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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예희 Mar 06. 2017

프리랜서의 자기소개에 대하여

분양 시행사의 홍보문구에 따르면 현재 내가 거주 중인 아파트는 2700세대가 넘는 대규모 단지다. 2700이라니, 거창한 숫자다. 집 안에, 방 안에,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실감이 나지 않지만 음식물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를 한 아름 안고 밖으로 나가 분리수거장 앞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맞네, 단지가 넓기도 넓고 아파트가 높기도 높다. 화요일 낮 두시 반에 유니클로 실내복 상하의를 쫙 빼입고 분리수거 중인 나는 뭐 하는 사람으로 보일까? 


자기소개는 언제나 어렵다. 직업 소개는 조금 더 복잡하다. 백업용 외장하드를 컴퓨터에 연결하고 그 안의 폴더를 시간 순서로 정렬하면 지난 십여 년간 진행했던 작업물들이 둥둥 떠오른다. 온라인에 다양한 소재의 만화를 연재했고 신문과 잡지 같은 오프라인 매체에도 만화를 연재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 경험이 있다. 녹화(녹음)와 생방송을 모두 경험하며 내가 거북목이라는 것과 남보다 혀가 딸다...아니 짧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음식과 여행에 대한 책을 몇 권 썼고 잡지에 칼럼을 연재했다. 학습지 삽화를 그렸고 교육방송 강의에 쓰일 짧은 애니메이션 원화를 그렸다. 취미인 사진이 때로는 일이 되었다. 전문 학원에서 1년 가까이 특정 분야를 가르쳤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별별 일을 기획했다. 지난 일이기도 하고 진행 중인 일이기도 하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중에서 딱 하나만, 확실한 것 하나만 콕 집어서 '저는 이런 일을 합니다'라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사람을 봐 가면서 적당히 골라서 대답하는데...라고 말하려니 뭐어? 사람을 봐 가면서 뭐가 어째? 싶어 왠지 재수 없게 느껴진다. 하지만 실은 이런 것이다. 


1. 동네 사람들이 내 직업을 궁금해하는 경우엔 밑도 끝도 없이 '작가입니다'라는 게 상당히 속 편하다. 집에서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도 집에 있을 수 있죠. 이러면 아 그러세요 하며 대충 넘어간다. 야설을 쓰는지 시를 쓰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


2. 유치원생 조카 친구들에겐 '이모가요, 만화를 그려요'라고 하면 열광적인 반응이 돌아온다. 얘들아 그렇다고 다짜고짜 엘사를 그려 내라고 하면 이모가 힘들다.


3. 부모님 친구분들은 '그 집 둘째 딸이 그거 하잖아. 방송에 나오잖아'라고 하시는데, 예전에 잠깐 TV 아침 생방송 프로그램에 몇 달가량 출연했던 걸 지금까지 기억해 주신다. 또는 '누구 씨 둘째가 ㅇㅇ일보에 만화를 그리잖아' 하시는데, 역시 연재가 종료된 지 무척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면 70대 이상 어르신들에겐 공중파 텔레비전과 일간지의 위력이란 대단한 것이다.


그 외 온라인 동호회나 취미 관련 모임 등 또래 사람들에겐 '여행작가입니다'라고 첫인사를 합니다. 어색할 땐 여행 얘기가 최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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