과 장례로 무너지는 마음과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외할머니에게 전화통화를 하면서 내가 앞으로 가야 할 방향과 이 사람들은 나와 길이 정말 다르다고 절실히 깨달아 이젠 함께 전처럼 하하호호 즐겁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가득했을 때였다. 당연히 내 친아빠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언급할 수 없는 일급비밀이다. 그러나 말하지 않고 들려오는 따뜻한 말에 조금이라도 안도감을 얻고 싶어 한 전화는 상처로 끝났다. 내 전화를 받은 할머니가 밥 먹었냐는 그 흔한 질문도 하지 않고 그저 살 빼라는 말만 반복했다. 큰 사촌오빠 결혼식 때 다이어트에 성공해 나타난 모습이 정말 예쁘다며 앞으로도 그 기세로 살을 빼 어릴 때 얼굴을 찾으라고 하셨다. 평생 나에게 몸매와 얼굴을 지적하며 먹던 밥도 못 먹게 해 서러움을 얻었던 기억이 떠올라 씁쓸했다. 할머니야 뭐, 항상 한결같았다. 자식, 손자 손녀 그 누구에도 살 빼라고 하시는 분이니 그러려니 하려 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나와 갈 길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유가 할머니가 큰 이모 왔다면서 대뜸 끊어버렸다. 서울에 살면서 얼굴 볼 일이 많지 않은 손녀, 유일하게 할머니에게 사랑 표현을 아까지 않는 나에게 위층에 사는 큰 이모가 내려왔다고 끊자고 하더니 진짜 끊어버린 것에 대해 헛웃음이 터졌다. 외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늦게 부재를 느끼고 후회할까 봐 할머니에게만 번호를 알려주고 꾸준히 사랑 표현을 했다. 처음에는 빈 말로 시작했지만 나중엔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이야기했다. 내 슬픔과 아픔을 공유할 수 없어도 그저 사소한 말에 위로받고 싶었는데 그리 통화를 끊어진 전화를 보고 불연 듯 연락을 끊어도, 다시는 만나지 않아도 후회라는 것을 안 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러던 중 들은 이야기와 내가 마주한 진실에 부글부글 끓어오는 분노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전화번호를 바꿔 영원한 이별을 할 수 있기를 기다렸다.


영원한 이별을 생각하기 전 나는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 있었다. 아빠를 잃고 후회한 긴 시간 동안 후회하지 않기 위해 부모라고 하는 그들에게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내가 해줄 수 있는 일들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처음엔 그래, 후회는 남기지 말자 생각하다 내가 왜 후회할 거라고 여기지? 역질문이 떠올랐다. 혹시나 후회할까 그들과 가족사진을 찍고 매번 나만 약속을 잘 지키는 게 합당할까? 질문에 내 마음 깊이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넌 절대 후회하지 않아. 혹여 내가 연락을 끊고 살다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해도.”


단호한 목소리가 울리기 전 내 뇌리에 스쳐 지나간 시간들은 고통이자 괴로움이었다. 살아온 동안 매일 엄마에게 저주 섞인 말들을 들었다. 당연한 것처럼 엄마가 인신공격해 아프고 힘들고 매일 자신의 일을 해주지 않으면 내 일까지 방해할 만큼 수십 통의 전화와 문자로 날 괴롭혔다. 이제는 때리지 않지만 정신적 폭력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늘 방해하고 긴장하며 지내면서 날아오는 문자 하나에 여지없이 무너지며 흔들려 우울에 빠져 울었다. 4월 마지막으로 내려간 광주에서 엄마는 길에서 내게 욕설을 던지며 고함을 쳤다. 사람들이 쳐다봐도 모욕적인 말을 던지며 싫다는 날 잡고 늘어졌다. 서로 차갑게 인사 없이 돌아서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역까지 택시 타고 갔다. 택시 안에서 벚꽃이 흔들려 예쁜 하늘을 보며 이러려고 시간을 쪼개서 온 것이 아니라고 가는 그 길에 눈물을 흘렀다. 아무리 닦아내도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 전에도 엄마 때문에 힘들어 광주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내내 창문을 보며 눈물을 훔쳤야 했다. 이제는 지긋지긋한 이 굴레를 끊어내고 싶었다. ‘나’는 그 가족에 속하지 못했지만, 내가 내 가족에 그들을 속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돌아가지 않기 위해, 다시는 악몽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날 지켜주지 않았고 내 가족이 될 수 없다. 내 가족은 돌아가신 아빠 말고는 더는 없다. 그리 마음먹고 친한 동생의 아이디어로 철저하게 준비했다. 연락처를 바꾸기 전 말 안 통하는 엄마 말고 그나마 생각이라는 것을 할 계부에게 보낼 장문의 문자를 작성했다. 내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단단하고 안정적일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그때가 온다면 연락을 꼭 하겠다고 하며 내 이름처럼 살아갈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풀어서 적었다. 매일 이 문자를 보내고 연락처를 바꿀 생각만 하며 의절할 시기를 노렸다. 목요일 부고 문자가 온 후, 고모에게 들은 것은 엄마가 아빠를 괴롭혀 헤어졌다는 대략적인 이야기에 충격을 받고 금요일 상담사에게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방향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면서 마음을 굳혔다. 새벽에 번호를 바꿔 준비해둔 문자를 보내려 했지만, 번호 변경이 적용되는 시간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결국 금요일 변경 가능한 시간에 원하는 번호를 정하고 변경하기 버튼을 누르기 전 문자를 보냈다. 몇십 번을 읽고 고친 내용이기에 아쉬움도 없다. 보낸 후 빠르게 변경하기를 눌려 바꿨다. 방패막 하나를 던지고 천천히 모든 것들을 끊어냈다. 또 엄마가 당연하게 여기며 교회에 연락할까 봐 교회도 더 이상 나가지 않기로 마음 단단히 먹고 교회 사람들에게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고 끊어버렸다. 내 대부분의 연락처가 교회 사람들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도 남기거나 내 자취를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생각할 만한 내 발자취를 끊고 세상과의 단절을 선택했다. 지금 세상과 단절한다고 영원히 단절은 아닐 것이다. 내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 많아 언젠간 또 다른 길을 개척하면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이라 믿었다. 아빠의 장례가 치러지고 사망신고가 되면서 상속 문제 해결하기 위해 변호사와 많은 통화를 나눴다. 아빠의 상속, 의절한 부모와의 문제에 대해 미리 질문을 남겨 3시간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자세한 답변을 들었다. 가족의 연을 법적으로 조치할 방법은 없으며 그들에게 있는 자산과 채무에 대해 미리 포기할 수 없고 그들이 죽어 후에 알게 되면 그때 진행이 가능하다고 변호사는 이야기하셨다. 추가적으로 접근금지에 대해 물었는데 명백하게 학대가 진행 중인 증거가 없다면 접근금지를 할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 아쉽지만, 그것으로 알겠다고 어쩔 수 없구나 싶었다.


연락을 끊고 지내면서 청년 주택에 지원하면서 계부에게 받은 보증금이 생각나 그 돈을 돌려주며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다. 어떻게 복수해야 그들에게 타격이 갈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동안 받은 아픔을 A4에 적어보기도 하고 적당한 방법도 찾아봤지만 내 주소, 연락처를 알리지 않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500만원정도 되는 보증금을 등기로 보내? 그건 말이 안 됐다. 그렇다고 이체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복수심이 강하게 남은 내가 달랑 이체만 한다고 생각하니 용납되지 않았다. 이력이 남기고 싶지 않았고 혹시라도 엄마라는 그 사람이 가족관계 증명서를 내밀며 내 계좌를 알아내고 어떤 식으로 나에게 뒤통수칠까 예상하기 어려웠다. 매일 고민하다 상담사와 얘기를 나눴을 때 그건 아닌데 하시는 표정을 보게 됐다. 딱히 어떤 말을 덧붙이지 않지만 반대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 뒤에도 계속 어떻게 복수할지 매일 생각하고 고민하다 불현듯 왜 항상 나만 약속을 지키려 하는 걸까? 한 번도 그들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거나 지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아빠가 원하는 내 모습은 이게 아닐 텐데 싶었다. 설령 복수가 성공적으로 됐다고 해도 그 뒤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내가 다치지 않을까?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럼 복수가 아니라 나를 궁지로 몰아넣는 일이구나 싶어 결국 나만 다치고 아플 거라는 판단이 섰다. 꼭 돌려주기로 약속한 500만원은 앞으로 내가 살아가면서 쓰게 될 많은 병원비와 상담비 그리고 25년 6개월 넘게 받은 상처에 대한 얼마 안 되는 정신적 피해보상금 정도 생각하기로 결정했다. 이 생각을 상담 때 말을 했는데 상담 선생님은 잘 생각했다고 오히려 그게 본인을 지키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라고 이야기하셨다. 나는 이미 나쁜 년으로 남아 있는데 여기서 더 나쁘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들의 오랜 횡포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꼈다. 이기적이다, 나쁘다 생각할 수 있지만 한 번쯤은 이 정도로 뭐 얼마나 이기적인가 생각이 들어도 매번 양보하고 포기하고 실망하고 하는 것보다 나도 나만 생각해 이기적이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7월이 되고 나는 건강 문제로 대학병원을 갔는데 과거 수술내역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광주에 조용히 내려간 적이 있다. 가기 전 혹시나 병원에서 일하는 작은 엄마나 작은 아빠를 만날까 무서워하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씩씩한 척하면서 조심히 광주에 잠깐 있었을 뿐인데 다녀온 며칠 동안 끔찍한 우울을 앓고 동공이 풀린 채 상담사를 만났다. 상담사는 엄마를 마주친 것도 아니고 누구도 만나지 않고 서류만 떼고 서울에 얼른 복귀했음에도 과거 엄마에게 휘둘렸던 것처럼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안쓰러워하셨다. 광주를 갔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지긋지긋한 깊은 우울을 10일 동안 앓았을 때 연락을 끊고 산 것에 대해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라 했던 그들을 끊고 동생의 연락처도 지워버리며 완전한 해방을 한 나는 지금 많은 것이 달라졌다. 눈의 생기와 힘이 느껴지고 여유로워져 자신감도 넘쳤다. 작은 일에도 넘어져 심한 자책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나는 그들을 가족 명단에 지운 순간부터 안 되는 일에 매달려 실패했다며 슬퍼하거나 상처받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아 나름대로 재미있게 살아가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 움직이니 좋아하는 것이 잘하는 일이 되었고 원하는 것을 따라 마음이 가는 곳을 따라갔다. 아빠가 떠나 나 홀로 남았지만, 내겐 고모와 내 장난에 장단 맞춰주며 웃어주고 날 소중하게 여기는 사촌오빠가 있다. 결정적으로 난 내 아픔을 꺼내 글로 표현하면서 수 차례 검토를 하고 보니 그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내가 행복할 권리, 사랑받아야 하는 기본적은 것들을 빼앗아 억압했고 가혹한 짓을 했는가 되새기게 돼 아닌 것에 대해 나를 지키기 위해 단호하게 거절할 힘이 생겼다.


내가 이 이야기를 쓰고 받은 디엠이 있다. 나에게 힘이 있다고 하시면서 내 글이 나중에 같은 아픔을 겪은 이들에게 큰 힘이자 희망이 될 거라는 내용이었다. 그 디엠을 읽고 마음이 벅찼다. 감사했고 내 작은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힘이 될 거라는 말이 감사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최선이자 힘이 되고 싶어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 같다. 혹시 이 이야기가 퍼져 외가나 그들에게 발견됐을 때에 대해 고민한 적도 있다. 상담사는 내가 준비하고 있는 일들을 듣고 지금 글을 쓰고, 새로운 방향으로 가고 있는 길에 그들이 알게 되는 것에 대해 무섭지 않냐고 질문하신 적 있다. 나는 내 고민에, 그 질문에 표정 변화 없이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내 등본을 뗄 수 없다. 내 가족관계에 계부는 포함되어 있지 않아 애초에 자격이 없으며 엄마라는 사람은 열람 못 하게 막아놨고 동생은 내 허락, 위임장 없이는 열람하고 뗄 수 없다. 그래도 설령 찾아온다면 열어주지 않고 경찰을 부를 것이며 더 이상 그들은 나의 가족으로 있을 수 없으며 내가 아프고 다치는 것에 참지 않고 방관하지 않겠다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떠나간 아빠를 품고 산다. 만날 수 없고 자주 유골함이 있는 그곳에 찾아갈 수 없지만 아빠에게 던지고 싶었던 말이자 아빠가 내 아픔과 슬픔을 알았다면 해줬을 이야기를 팔에 새기며 매일 보고 다짐한다. “I wish to set you free.” 아빠와 나의 이니셜이 같아 신중하게 찾고 고른 타투 레터링이다. 영화 알라딘에서 ‘네가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어.’ 알라딘이 지니에게 마지막 소원으로 썼던 문구였다. 나와 아빠가 살아온 시간에 적합했다. 난 아빠에게 삶의 무게에서 이제는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쓰고, 아빠는 내게 이제 아프지 말고 슬픔에서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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