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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예희 Mar 13. 2017

허세의 오바로크에 대하여

좋은 취향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갖고 싶어!라는 마음속 외침이 남들 귀에 들리는 것은 싫다. 타고난 듯 자연스레 몸에 밴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이런 것쯤은 할 줄 알아야지, 원래 내 것이었던 양 즐길 줄 알아야지, 그래야 창작자 아니겠어. 말하자면 이런 생각인 것이다. 그렇습니다. 저는 대학생 시절 내내 이마에 허세라는 글자를 드르르르 오바로크 쳤던 인간입니다.


예를 들어 음악이라면 재즈, 그중에서도 정신 사납고 시끄러운 곡을 좋아한다(고 주장한다). PC통신 재즈 동호회에 가입하는 건 기본이다. 정기 감상 모임에 나가선 눈을 지그시 감고 리듬을 타(는 척 하)며 고개를 까딱까딱, 손가락을 톡톡 두드린다. 이 곡은 이런 느낌이군요, 누구누구가 작곡한, 누구누구가 연주한 무슨무슨 곡이 떠오르는군요라며 일단 아는 걸 하나씩 주워섬긴다. 눈치껏 박수를 치고 휘파람(실은 이것도 불 줄 모르지만 일단 입술을 내밀어 봅니다)을 분다. 오늘 연주는 좀 약하네요,라고 누군가 얘기하면 그런 면이 있죠 라며 슬쩍 얹어가기도 한다.


영화는 아트무비다. 정확히 뭘 아트무비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감독의 이름이 길고 발음하기 어려우면 호감이 간다. 대부분 중반 이후 잠들고 말아 영영 결말을 알지 못한 채 극장 밖으로 나왔지만 그래도 본 것으로 친다. 누군가 감상을 물으면 '아, 참 생각이 복잡해지네요'라던가 '단순한 말로는 설명이 어려워요'라고 두루뭉술한 방어막을 친다. 극장이라면 코아아트홀이나 동숭아트센터같이 이름에 '아트'가 들어간 곳이 좋다. 그 와중에 남들 다 본다는 인기 있는 영화는 보기도 전에 깎아내린다. 대학교 1학년 때 개봉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도 그중 하나. 다 함께 보러 가자는 친구들의 권유를 도도새처럼 도도하게 거절했다. 미안, 난 그런 건 잘 안 봐. 코아아트홀에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작품을 상영한다던데 거길 가려고 해...라는 당시의 대화를 다시 떠올려 보니 이렇게 재수 없게 구는 것도 재능이라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이 지금까지 나를 상대해 주는 것은 기적이다. 이후에 혼자서 슬그머니 극장으로 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결국 관람했고, 한번 더, 한번 더, 총 3번 보았다.


첫 직장에 입사해서는 곧바로 신용카드를 신청했다. 2030 여성들에게 무슨 혜택을 준다는 LG카드(현재는 신한카드)인데, 발급받아 지갑에 넣긴 했지만 정작 사용방법을 몰랐다. 이걸로, 그러니까, 뭘 어떻게 한다는 거지? 일단 기념으로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러 갔지만 계산할 때가 다가오니 초조해진다. 은행 현금카드처럼 쓰면 되는 건가? 얘들아 잠깐만, 하고 화장실에 가는 척 술집 밖으로 나와 현금지급기가 설치된 편의점을 찾아 한참 달려 겨우 현금서비스를 받았다. 눈에 익은 만 원짜리 몇 장을 뽑으니 마음이 놓인다. 시치미 뚝 떼고 돌아와 그걸로 술값을 계산했다. 신용카드 만들었다며, 왜 쓰지 않느냐고 누군가 옆에서 한마디 하긴 했는데 무슨 말인지 알 도리가 없으니 그냥 입 꾹 다물고 거스름돈을 챙겼다.


이 밑도 끝도 없는 허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대체 왜 이런 짓을 했을까. 글쎄요, 어른으로 보이고 싶어서? 어른이라면 무엇에든 익숙할 것이고, 무슨 일에든 당황하지 않을 테니까. 어른이라면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크게 고민하지 않을 것이고 뭐가 가장 좋은 것인지 알 것이다. 20대엔 서른서너 살쯤 되면 어른이 되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땐 어지간해선 흔들릴 일이 없을 것이고 인생의 모든 고민은 다 끝났을 것이며 조용하고 잠잠한 일상, 우아하고 차분한 하루하루를 보낼 거야. 나는 나를 확신할 수 있을 거야. 지금의 이 우왕좌왕, 허둥지둥한 서툰 짓들을 다 끝내버렸겠지. 하지만 서른서넛은 개뿔 서른일곱, 아홉, 마흔이 지났지만 나는 항상 나였고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아마 마흔다섯이 되어도, 마흔아홉을 지나 쉰이 되어도 나는 나,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그래도 20대 때와 지금 사이, 달라진 게 있긴 하다. 이제는 모르면 묻는다. 그땐 그 말을 하면 왠지 지는 것 같았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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