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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영의 Oct 17. 2024

기념사진

-2024아르코 발표지원 단편소설

          

부스카르(buscar)     


 책방 문을 일찍 닫고 서면 로터리에 갔다. 오래된 식당에서 맵고 뜨거운 돼지국밥을 먹었다. 자주는 아니고, 유난히 허기가 질 때마다 습관처럼 그랬다. 대학가는 봄학기 방학을 맞아 벌써 한산해졌다. 겨울과는 달리 여름 계절학기를 듣는 학생들이 많지 않은 데다 학생회관 안에는 구내서점도 문을 열고 있었다. 대학 정문 앞 가게들 대부분처럼 가을학기가 시작할 때까지 책방은 평소보다 좀 더 일찍 문을 닫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종종 서면 로터리나 광복동 골목과 해운대 바닷가를 밤늦도록 걷다가 지치면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책방 구석 빈방으로 돌아오는 일을 무한 반복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를 것이다. 책방 주인은 이번 방학엔 그동안 처리를 미루었던 결심을 실행에 옮길 것이다. 그의 아버지 때부터 60년 넘게 문을 열었던 책방을 이제 정리하겠다고, 내게 말했다. 아, 그러네요. 책방도 나도 이제 정년이 되었네요. 나는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말했다. 

 늙은 여자 혼자서 이른 저녁을 그것도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면서 먹는 게 드문 일이었는지 건너편 식탁에서 밥을 먹던 사내들 몇의 시선이 자주 내게로 건너왔다가 거두어지곤 했다. 별다른 악의도 속 빈 호의도 느껴지진 않았다. 오래전에 젊음을 상실한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은 대체로 무심한 편이다.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나도 그들을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졌다. 며칠 동안 폭우가 내렸다가 물러간 뒤끝이라 습기와 더운 열기가 거리에 가득했다. 퇴근 시간대를 넘긴 거리엔 인파가 넘쳐났고 소음도 여전했는데 어디선가 귀에 익은 음악이, 80년대 복고풍의 멜로디가 들려서, 소리 나는 곳이 어딘지 두리번거리다가 나는 아, 짧게 감탄을 했다. 

 분명 그룹사운드 잔나비였고, 보컬 최정훈이 영광도서 앞길에서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지난 6월 셋째 주 토요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서면 거리 일대에서 버스킹이 끝난 것으로 기억하고 있던 나는 이런 행운이 있나 싶었다. 게다가 잔나비라니. 그들이 부산까지 내려오다니. 무엇보다 그들의 길거리공연을 볼 기회가 내게 주어지다니. 

 나는 어느 쪽이냐면,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은 늘 혼자지, 영원히 혼자지’라고, 가끔 헤르베르트의 시구를 소리 없이 읊조리며 위안 삼는 사람들에 속했다. 2차대전 당시 식민 치하의 폴란드에서 활동했던 헤르베르트의 시집 10권을 모은 그의 전집은 10년 전쯤에 번역본이 나왔으나 오랫동안 사가는 독자가 없었다. 시가 없어도 사람들은 충분히 불행하거나 아니라도 견딜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까. 나는 아무도 사 가지 않는 그의 전집을 반품하는 대신 책방에 들어온 가격으로 값을 치르고 내 방에 들여놓았다. 가끔 아무 데나 펴서 작은 소리로 읽곤 했다. 

 전쟁과 폐허의 공포 속에서 생을 견뎌야 했던 시인은 「코기토 씨가 보냄」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아무도 너를 위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무덤덤하게 아무도, 너를, 이은유, 너를 기억하거나 위로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고쳐 읽곤 했다. 괜찮았다. 우연히 잔나비의 길거리공연을 보게 되는 행운이 있기도 하니까. 

 코로나바이러스 탓에 오랫동안 일상이 정지되다시피 했던 거리에 활력이 돌고 지난해부터는 곳곳에서 다시금 버스킹이 열렸다. 아직도 바이러스가 완전히 물러간 것은 아니어서 마스크를 벗지 않은 조심스러운 사람들이 더러 보였다. 잔나비는 이제 유명한 인디밴드여서 그들의 공연은 지상파 방송국에서 나온 카메라맨이 녹화하고 있었다. 연주에 맞춰 흥겹게 노래를 따라 부르던 사람들은 음악이 끝날 때마다 환호했고, 더러 그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이들도, 그들 곁에 가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이들 모두 젊고 젊은, 그래서 누구라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사람들이었다. 이제 늙은 나는 다만 마음으로만 박수를 보냈고, 그들 곁으로 가서 함께 사진을 찍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조금 생각해 보니까 나는 오랫동안 누구와도 기념사진 한 장을 남기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룹사운드 잔나비가 최근에 발표한 신곡 〈포니(pony)〉를 나는 자주, 무한 반복으로 듣곤 했다. ‘어디든 달려가야 해’로 시작하다가 ‘갈라진 길에 멈춰서는 울었는지 웃었는지’ 하고 묻는 노래 포니는 보컬 최정훈의 어린 시절과 그의 어머니와의 추억을 함께 그려 낸 곡이라고 했다. 갈라진 길에서 멈춰 울었을까 웃었을까, 뜻밖의 행운에 잠시 해맑아졌던 나는 다시 가라앉아 본래의 나로 돌아왔다. 그렇겠네, 길이란 곧게만 뻗어 있는 건 아니니까. 갈림길이 반드시 있으니까. 있었으니까.

내가 그의 신곡 ‘포니’를 자주 들었던 까닭은 특히 그 가사 말을 듣고 있을 때 몇 사람이, 정확하게는 정기역과 송승유 두 사람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운명처럼 내 삶에 끼어들었으나 오래전에 무관한 사람이 되었다. 둘 다. 셋 다. 서로가 서로에게. 

 나는 가끔 그 시절의 두 사람을 생각하곤 한다. 갈라진 길에 멈춰 서서 그들은 울었는지 웃었는지. 아니 나는 어땠는지. 시간이 흘러도 기억은 변치 않을까. 어떤 기억은 앞으로의 삶을 지탱하고 나아가게 하는 작은 힘이 되기도 할까. 

 전철을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옆에 앉은 중년 부부가 주고받는 말을 들었다. 갤럭시 버즈를 끼고 잔나비가 부르던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를 듣고 있었으나 부부의 목소리는 화가 난 것처럼 컸다. 천장에 달린 텔레비전 모니터 화면에서 자막으로 내보내고 있는 뉴스 탓에 화가 난 듯했다. 왜 요즘엔 제가 낳은 아이를 그리 함부로 없애버리는 무책임한 인간들이 많은 거야, 하고 남자가 말했다. 그러니까요. 못된 인간들이지. 그런데 왜 뉴스엔 여자들 탓만 한답니까? 아이를 여자 혼자 만드는 건 아닌데.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여자가 그렇게 말했다. 남편은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아이를 낳아서 죽이거나 내다 버린 이들에 관한 뉴스가 유난히 많은 계절이었다. 범죄 혐의에 대해 수사한다고 했고, 생각이 거기에 잠시 머물자 불현듯 한기를 느꼈다. 

 책방 문을 열고 들어가 구석에 붙어 있는 작은 내 거처의 전원 스위치를 켜자 책상에 먹다 남긴 바게트 조각을 허겁지겁 갉아 먹던 생쥐가 펄쩍 뛰어 달아났다. 방바닥에 앉아 나의 유일한 사치품인 폴란드산 캔맥주 크로넨버그 1644 블랑을 마시며 밤을 보냈다. 나는 그때 무슨 짓을 했던가. 나는 그리 무책임한 인간이었나. 죄책감과 두려움이 허기와 갈증처럼 수시로 찾아와 지금까지도 내 일상은 평온하지 못한데.    

   

헌책방     


 1979년 10월, 나는 대학 졸업반이었다. 마지막 학기 중간고사를 치르고 남프랑스 니스에 있는 엑상프로방스 대학으로 유학 갈 준비에 바빴다. 인구 13만 명쯤 되는 유서 깊은 도시 엑상프로방스는 오랜 역사를 지닌 학문과 예술의 도시지만, 무엇보다 폴 세잔의 도시다. 서양미술사를 전공한 나는 폴 세잔이 파리에서 뛰쳐나와 마지막 인생을 쓸쓸하게 보낸 그의 고향 엑상프로방스로 가고 싶었다. 세잔이 화폭에 담은 도시의 풍경과 그가 걸었던 레 로브 언덕과 미라보다리를 그가 그랬던 것처럼 느리게 걷고 싶어서 나는 오랫동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입생 때부터 학교 앞 오래된 책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모았다. 책방 구석진 곳에는 간단한 취사도 할 수 있는 두 평 남짓한 방이 있어서 나는 아예 그곳을 거처로 삼았다. 뜻밖이라는 듯 주인아저씨는 반색을 했고, 부모님은 깜짝 놀랐으나 돈과 시간을 아낄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가능하면 부모님의 후원 없이 공부를 마치고 오려던 내 바람은 별다른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방학 때마다 서울로 올라가 종로에 있는 프랑스대사관 어학센터 근처 고시원에 틀어박혀서 불어를 익혔고, 지난여름 방학 때는 프랑스대사관에 가서 인터뷰를 하고 왔다. 이제 기말을 보고 종강을 하고 나면 2월엔 졸업을 하고 나는 인천에서 파리로 다시 마르세유를 거쳐 엑상프로방스까지 가게 될 것이다. 프랑스 대학은 우리와 달리 9월에 새 학기가 시작된다. 그 비어 있는 기간에 나는 현지에서 불어를 좀 더 익히고, 엑상프로방스에서 버스로 30분쯤 소요되는 마르세유의 셰어 하우스를 오가면서 세잔의 숨결을 느낄 것이었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1979년 10월은 그런데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오랫동안 나라의 통치자였던 사람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지키던 이의 총에 죽었다. 그가 절명한 시각이 1979년 10월 26일 금요일 오후 7시 40분이라고 했다. 곧이어 ‘일체의 옥내외 집회는 허가를 받아야 하며 시위 등 단체 활동을 금하고, 전문대학을 포함한 모든 대학은 별명이 있을 때까지 휴교 조치한다. 22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야간 통행을 금지한다’ 등을 규정한, 무엇보다 상기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구금・수색하며 엄중하게 처단한다는 경고를 담은 계엄 포고령이 발동되었다. 

 두 분 모두 시청 공무원이었던 부모님은 책방에서의 아르바이트도 당장 그만두고 집에 들어와서 당분간 밖에 나가지도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아버지는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국부가 총에 맞아 세상을 뜨다니, 하고 침통했다. 엄마는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마저 흉탄에 잃었으니 자식들이 얼마나 비통할까, 하고 당신 가족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슬퍼했다.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가 이제 막 제대한 나보다 두 살 많은 오빠는 까닭을 알 수 없었으나 들떠 있는 눈치였다. 그럼 그렇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역사는 전진하는 거야, 하고 말해서 부모님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애지중지 아끼는 하나뿐인 아들인 데다 이제 막 군대에서 돌아온 자식에게 부모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식구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으나 밖은 위험하다고 집 안에만 있으라고 내게 신신당부하는 것만은 똑같았다.

 졸업 학기인데, 한 달만 지나면 기말고사인데 휴교라니. 그럼 유학은 어떻게 되는 거야. 연이은 황당한 일들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뜻에 따라 법학 공부를 하다가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마침내 미술공부를 시작했던 세잔과 그의 그림을 도판으로 보면서 나는 절망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때부터 오랫동안 문을 열었던 책방의 주인아저씨는 여전히 책방 문을 닫지 않았고, 나도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았다. 도무지 갑갑해서 집 안에 틀어박혀 있을 수가 없기도 했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나 사실은, 승유의 안부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서양철학을 전공하고 있는 송승유. 나와 같은 학번이어서 같은 과는 아니지만 1학년과 2학년 때 문학과 인간, 고전 읽기와 토론 등 인문계열 쪽 교양과목 수업을 함께 들었던 승유는 학교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는 이였다. 그는 마산이 집이어서 학교와 집을 왕복하는 시간이 엑상프로방스에서 마르세유까지 오가는 시간과 비슷했지만 그것도 번거롭다고 학교 앞 원룸에서 살고 있었다. 공부 좀 하는 아들에게 거는 집안의 기대란 게 법대나 의대를 가는 것이었겠으나 엉뚱하게 서양철학을 공부하겠다는 아들이 그의 부모님에게는 미덥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굳이 부모님의 눈치를 보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상황에 자신을 가두고 싶지 않았다. 

 내가 졸업하고 나서 남프랑스로 유학 간다고 알렸을 때, 그도 독일로 유학 가서 헤겔철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아, 그렇구나. 그럼 우리 유학 가서 너는 독일, 나는 프랑스니까 방학에 알자스에서 만나면 되겠네, 하고 나는 그때 해맑게 웃어 보였다. 알자스는 독일과 프랑스가 번갈아 가며 지배했던 두 나라의 국경도시지만 2차 대전 후부터는 프랑스 땅이다. 알퐁스 도데 소설 「마지막 수업」과 발자크 소설 「사촌 퐁스」의 배경 도시이기도 하다. 

 넌 그런 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승유가 잔뜩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책방은 30평이 조금 넘는 작은 규모였으나 필요한 책들은 거의 갖추고 있었다. 1960년부터 대학 앞에 책방을 열었던 주인아저씨의 아버지는 처음엔 신간 도서와 대학 교재를 중심으로 책방을 운영하면서 나중엔 복사기도 두 대를 들여서 제법 그럴듯하게 학생들의 필요를 충족했다. 그러다 1972년 태풍 ‘베티’가 만들어 낸 강한 기압골이 전국에 집중호우를 뿌렸고, 1천 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는 물난리가 나던 해 동네가 침수되는 일이 있었다. 그 바람에 책들이 물에 젖었고, 그것을 내다 버리는 대신 아예 헌책방을 겸하게 되었다고 했다. 동서책방이라는 상호답게 동서의 고전과 역사와 문화에 관한 오래된 책들이 많았다. 아마 그래서일 것인데 오랫동안 책방을 찾는 단골손님이 적지 않았다. 대학생이었다가 이제는 희끗희끗 머리에 잔 서리가 내린 그들은 깨끗하게 다 읽은 책을 가져다 놓고, 미리 주문한 책과 헌책 서가에서 발견한 책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사 가곤 했다. 

 여긴 온갖 종류의 책이 아주 많아. 그리고 유학 가려고 그 동네 도시에 대해 많이 알아봤지 뭐. 나는 자랑스럽게 말하다가 이내 그의 시무룩한 표정을 읽고 침묵했다. 그는 1학년을 마치자마자 군대에 다녀오지 않아서, 미루고 미루다가 마땅한 기회를 놓쳐서, 졸업하고 나면 군대에 먼저 다녀와야 한다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지난 16일부터 20일 사이에 일어났던 시위 사건 이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징후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부산대학교 정문 건너편 원룸과 상가들이 제법 자리한 길목에 오래전 문을 연 동서책방엔 복사기 두 대가 마련되어 있어서 과제물 제출 마감에 쫓긴 학생들의 발길이 잦았다. 1979년 10월 15일 늦은 시각 승유가 손 글씨로 무언가를 급하게 쓴 에이포 용지를 삼백여 장 넘게 복사하러 왔었다. 청년학도여! 방관하면 되겠는가, 분연히 일어나 진리와 자유의 횃불을 함께 들자!, 고, 그렇게 적혀 있었다. 유신철폐, 공정한 소득 분배! 정치탄압 금지! 등 날 선 구호도 가득했다. 너 데모하는 거야?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면서 푸들처럼 떨었다. 그는 평소와 다른, 종류를 알 수 없는 열기로 잔뜩 긴장되어 있었고, 책방 출입문으로 자주 눈길을 주며 무언가 경계하곤 했다. 

 가끔 그는, 이 정권처럼 권력을 유지하려고 강압적인 방법을 자주 쓰다 보면 결국 국민만 불행해질 텐데, 하고 혼잣말하듯 했으나 그뿐으로, 그런 말이야 누구라도 조용하게는 말할 수 있었으므로, 그가 운동권인 건 아니었다. 그건 내가 보증할 수 있다. 신입생 때부터 졸업반이 된 지금까지 학교 안에서 가장 많이 그를 만났던 사람은 분명 나였다. 그는 일부러 그랬다기보다는 어쩌면 자신의 본성이거나 아니면 철학도답게 과묵했다. 아니 다소 엉뚱했달까. 그나 나나 이성과의 데이트 경험이 없었던 탓에 나와 데이트를 할 때면 불쌍하게도 그는, 은유야, 너는 인간이란 대체 어떤 종류의 동물이라고 생각해? 따위의 유치한 말 몇 마디를 건네고선 스스로 계면쩍어하던 사람이었다. 

 회사의 폐업 결정에 항의하던 가발가공수출업체 YH의 여공들 172명이 1979년 8월 9일부터 11일까지 야당인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경찰은 이틀 동안 대치하다가 새벽 2시경 1천여 명의 무술 경관을 신민당사에 투입하여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강제로 연행한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국회의원, 당원, 기자들을 무차별 구타하여 많은 사람이 부상한다. 무엇보다 경찰의 강제해산 과정에서 창틀에 매달려 항의하던 여공 한 사람이 추락하여 죽는다. 그녀의 죽음을 초래한 건 노동자의 삶을 하찮게 여긴 한국 사회의 무책임과 폭력성에 있다고 승유는 눈시울을 적셨다. 거제도 출신 야당 당수는 그 일이 빌미가 돼서 결국 의원직을 강제로 잃고 만다. 특히 부산과 마산지역 사람들은 큰 충격과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 

 승유는 이렇게 정권이 국민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상황을 마냥 방관하는 것은 젊은 지식인 청년들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야,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더구나 우리 지역은 오래전 임진년의 전쟁 때도 헤아릴 수 없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으나 군민 모두가 나서서 적들과 맞서 싸운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다고, 자유당의 부정선거를 규탄했던 4・19 혁명도 그 시작은 맨 먼저 우리 지역에서 시작했다고, 내게 역사 교육을 했다. 유치했지만 다른 때와 달리 나는 조금도 웃지 못했다. 그거야 그렇지만. 그 생각과 말은 아름답고 순수하고 옳지만. 그런데 네가 앞장서는 것은, 이라고 말하다 그만 목이 메어 말을 멈추고 나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았다. 여성 노동자뿐 아니라 국회의원들과 기자들에게까지 몽둥이로 치도곤을 치는 시절이었다. 기껏 대학생일 뿐인 네가, 하필 네가.     


배고픈다리     


 그룹사운드 잔나비의 버스킹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던 날 밤이었다. 전철옆자리에 앉아 있던, 왜 제 손으로 낳은 아이들을 아무 데나 버리거나 심지어 죽이는 못된 것들이 많은가 하고 탄식하던 중년 부부의 말이 그날 밤새 나를 괴롭혔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미뤄 두었던 숙제를 해야겠다고 그 밤 나는 다짐했다. 

 헌책방은 여름방학 동안 리모델링을 해서 카페로 업종을 바꿀 것이고, 지난 40여 년 동안 아르바이트에서 점원으로 그리고 주인을 대신해서 책방을 운영해 왔던 나는 이제 늙어서 카페의 점원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서로가 그것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오랜 시간 책방을 지켰던 내게 한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던 주인아저씨였지만 내게 함께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대학의 교원들이 정년 할 나이가 되면 별다른 불만 없이 자연스레 물러나듯이 이제 나도 그 나이가 되었으므로 자연스럽게 퇴직을 하게 될 것이었다. 오랫동안 혼자였으므로 꾸려야 할 짐도 많지 않았고,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이지만 그래도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을 곧 받게 될 것이고, 그러면 마련해 두었던 거처로 옮겨 생을 이어 가는 데 그다지 곤란은 없을 터였다. 

 부산에서 광주까지는 고속버스를 타고 갔다. 대학 시절 종로에 있는 프랑스대사관 어학원에 다니면서 불어를 익히느라 서울 나들이를 한 것과 1979년 10월 15일 밤 이후 사라져버린 승유를 면회하러 강원도 인제의 군부대를 찾아갔던 몇 번을 제외하고 멀리까지 여행하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하마터면 가볍고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은 터무니없는 마음이었다. 광주는 두 번째 오는 길이었다. 정기역의 고향이었다.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하려니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그래도 나는 말을 해야겠다. 1979년 10월에서 1980년 5월 사이에 내게 닥쳤던 많은 불행과 아주 조금의 기쁨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상처에 대해. 평범했던 사람들의 삶을 건드리고 간 불행했던 역사에 대해.

 1979년 10월 16일 아침에 승유는 지난밤에 준비해 두었던 유인물을 교내 곳곳에 뿌리며 학생들을 강의실에서 끌어냈다. 교내에 머물며 학생들의 동향을 살피던 정보과 형사들이 기겁을 하고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한번 발화한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나는 기어이 올 것이 오고 말았다는 체념과 묘한 기대가 어우러진 가운데 나도 모르는 열기에 빠져들었다. 승유는 자신 곁에 절대 가까이 오거나 자신을 알은체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었다. 

 그가 운동권 학생이 아니어서 기관의 주목을 피할 수 있었으나 이제 사태가 벌어지고 나면 그는 몸을 피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당연한 순서로 그와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을 수소문할 것이어서 그는 나의 안부를 염려했다. 나는 그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으나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구호를 몇 번 외치고 어깨동무를 하며 시내를 돌아다녔다고 내가 반정부 활동을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마구 들떴다. 동급생들과 선후배들이 순식간에 수백 명이 모여 교문 앞에서 저지하던 경찰들을 떼밀고 시내로 나갔다. 사람들은 누군가 먼저 시작해 주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유신철폐, 민주회복, 그런 구호를 외치면서 주먹을 흔들었다. 

 다음 날은 부산대뿐 아니라 고신대와 동아대 학생들도 합류했다. 번화가인 서면 로터리와 남포동과 광복동 거리에서, 부영극장과 미화당백화점과 국제시장 입구를 오가면서 시위를 계속했다. 저녁부터는 시민들이 가세하기 시작했고 경찰에 이어 급기야 군병력이 투입되었다. 나는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희열을 느꼈다. 그것은 자유에의 갈망이었을까. 우리를 옥죄는 모든 폭력에서 벗어나기를 목마르게 염원했던 마음이 거리에 쏟아져 나온 모든 이들의 마음을 연결해 주고 있었다고 그때 나는 생각했다. 

 10월 18일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대학 정문 앞에는 장갑차가 배치되었다. 거리를 향해 위협적인 모습으로 서 있는 장갑차를 보고서 사람들은 비로소 이것은 큰 변고라고 생각했다. 1960년 4월에 부산에서는 고등학생이던 강수영이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의 총탄에 희생되었다. 서면역 11번 출구 앞에는 서면 로터리에서 시위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민주공원 내 4・19 광장에는 희생자 위령탑과 총 41명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희생자 영령봉안소가 있다. 사람들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상흔을 재빨리 기억해 냈다. 수만 명에 이르는 시위대가 최루탄의 독한 연기를 뚫고 파출소와 세무서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최초의 희생자가 마산에서 나왔고, 군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부상자가 속출했다. 운 좋게 나는 연행되지 않았으나 1500명 넘게 체포되었다. 

 흉흉한 소문이 거리에 떠돌았다. 나는 겁이 덜컥 났고, 승유를 미친 듯이 찾았다. 오직 그밖에 기대고 의논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시위를 시작하던 첫날 학교에서 학생들의 마음을 빼앗은 후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나는 낮에는 여러 곳의 경찰서에 찾아가 연행자 중에서 승유의 이름이 있는지 수소문하고, 밤에는 행여 그가 새벽 시각에라도 뛰어 들어올까 봐 마음을 졸이며 책방을 지켰다. 

 10월 26일 박정희가 죽고 그의 죽음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었다.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육군총장이 연행되고 수사의 책임자가 권좌에 오른 다음 해 봄에야 그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 시위가 격화되던 때 경찰에 연행되어 구금되었던 승유는 시위가 일단락되자마자 강제 징집되었다고 했다. 그해 봄엔 광주에서 무슨 폭동이 일어났다고 했다. 텔레비전 화면엔 시내버스와 군용트럭 위에 가득 올라탄 젊은이들이 허공을 향해 소총을 치켜들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그들은 머리에 조악한 붉은 글씨로 누구를 석방하라거나 누구는 물러가라거나 하는 구호를 써 붙인 띠를 두른 채 거리를 질주했다. 그들의 모습은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반군과 흡사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표정이 주눅 들지 않아 보였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미국은 북한의 어떠한 위협으로부터도 한국 방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항공모함을 부산으로 보냈다. 최전방을 지키는 병력과 특수부대까지 동원하고서야 폭동은 다행히 진압되었다 했고, 사태가 마무리되어 질서가 회복되자 나는 비로소 승유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강원도 인제에 있는 군부대로 면회갔던 봄날, 몰라보게 침울하고 야윈 파리한 몰골의 그는 하룻밤 특별면회를 허락받았다. 애인이 왔다고, 그동안 가족을 비롯한 그 누구와의 면회를 허락한 적 없었으나 그래도 애인이 왔으니까 특별히, 라고 위병소에까지 그를 따라 나왔던 당직 부사관이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그렇게 말했다. 딱 오늘 하룻밤이다, 그는 승유에게 다짐하듯 말했고, 승유는 풀 죽은 얼굴로 그를 외면했다. 이 새끼가, 하고 부사관은 승유를 잠깐 험악하게 노려보다가 돌아섰다. 우리는 부대 가까운 시골 읍내 허름한 모텔 삐걱거리는 침대에서 몹시도 서툴게 첫사랑을 나누었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가 나와의 서툰 섹스를 나눈 후 혼잣말하듯 했던 말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내게 당부를 했던가, 서투르게 또 나를 가르치려 했던가. 민주주의라는 집을 짓는 데 우리의 항쟁은 튼튼한 벽돌 구실을 했다고, 세상은 우리의 싸움을 벌써 잊은 듯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그랬다. 그 말이 어찌나 슬프던지 나는 울컥해서, 그러나 도무지 예전 같지 않은 그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화장실로 뛰어가 수돗물을 틀어 놓고 소리 죽여 울었다. 승유는 그날 밤 저세상으로, 홀로 저 먼저 갔다. 승유가 제정신으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충분하게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원망스럽고 밉고 슬플 뿐. 

 1981년 여름, 갓 태어난 딸아이를 버리고 갔던 광주에 다시 왔다. 조선대학교 뒤편에서 무등산 가는 길에 있는 학운동 배고픈다리 근처에는 예전의 보육원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무등보육원. 반가운 마음이었다가 서러운 마음이었다가 아이가 탈 없이 자랐다면 마흔이 조금 넘어 곱게 늙어 가기 시작할 나이인데, 하고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연거푸 내 뺨을 후려갈겼다.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 배 속에서 기르고 낳은 자식을 보육원에 맡기고 도망쳐 나온 못된 인간이었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의 격렬했던 시위가 끝나고 승유가 자취를 감춘 후 다음 해 봄까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헌책방을 지켰다. 2월에는 예정대로 졸업을 했다. 부모님은 엑상프로방스로 가려던 유학 계획은 어찌 되었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승유의 소식을 모른 채로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그가 나를 놀래 주려고 먼저 독일에 가 있다가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도시 알자스에서 만나자고 엽서를 보내올 리는 없었다. 시위 때 죽었거나 다쳤거나 연행된 이들의 명단에 송승유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사라졌는가. 하루하루를 온전한 정신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데 강원도 인제의 어느 군부대에서 연락이 왔고, 그를 만나러 가서 하룻밤을 지냈는데, 고작 하룻밤을. 그는 스스로 죽어버린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나는 엑상프로방스로 갔어야 했다. 아무런 미련도 남김없이. 그러나 1979년 10월 하순엔 승유의 자취를 찾느라, 1980년 5월 끝자락엔 승유의 죽음이 나와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하느라 한국을 떠날 수 없었다. 강원도 인제에서 승유가 자살하고 난 후 나는 군 수사기관에서 모욕적인 심문을 견뎌야 했다. 그날 밤 허름한 모텔에서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어떤 몸짓을 교환했는지 자술서에 쓰고 똑같은 수사관의 반복되는 질문에 답하느라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아, 나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싶을 때가 없지 않았다. 며칠 동안 갇혀서 같은 질문에 대답하다 생각해 보니 어쩌면 나로 인해 그가 죽음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내가 면회를 오지 않았더라면 승유는 어쨌거나 그에게 닥친 견디기 힘든 시간을 그래도 잘 견뎌 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자꾸 나를 지치게 했다.

 사실 한국에 남아야 할 까닭은 없었다. 강원도에서 돌아와 나는 헌책방의 짐을 정리했다. 다만 유학보다는 당장엔 몸과 상한 마음을 다스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당분간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지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또 운명이란 내게 감당해야 할 불행이 더 남아 있다고 붙잡는 것이었다. 강원도에서 책방으로 돌아온 그날 밤, 내게 손님이 찾아왔다. 정기역이었다. 


남아 있는 것들     


 강력한 태풍이 우리나라를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전국에 연이틀 폭우가 쏟아졌다. 책방은 문을 닫아걸었고 나는 준비해 둔 거처로 짐을 옮기려다가 비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밖에 나가 점심을 사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눅눅해진 바게트 몇 조각과 함께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유리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도로를 질주하던 소형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지면서 중앙선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저걸 어째. 나는 눈앞에서 사고를 목격하고서도 달리 어쩌지 못하고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마음은 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있다는 것을 살면서 가끔 깨닫곤 한다. 그러니까 내가 했던 일을 그때 당신은 왜 하지 않았는가 하는 힐난은 세상의 슬픔과 고통을 충분하게 마주하지 못한 이의 서툰 언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누가 어떻게 알겠는가. 견딜 수 없을 만큼 폭우가 쏟아지고 도로에 물이 넘쳐나고 자동차가 미끄러지고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엔진 룸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올 때 자동차 조수석 유아용 시트에 앉아서 졸고 있던 여자아이의 혈액형이 희귀혈액형인 Rh형 중에서도 Rh negativ인지 아닌지를.

 오래전 아이를 버렸던 배고픈다리 근처 무등보육원 앞에서 나는 오래 머뭇거렸다. 사십 년이 지났으니 그 아이가 여태 이곳에 있을 리는 없었다. 내가 40년 동안 헌책방을 떠나지 않은 까닭이 행여 정기역이 나를 찾아와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자신을 버린 친모가 어쩌면 한 번이라도 찾아올지 모른다는 기대를 하기는 했을까. 보육원 마당에서 또래들과 장난을 하며 놀고 있는 앳된 아이들을 바라보다 나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강원도에서 승유를 만나고 돌아온 날, 바로 돌아오지는 못하고 꼬박 일주일을 수사기관의 심문을 견뎌야 했다. 1980년 5월 끝자락. 승유의 부모님이 망연한 모습으로 그의 시신을 거두어 가고 난 후 나는 몸에서 모든 물기가 증발해버린 상태로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밤늦게 걸어 잠근 책방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고 잡아당기는 누군가의 기척을 느꼈다. 도둑이 들 만한 곳은 아니었고 가끔 취객이 화장실을 잘못 찾는 경우도 있어 그런가 보다 했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있던 터라 그 무엇에도 반응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방에서 꼼짝하지 않은 채 모로 웅크려 누워 있었다. 마음은 이미 관 속에 있다고 나는 느꼈다.

 어둠 속에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죽었던 승유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만 같아서 기겁을 하고 뒷걸음을 쳤다. 정기역이었다. 전남대 경제학과 졸업반이었던 그는 5・18을 사전 모의했다는 혐의로 예비검속 명단에 올랐다. 붙잡히면 죽음뿐이었다. 덥수룩한 머리에 초췌한 몰골을 한 낯선 청년은 승유와 쌍둥이 형제라도 되는 양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움푹 팬 눈매가 서늘했다. 체포를 피해 마산에서 미국으로 가는 화물선 레오파드호에 승선했던 선배와 달리 그는 끝내 도주하지 못했다. 선배의 미국행을 도운 화물선의 항해사는 의무실에 딸린 화장실 말고는 달리 숨어 있을 만한 공간이 없다고, 35일이나 걸리는 워싱턴주 벨링햄까지의 뱃길에 그 비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두 사람이 숨어 지낼 수는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태가 진정되는 동안 숨을 곳을 구하던 정기역을 내게 보낸 사람은 뜻밖에도 승유의 아버지였다. 승유의 어머니일 수도 있었다. 정기역은 승유의 이종사촌이라고 했다. 그분들은 아무런 메모 하나 들리지 않은 채 그를 내게 보냈다. 정기역은 나와 나이가 같았다. 그의 이종사촌인 송승유와도 같은 나이였다. 도무지 믿기지도 이해되지도 마땅치도 않았고 그럴 여건도 되지 않았으나 승유의 그 초췌한 몰골과 너무나도 닮은 그의 사촌을 그것도 체포를 피해 숨을 곳을 찾는 사람을 냉정하게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그의 대학 선배가 겨우 몸을 숨겼던 화물선 레오파드호의 의무실보다 손바닥 정도만큼 여유 있을 뿐인 헌책방의 내 거처에서 그는 나와 함께 꼬박 두 달을 지냈다. 책방 일을 모두 내게 맡긴 주인아저씨는 광복동 번화가에 그즈음 유행하기 시작한 비디오 대여점을 확장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람이 드나드는 책방이 오히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그의 은신처로 제격이었다는 뜻이다. 나는 처음에 몹시 불편했다. 온갖 핑계와 사정을 헤아려 당분간 그를 숨겨 주려는 마음이었으나 그와 나는 겨우 스물셋의 청춘이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책방에 가끔 와서 책을 사 가던 이의 신고로 들이닥친 수사관들에게 거칠게 연행되어 갔다. 들이닥친 사내 중 한 사람은 발로 내 배를 걷어차며 내란음모죄를 저지른 놈을 숨겨 주었으니 너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험한 말을 하고 갔다. 나는 얼굴에 가래침이 튄 것처럼 모욕과 함께 한기를 느꼈다. 승유를 그렇게 떠나보낸 것과 어쩌면 그렇게 닮듯이 기역도 내게서 떠났다. 승유와 그랬던 것처럼 기역과도 그 흔한 기념사진 한 장을 남기지 않았다. 기념할 만한 게 없어서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이 증거가 되어 내 사랑을 옭아매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2023년의 광주는 혼란스러웠다. 오래전 민간인이 된 80년 5월 광주에 왔던 공수부대 사람들이 희생자들의 묘역에 참배하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묘역으로 안내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라고 막아섰다. 용서와 화해의 조건이 무어냐고, 누구에게 그것을 판단할 권리가 있느냐고 맞섰다. 배고픈다리 근처 무등보육원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 돌아오던 나는 그 모든 것과 무관했다. 단지 자신의 시대를 아파했다는 이유만으로 고통을 받았던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그리고 내가 저질렀던 죄에 대해 생각하다가 나는 돌아섰다.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부마항쟁기념재단 기록관이라고 했다. 앳된 목소리의 여자는 조심스럽게 내가 이은유 선생님이 맞는가 확인했다. 이름은 맞는데 선생님은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잠시 할 말을 고르던 그녀는 오랫동안 찾았던 분이라고, 송승유 선생님의 기록을 정리하다가 이은유 선생님의 이름을 발견했다고 했다. 승유는 10월 부산과 마산 일원에서 있었던 시위 이후 군대로 끌려가서 최전방 부대에 배속되었고 곧바로 이듬해 봄 광주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다고. 그가 온전한 의지가 아닌 체제의 강요에 그와 같은 일을 했던 것에 대해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겪었다고. 여러 번의 자해와 치료 중에 마침내 나와 면회를 할 수 있었다고, 그랬다. 

 1980년 5월 말일 무렵 강원도 인제에서 승유는 죽었고, 그는 작은 수첩에 얼마간의 메모를 남겼다. 은유에게, 네가 언제 읽을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은유에게. 그렇게 시작한 그의 메모에는, 사랑과 저항은 둘이 아니고, 사랑과 치유도 둘이 아니라고, 그러니 은유야,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는 말자, 고 적어 두었다. 바보같이, 야만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저는 먼저 죽어버렸으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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