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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예희 Mar 08. 2017

머릿속의 전쟁에 대하여

그분이 오신다, 느낌이 온다, 오오, 왔다 왔어, 오셨어어어어!!!


아이디어가 이런 식으로 뭐 내려오듯 확 와주는 일은 거의 없다. 그렇게 온대도 좀 무서울 것 같다.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일이든, 원고지 몇 장 분량의 글을 써야 하는 일이든, 완전히 백지상태로 손 딱 놓고 기다리는 것보단 곰질곰질 뭐라도 하고 있어야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한때는 양파를 써는 게 효과가 좋았는데, 빨간 망에 든 양파를 박박 씻어 껍질을 벗긴 다음 도마 위에 올려놓고 몇 킬로그램씩 내리 썰어댔다. 눈물이 줄줄 나고 속껍질은 미끄러워 정신이 하나도 없지만 묘하게 개운해진다. 칼질에 일정한 리듬이 붙으면 슬금슬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채 썬 양파는 비닐봉지 몇 개에 나누어 담아 냉동실에 넣었다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썼다. 한번 얼었다 녹은 양파는 조직이 스르륵 파괴되어(라고 하더군요) 가열하면 금세 흐들흐들 흐물흐물 야들야들해진다. 이 시기엔 양파 수프를 참 자주 만들어 먹었다. 냉동실에 양파가 너무 많이 쌓였다 싶을 땐 대파로 옮겨갔다. 챠가쟈가쟉쟉 탁탁탁 대파를 몇 단이고 썰면 여기가 순댓국집 주방인가 싶다. 작업을 마친 후엔 양손으로 가지런히 모아 쥐어 비닐봉지에 넣고 냉동실로 직행. 


구슬 꿰기에 몰두하던 때도 있었는데, 근사한 비즈공예 작품을 만든 것은 아니고 그저 낚싯줄에 자잘한 구슬을 하염없이 꿰는 것이다. 한 봉지를 다 꿰고 나면 낚싯줄을 가위로 잘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내내 머릿속으론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이 시기엔 잊을만하면 방바닥 구석에서 구슬이 굴러 나오곤 했다. 레고 블록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맨발로 무심코 밟으면 상당히 거슬린다. 시간제한이 없는 게임도 괜찮은데, 그러니까 그저 멍하니 마우스를 클릭해 블록을 쏘아 맞춘다던가 하는 것 말이다. 최고 점수 따위엔 관심이 없고요, 기계적인 클릭클릭 행위가 아이디어를 생각하는데 은근히 도움이 됩니다. 그 와중에 최고점을 갱신하면 물론 기쁘다.


옆에서 보는 사람은 얘가 지금 노는구나, 한가하구나 생각하기 딱 좋지만 머릿속에선 전쟁이 한창이다. 뭔 양파를 썰고 있냐 같이 백화점이나 가자고 하지만, 구슬이나 꿰고 앉았느니 나가서 카페라도 가자고 하지만, 아닙니다. 지금 저를 건드리시면 곤란합니다. 근처 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잠깐 나오라고, 점심 같이 먹자고 하지만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손님이 찾아오든 내가 나가든 맥이 제대로 끊긴다. 한번 끊긴 맥은 어지간해선 다시 달라붙지 않는다. 그런가, 역시 나는 혼자 입 꼭 다물고 일해야 하는 사람일까. 타고난 집순이인 것인가.


한편 이런 성향은 경기도 주민이 된 이후 더 심해졌습니다. 일 때문이든 뭣 때문이든 외출 했다 다시 돌아오는 것이 더 힘들어졌으니까요. 경기도민이 빨간 버스에 탑승한다는 것은 나름 큰 결심을 했다는 뜻입니다. 버스가 한창 판교 IC를 향해 가고 있는데 상대방이 약속 시간이나 장소를 변경한다면... 오늘 한판 하자는 얘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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