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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영의 Nov 15. 2021

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차도로 뛰어들었다

버지니아 울프 단편 소설「유산」

1) 버지니아 울프 단편 소설「유산」의 줄거리는 헤밍웨이 소설「살인업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서사(narrative)가 단순하다. 소설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서술되고는 있으나 초점 화자인 남편의 시각에서 인물과 사건을 서술한다.     

중심 사건은 그의 아내가 6주 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길버트 클랜든’이 6주 전 교통사고로 죽은 아내- ‘안젤라’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그녀가 그녀의 비서였던 ‘시시 밀러’ 등에게 남긴 선물을 보면서,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했던 것처럼, 어떻게 그 모든 걸 그렇게 완벽하게 준비해 두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이는 당연하게도 앞으로 일어날 어떤 사건 내지 발견을 예비해두는 소설적 장치 곧, 복선이다. 그녀의 죽음은 교통사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스스로 차에 뛰어들어 죽음을 선택한 자살이라는 게 소설의 말미에서 밝혀진다. 그녀가 남긴 선물을 대신 전해주기 위해 그가 ‘시시 밀러’를 집으로 불렀을 때, 밀러가 “용서하세요, 클랜드 씨”라는 인사를 건넬 때도 독자는 무언가 암시를 받게 된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그녀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죽음에 관한 진실인 셈이다. 그녀는 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가. 그녀가 그에게 유산으로 남긴 열다섯 권의 일기장을 통해서 그 실마리의 일단이 드러난다. ‘안젤라’는 그녀의 비서였던 ‘시시 밀러’의 오빠 ‘B.M’의 연인이었고, 그녀가 죽기 얼마 전에 그(B.M)가 죽자 그를 따라 죽은 것이다. 그런데 유망한 정치인이었던 ‘길버트 클랜든’의 아내로서의 역할에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듯 보였던 그녀-‘안젤라’가 왜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고, 급기야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해 소설이 명쾌하게 말해주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것 역시 이 소설에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2) 이 소설에서 인물과 사건에 관한 정보는 소설 내 인물-‘안젤라’가 죽기 전에 썼던, 그리고 그녀가 남긴 ‘일기’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일기는 자아의 거울로서의 역할을 해 온 글쓰기 양식이다. 그런데 그것은 통일된 자아 이미지보다는 일견 모순되고 양립하기 어려운 자아의 다양한 측면들이 파편적으로, 또한 중첩되어 그려지는 특성을 갖는다. 그것은 이 소설에서 일기의 앞부분은 남편과의 결혼생활에서 사소하고 행복한 삶을 이루었던 일상사로 가득했으나, 뒤로 갈수록 ‘B.M’이라 지칭하는 인물과의 관계가 암시되고 그와의 결코 단순하지 않은, 그러나 전부를 짐작하기는 어려운 모종의 갈등 관계에 관한 진술로 채워져 있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가 실제로도 많은 일기를 남긴 것이나 그녀가 현실의 재현에 충실한, 따라서 굵직한 사건의 전개 양상을 중요시하는 리얼리즘 소설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세계 묘사를 중요시하는 모더니즘 작가라는 점에서 볼 때에도, 이 소설에서 일기의 역할에 대해 이해 가능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일기야말로(편지글과 함께) 인물의 내면세계를 잘 포착할 수 있는 글쓰기 양식이라는 점에서 작가가 일기를 잘 활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소설을 창작할 때 이는 얼마간 낡은 방식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물론 오늘날의 소설에서 이러한 방식을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이청준 소설「병신과 머저리」에서는 동생이 형의 소설을 훔쳐 읽고 형이 갖고 있는 내면의 고통을 알게 되는 장면이 있다. 어쨌거나 누군가가 남긴 일기(나 편지 혹은 소설) 거의 전부만을 가지고 소설을 전개하기에는 플롯이 너무 단순해진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3) 다시 소설「유산」으로 돌아가, 우리가 질문할 수 있는 것은 우선, 그녀가 왜 남편에게서 벗어나려 했을까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비서였던 ‘시시 밀러’와의 대화에서 유추할 수 있는 남편 ‘길버트 클랜든’의 태도, 그리고 일기를 다 읽고 나서의 그의 태도를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우선 그녀의 남편은 아직 충분하지는 않으나 그래도 일정한 지위에 이른 정치가이다. 그는 기존의 질서 내에 위치한, 보수적이며 가부장적인 남성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또한 속물적인 남성이다.      

‘시시 밀러’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그가 말했을 때, 밀러는 오히려 그에게 언제든지 기꺼이 도와드리고 싶다고 말한다. 그 대목에서 ‘클랜드’는 혹여 그녀가 자신에게 남몰래 열정을 품고 있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착각)하면서, 나이가 비록 50이 넘었으나 자신이 여전히 매력적인 남성임을 확인하며 흡족해 한다. 소설의 말미에 그녀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만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도, 아마도 그는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만이 그를 분노라는 감정으로 밀어 넣었을 뿐, 자신을 성찰하지는 못한다.     

한편, ‘안젤라’가 만나고 있었던 남자- ‘B.M’이 사회주의자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녀는 남편으로 대표되는 기성질서에 대한 염증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관계(불륜)에서뿐 아니라 정상적인 사회질서(사회주의)에서 벗어난 ‘B.M’과의 지속적인 관계는 현실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죽음만이 그들이 무엇인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다. 그 무엇이란 어쩌면 그들을 억압하고 있던 기존의 제도, 질서, 관습이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소설에서의 인물은 이렇듯 주어진 현실의 삶-상태에 만족하지 못한 인물이 그 무엇인가에서 벗어나기를 시도하다가 좌절하고 마는 이야기를 통해 어떤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것이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소설은 서로 대립되는 성격의 인물들을 배치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안젤라- 클랜든- ‘B.M’, 이 세 인물이 갈등의 삼각형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안젤라와 ‘B.M’이 추구하는 세계는, 그것이 현실에서는 실현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일종의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이 욕망은 살아 있는 한 충족되지 않는 결핍이요, 그것은 죽어서만 채워지는(어쨌거나 종결된다는 의미에서) 속성 탓에 이 소설의 인물들은 차례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욕망은 근본적으로 결핍이어서 끝없이 계속되는 반복 충동이요,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은 단 하나, 죽음뿐이다.      

소설의 깊이 곧, 주제는 대부분의 경우 당대의 사회적 모순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에서 나온다. 버지니아 울프 소설「유산」이 의미 있는 것은 여성 인물 ‘안젤라’의 ‘코르셋 깨기’가 이 소설의 참 주제인 때문이다. 소설「유산」에서 이제 남는 문제는, 그녀는 왜 그의 남편에게 일기를 남겼을까 하는 것이다. 관계를 맺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남길 만큼 꼼꼼한 성격의 ‘안젤라’는 마음만 먹었더라면 얼마든지 일기를, 그러니까 그녀의 내적 갈등과 다른 남자와의 혼적을 남기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일기를 남겼다. 그것은 남편에게 읽어보라는 것이고, 그래서 남편은 그것을 읽었고, 그런 탓에 그녀의 죽음과 관련한 의문-진실은 해명되기에 이른다.      

“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차도로 뛰어들었다.”는 소설 말미의 설명이 가능했던 것은 소설의 도입부에서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중요한 도구였던 일기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녀가 일기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전체 서사(narrative)에서 일기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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