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여기 좀 등록해봐요!"
때는 바야흐로 2주 전이다. 토요일마다 다니고 있는 댄스학원에 막 도착한 나에게 동생님이 달려오며 말했다. 그는 이미 한양대에서 창업하여 활동하고 있는 휴학생이다. 나이는 나보다 한참 어리지만 학원의 댄스 등급에서만큼은 완전 선배이다. 그래서 학원에서는 존경심으로 대하려 노력 중이다. 문으로 들어선 나는 지난주에 배운 왈츠와 자이브 동작이 뭐였는지 당체 기억이 나지 않아 오늘도 죽었네 하는 표정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동생은 폰을 가리키며 다가왔다. 난 뭔가 촉 같은 걸 느꼈다. 내 눈에 등이 켜지며 물었다.
"응, 뭔데?"
"전에 얘기했던 K-Stratup에서 '스마트 창작터' 모집한데요. 4월 말까지래요. 우선 여기에 등록해봐요. 등록은 해놓고 꼭 활동은 안 해도 돼요. 그냥 해보세요."
나에겐 우수한 장점 하나가 있으니 바로 누가 해보라 하면 우선 다 하고 본다는 점이다. 밑져야 본전 아닌가? 해보고 아닌 것 같으면 그때 가서 안 하면 되잖아. 그리고 창업에 벌써 발을 들여놓아 일을 벌인 녀석이니 나보다 체험적 정보나 경험도 훨씬 많을 테지. 저번 댄스파티 때 그를 붙잡고 다짜고짜 창업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는데 그때 좀 많이 절박해 보였나? 그저 신경 써주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며 댄스 수업에 들어갔고 역시나 동작을 다 틀리며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날 밤 난 스마트 창작터에 등록을 마쳤다.
알고 보니 K-Starup은 국가 차원에서 창업을 도모하기 위해 나라에서 운영하는 창업시스템이다. 누구나 등록할 수 있고 매년 갱신되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대학교나 시설 중 한 곳에 등록하여 몇 달간 관리를 받는다. 난 당장은 창업계획은 없지만 그래도 중요한 경험 쌓기니 한번 해보자 하는 심정으로 등록했다. 한양대를 선택했다. 거기엔 다 이유가 있다.
한주 전쯤 VR(가상현실) AR(증강현실) 기사를 검색해보다가 내 눈에 확 띄는 정보가 있었다. 바로 '한양대'가 AR이나 MR(혼합현실)의 산실이라는 것이었다. 주인공은 바로 한양대 컴퓨터 소프트웨어학부의 박종일 교수님이시다.
박종일 교수님은 AR 개념이 생소하던 1993년도부터 AR을 연구해 국내 처음으로 혼합현실연구소(MRLab)를 한양대에 개설, 산업계와 학계에 AR을 뿌리내리게 한 선구자이며 현재 아톰앤비트(주)라는 회사를 운영 중이시란다. 즉 어마어마한 실력자 중 한 분임에 틀림없었다.
기사를 접한 내 눈알은 뿅 튀어나왔다. 한번 랩이나 회사로 쳐들어가야겠군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때 댄스학원 동생이 스마트 창작터를 권했었고 마침 한양대가 거기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난 한양대에 등록한 목적란에 아예 대 놓고 박종일 교수님을 꼭 집어 썼으나 과연 연결을 시켜줄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교수님이 그 학교에 계신다는 점만으로 나에겐 큰 위안이 되었다. 정 안되면 미리 연락드려 4월 중순에 열리는 VR AR 엑스포에서 한번 만나봐야겠다 생각했다.
어쨌든 등록을 마친 후에 여러 단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 비즈니스 모델 만들고 올리기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즈니스 모델이란 걸 만들어야 했다. 여기서부터 사실 난관에 봉착했다. 여태껏 '이런 것을 하고 싶어. 이런 걸 해볼까?' 하고 막연하게만 생각했었다. 그것들을 단 150자로 줄여 피칭 멘트를 만들고 그에 알맞은 비즈니스 모델을 세부적으로 생각하여 구축해야 했다.
처음엔 진짜 거짓말 안 하고 내가 원하는 걸 그대로 써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보니 아주 가관이었다. 완전 '세계 정복'할 기세였다. 세계를 제패한 알렉산더 대왕도 읽으면 놀라 뒤로 훽 넘어갈 전투적인 내용이었다. 옆의 도움말을 보니 '인류 번영'이나 '세계 평화'같은 말은 집어치우고 잘 생각해본 후 구체적이고 간결하게 쓰란다. 그래서 며칠간 끙끙대며 고심 또 고심한 끝에 꼭 필요한 말만 집어넣어 겨우 150자 이내로 써넣었다.
2) 첫인상 평가
다음은 내 비즈니스 모델로 첫인상 평가를 거쳐야 한단다. 즉 플랫폼에 올려진 48개의 비즈니스 모델 중, 참여한 사람들이 관심이 가는 것을 클릭해 간단한 설명을 읽어보고 첫인상은 어떤지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올려두고 반응을 보았다. 대략 참가자가 110명 정도 넘었는데 세상에나, 난 한 가지를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아마 좌절이라고 칭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이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난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관련 콘퍼런스를 찾아다니고 정보를 얻는 등 관심이 많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저 영화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로 여기는 것 같은 인상이 대부분이었다. 나 혼자 착각에 빠졌었나 싶기도 했다. 다른 인기 있는 모델은 20개 정도 첫인상 평가를 받았다면 나는 고작 7개 정도. 그것도 5명은 '좋아요'이고 나머지 2명은 '별로'.
'좋아요'도 대부분 게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고, '별로'를 누른 사람들은 딱 들어도 뭔지 잘 모르겠다는 의견이었다. 충격을 받은 나는 다시 비즈니스 모델 설명을 뜯어고치고 모델도 좀 바꾸고.. 암튼 매일매일 생각하고 고치고 생각하고 고치고를 반복하는 중이다. 이러다가 끝이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문득 CES 2018 의 VR 콘퍼런스에서 토론자들이 말했던 미국 대중들의 VR Awareness가 많이 부족하다란 말이 머리를 스치며 지나가더라. 딱 그 이야기가 아니던가? 미국 IT기업들이 어린 세대를 열심히 교육시키는 중이라 하더니만 한국도 오히려 못하면 못했지 큰 차이는 없을 듯했다.
'아, 이 분야에서도 VR AR 스티브 잡스가 나와 세상의 이목을 받아야겠구나. 그래야 대중의 관심을 모을 수 있겠는데' 한숨이 터져나오며 가슴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다행히도 한국에선 5G 서비스 상용화와 콘텐츠진흥원의 전폭적인 관심으로 VR AR 인기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나마 휴 하고 있지만 지구를 한번 뒤집을 만한 폭발력 있는 사건이 터지긴 터져야 함을 많이 실감했다.
참고로 비즈니스 모델과 관련하여 첫인상 평가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팀들은 대부분 '공유서비스 앱'부문이었다. 그리고 난 아직 계획만 있을 뿐 팀원이나 팀은 없는데 팀을 갖추고 피칭 영상이나 랜딩페이지를 제대로 갖춘 팀의 평가가 대체로 높았다.
내 것을 고치면서 인기 있는 팀들의 비즈니스 모델이나 피칭 멘트, 올려놓은 것을 살펴보고 나름 분석하여 나도 한번 써먹어보는 등 배운 점이 꽤 있었다고 생각한다. 좋은 경험이었다.
3) 가치제안 캠퍼스 제작
이제 비즈니스 모델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볼 차례이다.
다음의 영상에서 나온 것과 같은 표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이건 자기가 직접 해봐야지 설명을 아무리 해도 이해가 쉽지 않다. 하면서 느낀 건 생각할 것이 이리도 많고 내 주장에 모순점이 있고 하나하나 따지기가 까다로웠다. 정말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오늘도 한차례 또 고쳤다.
4) 피칭 동영상, 랜딩페이지 만들기 등의 온라인 교육을 마치게 된다.
그다음은 오프라인 교육을 받고 멘토링을 하는 등 이후의 일정이 이어진다. 생각보다 일정이 꽤나 빠듯해 보였다. 하지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거니 능력껏 한번 용기를 내보는 게 중요한 거 같다.
스마트 창작터 주소 :
스필버그 감독이 만들고 카메론 감독이 도와주었다던, 그 입소문 자자한 VR 주제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이 개봉했다. 참으로 오랫동안 기다려온 영화이다. 내가 상상하고 보고 싶은 가상현실을 과연 어떻게 그렸는지 분석하면서 관람해야겠다. 아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게 즐기자. 그게 바로 가상현실의 묘미이니까.
스필버그 감독을 꼭 한번 뵙고 싶다는 희망을 남기며 너무나도 멋진 영화 트레일러를 아래에 흘려본다.
2018년 5월 10일 현재 내 아이디어에 대한 첫인상평가 결과는 다음과 같다.
부정적인 피드백의 대부분은 내가 쓴 내용이 부족하고 어떤 것인지 감이 안온다는, 좀더 사업계획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고 쉽게 써야 함을 일깨워주었다.
난 지원을 받아 창업할 것이 아닌 예비창업가이기에 그저 스타트업이 어떤 것인지 한번 엿볼 수 있는 교육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내 아이템도 한번 실험해보고 말이다. 다음번에 진짜 할때는 더욱더 신경써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보람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