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하는 것에 대한 소감

오랜 로망과 소원을 성취했다

by 시즈 SYES

250617 작성한 글 정리하여 업로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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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연선흠베이커리라는 대전 빵지순례 중 하나의 장소에 와있다. 맛있다는 말은 예전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맛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사실 한 두 달 전에 애들 데리고 한번 온 적은 있다. 첫째를 차에 태워 어린이집으로 가 둘째를 픽업한 뒤 둘을 데리고 함께 차로 10분 거리인 이곳에 들렸다. 둘째가 빵을 보자마자 달라고 울고불고하는 바람에 허겁지겁 몇 개만 담아 계산하고 집에 돌아왔기에 그 맛과 분위기를 잘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어찌 보면 오늘은 육아휴직의 마지막 날이다.

공식적으로 다음 주부터 나는 가게에 투입될 예정이다. 둘째를 출산하는 전날까지 남편 가게에서 일손을 거들었는데 아이를 키우고 어린이집에 보냈으며 적응 기간(이라고 쓰고 항생제 달고 사는 시기라고 읽는다)을 거쳐 안정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알바 한 명이 이번 달 말일까지 하고 관두겠다고 했던 터라 좋은 타이밍이라 여겼다.


둘째는 23년 9월 말쯤 출산 예정이었다. 그해는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아이를 뱃속에 품고서 2월 말에 이사를 했고 3월에 큰 아이가 초등 입학을 했으며 6월에 가게를 오픈했다. 오픈 초반이라 남편을 돕기 위해 점심 장사 후 하교한 큰 아이를 데려와 마감까지 함께 가게에 있었다. 일이 우리가 계획한 대로 얼추 진행되고 있었기에 신이 났지만 만삭이 다가올수록 몸이 닳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순 없었다.


하필 그날은 브레이크 타임에 바빴다. 근처 돈가스집에서 밥 먹을 때 빼고는 거의 앉아있지 못했다. 아직 일이 손에 익지 않아 모두가 허둥지둥하는 시기였다.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고 저녁 오픈을 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아래에서 주르륵 무언가 흘렀다. 양수가 터진 것이었다. 맙소사, 출산일은 아직 6주 하고도 삼사일 가까이 남아있는데. 순간 전등불이 흔들렸지만 정신을 바짝 차렸다. 양수가 터지면 24시간 안에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했다. 정신 차려!


가게를 총괄하던 남편은 일단 가게를 지키고, 일을 도와주고 있던 남동생이 나를 차에 싣고 산부인과로 달렸다. 평소에 다니던 산부인과에 담당 의사는 퇴근 뒤였고 당직으로 있던 선생님이 초음파를 간단히 보고는 밖에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양수가 터진 나를 복도에 세워두고 한참을 대기시켰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간호사에게 지금 양수가 터져서 급하게 왔는데 소파가 젖을까 봐 못 앉겠다, 앉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간호사는 시큰둥하게 방수패드를 건넨 뒤 휘리릭 사라졌다.


그러고 조금 있다가 의사가 나를 불렀다.

"아기가 2킬로가 안될 것 같아요. 여기서는 이른 둥이 출산이 어려우니 OO대나 XX대 응급실로 가셔야 할 것 같아요."


뭐야, 까다로운 분만은 안 받는 건가? 아니면 위험 부담을 안고 가진 않겠다는 건가?

이른둥이 케어가 힘든가? 양수 터진 일이야 흔하고 응급상황도 아닌데?


조리원과 소아과가 붙어있는 꽤 큰 산부인과였다. 뻥친 표정으로 아, 그래요 그렇군요를 연발하며 가만히 있었다. 아직 미혼인 남동생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대답을 기다렸고 잠시 침묵이 지나갔다.


"제가 충대 병원에 아는 의사가 있으니 지금 가능한지 한번 전화드려볼게요.'


생명수라는 게 이런 것인가? 산부인과 도착 후 불안하고 서글펐던 시간이 그 한 마디가 말끔하게 씻어주었다. 통화하는 동안 밖에 나와 또 대기, 그리고 곧 우리는 OO대 병원 응급실로 달려갈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응급실을 떠올리면 생길 수 있는 무서운 상황들이 우리들 앞에는 펼쳐지지 않았고, 접수 후 동생이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지하 통로를 따라 소아병동에 있는 산부인과로 갈 수 있었다. 나의 무사 안착을 도와준 동생은 다시 가게로 향했고 남편과 바통 터치를 한 뒤 가게 마감까지 마무리해 주었다.


큰 아이를 어머님 댁에 보내두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온 남편과 병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양수가 빠진 배는 아이의 굴곡 그대로 고스란히 배 위에 드러났다. 아이의 움직임이 보일 정도라서 괜히 ‘복동아’ 부르며 콕콕 찔러보기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다가도 깨서 아이가 움직이는지 확인하던 그날 밤도 성실하게 지나갔고 다음 날 오전 수술로 2.08kg의 둘째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큰 아이는 8살이었다. 엄마 없이는 못 자는 초등학교 신입생이지만 가게 오픈일부터 스스로 학교 등교하겠다며 씩씩하게 혼자 나가던 아이였다. 날짜를 미리 잡거나 맞춘 적이 없는데 이렇게 제가 제 속도에 맞추어 알아서 척척 세상을 향해 나가기 시작한 하나뿐인 딸은 이날부터 두 딸 중에 ‘큰’ 딸이 되었다. 큰 아이가 태어나던 날, 그 순간을 눈에 담고 싶어 잠들지 않았고 덕분에 처음 만나는 순간 인사를 할 수 있었던 내 아기. 내 가슴 위에 웅크려 앙앙 울던 아기가 ‘둥둥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바로 울음을 뚝 그쳤던 내 첫 아이는 이제 언니가 되었다.



이후 대학 병원에서 홀로 입원해 있었다. 첫날에는 눈물이 광광 났다. NICU에 있는 둘째는 주 2회밖에 면회가 안된다고 했다. 몸도 나달나달 한 데다가 작은 아이도 제대로 못 보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내 끼고 살던 큰 아이도 영상 통화로 얼굴을 마주하자니 울음이 펑펑 솟아올랐다. 정확히 출산 둘째 날 오후가 되자 그 눈물은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드디어 가슴팍에 신호가 오던 내 가슴 덕분이었다. 남편은 가게를 챙겨야 하니 주말에 겨우 큰 아이와 면회를 왔고, 난 열심히 유축을 했다. 첫째도 12개월 완모 했으니 둘째도 해야지, 내가 내 몸소 줄 수 있는 것은 모유뿐이다 여기며 열심히 유축량을 늘렸다.


대학병원에서 2.08kg으로 태어난 아기는 NICU에 있는 동안 1.86kg이 되었다가 21일 만에 1.98kg으로 퇴원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집에서 친정엄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충분히 회복할 수 있었다.


그때 이후로 집순이로 산지 벌써 22개월이 되었다.

허벅다리가 너무도 얇아서 잡기조차 미안할 만큼 작았던 내 두 번째 아기는 뒤도 안 돌아보고 어린이집 문턱을 넘어가버리는 아기 중에 큰 아기가 되었다. 이제 엄마 하지 마, 바다거북 좋아, 춘삼이 왔네? 하며 문장을 말한다. 언니 물건이 갖고 싶거나 투닥거리다가 제멋대로 안되거나 속상하면 '엄마, 언니언니!' 하며 뛰어와 고자질도 하고, 잠들 때는 '언니 손 잡고~' 라며 언니 옆에 함께 자려고 한다.

아직 곁에서 자고 싶어 하는 큰 딸은 강요 아닌 강요로 동생이랑 자라는 엄마에게 매일 밤 틱틱거리고 있지만, 사실 두 딸이 나란히 함께 자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내 오랜 로망이었고 소원이었다. 말 그대로 벅차오르는 감동이란 이런 것인가 하며 지내고 있다.



왜 이렇게 좌우, 엎드려 자는 것이야


나름의 복직을 앞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봤다.

그래도 나, 마흔 앞두고 소원 하나는 성취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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