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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영의 Jul 18. 2024

김훈 역사소설의 매력과 불만

-『하얼빈』(2022)의 경우

     김훈 역사소설『하얼빈』(2022)을 읽었다. 내가 역사소설을 즐겨 읽는 까닭은 작가가 역사적 사실을 가공하여 혹은 역사적 사실의 빈틈을 확장하여 허구를 본질로 하는 소설에서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소설『하얼빈』은『칼의 노래』,『현의 노래』,『남한산성』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극한적 상황에 직면한 개인의 파편화된 고뇌를 그린다. 다른 하나는 사실 혹은 사건에 대한 의견보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데 공을 들인다. 전자는 그가 역사의 총체적 인식이나 전망을 신뢰하는 대신 언어가 객관적인 실재를 재현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후자는 실증주의 사학에서 견지하는 것처럼 역사가의 주관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역사적 사실의 기록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는 것을 미덥게 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김훈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이분법으로 구획해서 선명한 갈등구조를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훈은 비루할지언정 죽음보다는 생존을 보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권력에 대한 선망과 무력감, 그리고 생존의 욕망이 그의 무의식에 작동하고 있다.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이토를 죽여야 한다는 대의명분보다 천주교 신자로서 그의 행위가 교리에 어긋난다는 점에 더 고뇌하는 듯 보인다. 아내 김아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아이들 특히 그의 어머니와 함께 하얼빈으로 오지 못하고 명당성당 수녀원에 맡겨진 딸아이에 대해서도, 어머니 조마리아에 대해서도 그는 연민을 드러내지 않는다.『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은 명군의 뜻을 거스르고 일본을 쳐도 명군의 뜻을 좇아 일본을 보내도, 임금은 일본을 막을 장수가 필요치 않은 시간에 그 죄를 물어 죽음을 내릴 것을 그는 예감한다. 그는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낼 수 없었다.”(64쪽)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죽어서 사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현의 노래』에서 ‘아라’가 순장에 처 해질 때 상황을 바꿀 어떤 힘도 우륵은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무력감 속에서 슬픔을 겪는다. 뿐만 아니라 무너져 가는 가야의 운명 탓에 스스로가 ‘더 깊은 지옥’이라고 표현하는 적국 신라로 가서, 대장군 이사부 앞에서 우륵은 “다만 살아서 소리를 내려 하오.”(275쪽) 라고 그 뜻을 밝힌다.『남한산성』에서는 청나라 군대에 포위되어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김상헌과 최명길은 싸우다 화의를 모색할 것인가,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 화의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로 갈등한다.

    『하얼빈』에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데 공을 들이는 대목 중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무엇보다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저격 살해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다. 소설의 서술자는 마치 무심한 목격자인 듯 다음처럼 묘사한다. “러시아 군인들 사이로 두 걸음 정도의 틈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이토가 보였다.…… 안중근은 고요히 집중했다. 손바닥에 총의 반동이 가득할 때 안중근은 총알이 총구를 떠난 것을 알았다. 이토는 곧 죽었다. 이토는 하얼빈역 철로 위에서 죽었다.”(166-167쪽) 

    선명한 갈등구조를 보여주는 그의 서술 전략은 허구로서의 역사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하는 장치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선명하게 드러나는 갈등구조 이면에 자리 잡은 김훈의 정치적 무의식, 곧 계급적 분리다. 김훈은 권력의 허망함과 폭력에 대해『칼의 노래』에서, 선조의 예를 들어 비판하고 있다.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낼 수 없었다. 병신년에 의병장 김덕령이 장살되었을 때 나는 내가 수긍할 수 없는 죽음의 방식을 분명히 알았다. 그때 나는 한산 통제영에 부임해 있었지만 임금이 김덕령을 때려죽인 일의 전말은 바람처럼 전군에 퍼졌다. 군은 나직이 엎드렸다.”(64쪽) 그러나 그 권력의 생산과 작동이 사회적으로 생산된다는 측면을 애써 무시한 채 고립무원에 빠진 이순신이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불가항력의 현실 속에서 고뇌하는 장면만을 클로즈업시키고 있다.  

   『남한산성』(2007)의 세계 역시 철저하게 이분화되어 있는 세계다. 청나라 군대에 포위되어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얼핏 주전파와 주화파의 대결이 주된 갈등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정신세계(=우국의 세계)에 속한 김상헌과 최명길의 갈등과 이념이 결코 아니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엇보다 생존이 더 중요한 문제인 ‘사공’ 같은 민초의 세계와 조정-사대부 간의 대립에 더 주목해야 한다. 김상헌은 뒤늦게 남한산성을 찾아가는 길에 얼어붙은 강에서 그를 안내하던 사공의 목을 벤다.(46쪽) 밤새 강물이 얼어붙으면 밝은 날 청병은 사공의 인도가 없어도 강을 건너올 것이지만, 얼음이 물러서 질척거리면 청병은 사공을 앞세워 강을 건널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김상헌은 “청병이 곧 들이닥친다는데, 너는 왜 강가에 있느냐 묻고, 갈 곳이 없고 갈 길이 없어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 볼까한다”는 사공의 말을 듣고 이것이 백성인가, 이것이 백성이었던가(43쪽) 하고 한탄한다.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그의 행위에 대해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238쪽) 재판장 마나베와 검찰관 미조부치는 “안중근의 범죄는 자국의 영고성쇠와 그 유래에 대한 정당한 지식의 결핍과 이토의 인격과 일본의 국시에 대한 지식의 결핍에서 비롯된 무지의 산물”(239쪽)임을 강조함으로써 안중근의 행위를 한국의 독립을 위한 정치적인 동기가 아닌 무지와 불순한 동기에서 비롯한 살인 행위로 격하하고자 하는 의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소설은 살인하지 말라는 천주교 교리(빌렘 신부)와 국가의 독립을 위한 전쟁(안중근)이라는 또 다른 대립 구도를 통해 안중근의 인간적 갈등과 회오를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그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사실 계급적 분리라고 나는 본다. 

    의병을 일으켰던 신돌석이 결국 배신한 부하에게 살해되었다거나, 이인영이 거사를 일으킨 후 부친의 부고를 전해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후 그의 수하 이은찬이 세력을 일으켰으나 배반한 부하들에게 유인을 당해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죽었다거나 하는 민초의 배신과 관련한 사실들의 전언이 3페이지에 걸쳐(56-58쪽) 기록되어 있다. 의병 참여 주체의 목적과 지향은 주체별로 각기 달랐다. 투쟁의 양상이 국권 회복이라는 현실적 투쟁의 목적 앞에 단일한 대오를 형성했지만, 각자가 생각했던 지향점은 각자의 위치와 조건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의병운동에 투신했다. 그리고 무수히 목숨을 잃었다. 그것이 실패로 귀결되었다 해서 헛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해주에서, 동학군이 마을을 약탈하고 지나가면 관군이 들어와서 동학군에게 식량을 내준 백성들을 잡아갔다. 동학군이 관아를 불 지르고 아전들을 죽이면 아전의 아내가 동학군의 은신처를 밀고했고, 끌려가서 죽임을 당한 동학군의 아들이 밀고자를 죽였다.『하얼빈』에서의 이런 서술은 전형적인 양비론이다. 그때 집안의 어른이 중심이 되어 마을을 위협하는 동학군을 쳐부수었는데, 그때 “열여섯 살 난 안중근이 그 선봉 역할을 했다.”(179쪽) 왜 농민들이 동학군을 조직해서 관아를 불태웠는가 하는 점에 대한 이해의 흔적이란 없다. 

     안중근은 그는 해주 일대에서 일가를 이룬 집안의 남아라는 자부심을 토대로 장부가를 부르며 이토 살해에 나선다. 그렇다 보니 소설에서 안중근이 이토를 죽임으로써 이루고자 했던 그의 이념이 자칫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왕국의 패망보다 오래 지속하게 마련인 민중의 건강함을 김훈은 간과하거나 비릿하게 보고 있는 듯 싶다. 이는 소설에서 김훈은 조선 천주교회의 수장인 프랑스 주교 ‘뮈텔’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김훈은, “황사영은 국가를 제거하려다가 죽임을 당했고, 안중근은 국가를 회복하려고 남을 죽이고 저도 죽게 생겼는데, 뮈텔은 이 젊은이들의 운명을 가로막고 있는 국가를 가엾이 여겼다.”(251쪽)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김훈이『남한산성』서문에 적은 것-“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엄밀하게 말해 객관적인 역사서술이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사회적 맥락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언어를 매개로 한 글에서 작가는 아무 편도 아닐 수가 없다. 그는 무엇보다 생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현의 노래』에서, 무너져 가는 가야의 운명 탓에 스스로가 ‘더 깊은 지옥’이라고 표현하는 적국 신라로 가서, 신라의 대장군 이사부 앞에서 우륵은 “다만 살아서 소리를 내려 하오.”(275쪽) 라고 그 뜻을 밝힌다. 

    소설『하얼빈』의 ‘작가의 말’에서 김훈은, “포수, 무직, 담배팔이, 이 세 단어의 순수성이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등대처럼 나를 인도해주었다.”(303쪽)고 쓰고 있거니와 그가 말하는 ‘순수성’이란 “세상의 그 어떤 위력에도 기대고 있지 않은… 청춘의 언어”(303쪽)인 것이니, 이는 김훈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혐오의 강박을 에둘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역사 허무주의와 연결될 것인데 그에게는 소위 강한 자, 강한 것에 대한 선망, 혹은 힘을 갖지 못한 자의 무력감이 그의 무의식에 깊게 침윤되어 있다. 

   『현의 노래』에서 가야 순장자들의 죽음과 백제 포로들의 죽음은 ‘우륵’의 권력에 대한 선망과 무력감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아라’가 순장에 처해질 때 이 상황을 바꿀 어떤 힘도 우륵은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무력감 속에서 슬픔을 겪는다. 또한 백제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는 신라 장수 ‘이사부’가 평생 꿈꾸고 추구하는 세계란, “거칠고 피 흘리는 세상을 가지런히 정돈해주는 하나의 ‘질서’”다.(141쪽) 이사부가 무자비한 살육을 지속하면서 ‘합리적이고 냉혹한 전투’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질서’를 위해서라는 것인데, 이는『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총에 죽은 이토가 한국에서 이루려 했던 꿈-망상과 다르지 않다. 

    한 개인의 운명이 국가의 시운과 불가분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면서 그러한 상황에서 고뇌하는 인물의 내면을 깊이 있게 그리는 것이 김훈 소설의 매력이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구축하는 서사의 내용이나 문체, 어조가 그의 역사소설들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은 결국 작가의 자기 동일적 세계관의 반영-정치적 무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칼의 노래』에서 그랬던 것처럼『하얼빈』에서도 김훈은 안중근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대신 그가 마주한 상황에서 갖게 된 인간적 고뇌와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가는가에 집중하고 있다. 군더더기 없는 밀도 높은 문장과 섬세하고 구체적인 세부묘사로 독자를 그의 이야기 세계로 흡인하는 데 능한 그의 소설의 매력이다. 다만 ‘있었던 사건’으로서의 역사적 사실 그대로의 재현에서 그는 둘 다(안중근과 이토) 내세우고 지키고 실행했던 이념의 쓸모 없음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다.

   『하얼빈』에서 김훈은 어떤 소설적 진실을 드러내는가. 안중근의 총에 이토가 죽지만, 그래서 안중근의 이념이 얼핏 승리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그는 체포되고 사형선고를 받아 여순 감옥에서 죽는다. 사실의 충실한 제시라는 그의 서술 전략은 선명한 이분법 구도 내부에 양비론적인 태도가 은폐되어 있지 않나 하는 의혹을 남긴다. 안중근이 꿈꾸는 세계와 이토가 꿈꾸는 세계를,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통해 이념의 허무함을 동일한 지점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역사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로서 나는 그것이 못내 아쉽다. 아니 마땅치 않다. 역사소설은 무엇보다 당대의 삶과 현실에까지 힘을 미치는 과거의 현재성을 살릴 수 있어야 그 몫을 충분하게 감당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김훈의 역사소설에서는 니체가 말한 ‘실천적 역사의식’이 부재한다. 아니 김훈은 그러한 종류의 거대담론 자체를 일종의 억압으로 보고 혐오한다. 작가와 독자의 해소되지 않는 불화가 이어지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의 소설을 읽는다. 까닭은 여타의 독자가 그의 소설에 매료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일상적 불안과 경제적 공포 앞에서 그것은 사회적으로 분산되거나 분담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개인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감정이 되고 있다. 김훈 소설의 인물들에게 중요한 것은 대의명분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에의 의지다. 이것은 비루한 삶을 살게 만든 구조나 혹은 실패한 거대담론에 대한 비판이지만 동시에 기존의 현실 변혁 가능성을 부정한 냉소적 허무주의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오직 개인(혹은 가족)의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독자들은 김훈 소설 속 인물과 일체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하니 이러한 현상은 건강한 것이 아니다. 

    김훈의 탓은 아니지만 나는 김훈이 대중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 작가로서 그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다고 본다.『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를 죽인 행위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강조하는 대신 종교적 갈등을 더 많이 부각하는 방식의 서술은 건강한 역사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의 군더더기 없이 밀도 높은 건조한 문체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경지에 있다. 글을 읽고 글을 쓰는 자로서 그것은 몹시 부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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