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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Jan 22. 2023

4. 뱀파니아 - 2


 이안은 넋을 잃은 채 주변을 바라보았다. 한 젊은 남자가 연기 사이로 나타나더니 그의 앞으로 스르륵 다가왔다. 군인 복장을 한 그는 목이 굵고 건장한 체구에 창백한 피부, 길게 일자로 쭉 빠진 코, 새빨간 입술, 숱 많은 짙은 눈썹과 짧게 자른 검은 머리, 충혈되어 붉은 두 눈까지, 한마디로 잘생긴 미남이라 할 순 없지만 건강미가 넘치고 나름 매력적인 외모라고 볼 수 있었다. 그의 발놀림이 몸집과 안 어울리게 가볍고 경쾌하였다. 


 그러고 보니 거리에서 딸가닥거리는 구두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행인들의 움직임이 굉장히 조용하다는 걸 이안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는 마음속으로 여기 있는 동안은 저들처럼 걸으려 노력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군인 복장의 그 남자가 엄청 반갑다는 표정으로 다짜고짜 이안을 덥석 껴안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이야, 정말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저를... 아세요?”

“뱀파이어 꼬마이지 누구겠어? 아, 맞다. 날 몰라보는 게 당연하지. 그러나 곧 알아볼 거다. 아주 건강해 보이는군. 자, 여권이나 내놓지 그래. 아무리 반가워도 내 할 일은 해야 하니까.”


 여권 검시관인 그는 처음의 무척 반가운 척에서 갑자기 사무적인 태도로 바뀌더니 불쑥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데 이안은 깜짝 놀랐다. 얼굴은 그리 안 보였는데 그의 손이 노인장처럼 쭈글쭈글하고 손톱 또한 때가 껴서 시커멓고 엄청 길었던 것이다. 여권을 건네받자 그는 인상을 팍 쓴 채로 이리저리 훑다가 사진 면에서 손을 멈추었다. 주름이 살짝 진 입가 끝에 한껏 비웃음을 머금은 채 그가 새초롬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안 드보르자, 사진이 웃기게 잘 나왔군. 여권을 보니 여긴 처음이네. 뭐, 들어오자마자 눈알을 두리번거리며 처음 온 촌티를 줄줄 흘렸지만 말이야. 그래, 여긴 무슨 볼일이지? 누굴 만나러 왔나?”


 그는 계속해서 이안을 잘 안다는 듯 잘난 척하며 말을 내뱉었다. 이안은 좀 거슬렸지만 꾹 참고 대답했다.


“네. 누굴 좀 보려고요.”

“누구? 샤를르 리?”

“네. 어떻게 아세요?”

“너 같은 이가 하나가 아니거든. 여기서 그는 아주 유명하니까.”


 ‘유명하니까’ 부분에서 남자의 표정이 비틀어지고 입술 끝에 비웃음을 다시 머금었다. 혼자 뭐라고 시부렁거리기도 했는데 좋은 말은 아닌 듯했다. 서로 초면인데 그가 왠지 무례한 것 같아 이안은 기분이 상하였다. 그는 여권에 입국 도장을 찍고 돌려주었다. 이안은 받자마자 자리를 뜨려 했다.


 그때 그가 불쑥 이안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멈춰 세우더니 반대쪽으로 일부러 돌리는 것이 아닌가? 이안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노려보자 그는 뾰족한 아래턱을 살짝 내밀어 가리키며 말했다. 


“이봐, 꼬마. 샤를르 리는 그쪽이 아닌 저 예배당에 있어. 굉장히 유명해서 그를 만나 뵙는 건 다들 대단한 영광으로 알지. 하지만 난 아니야. 난 그의 본모습을 알거든. 그와 인연도 좀 있고 같이 지내봤었으니까. 만약 안 그랬다면 다른 이들처럼 그분에게 존경을 보이고 최대한 예의를 갖추라고 너에게 말했을 거야. 그분 앞에서 항상 고개를 내리고 절대 허리를 펴지 말라고 말이야. 하지만 넌 그럴 필요가 없어. 왜냐고? 넌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으니까. 절대 쫄지 마, 꼬마. 그럼 가봐. 다음에 또 보자고.”


 이안은 들은 척 만 척 여권을 품 안에 잘 집어넣었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에 두른 그의 팔을 홱 뿌리치며 급히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가 턱으로 가리킨 고딕 예배당으로 향하는데 문득 뭔가가 이안의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는 몸을 돌려 막 떠나려는 검시관을 불러 세웠다.


“저기요. 근데 여기에 들어오다가 목격한 그 징그러운 것들은 도대체 뭐지요?”


 군인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더럽다는 듯 오만 인상을 다 찌푸렸다. 그리고 신경질적인 어조로 쏘아붙였다.


“못 알아보겠어? 아니지, 당연히 못 알아보겠지. 그것들은 집 지키는 개들이야. 엄청 나이 먹은 개들이지. 훗훗.”


 검시관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내뱉었다. 이안이 다시 노려보자 그는 웃음소리와 함께 점차 희미해지더니 뿌연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안은 멀리 서 있는, 건설된 지 매우 오래되어 겉벽과 조각 장식물이 까맣게 변색이 된 예배당으로 향하였다. 그것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으로 천장이 찌를 듯이 수직으로 솟아오른 뾰족한 첨탑들과 그 위에 거꾸로 세워진 십자가들, 아름다운 채색 유리로 장식된 거대하고 둥근 스테인드글라스 장미창들, 정 가운데 지붕 꼭대기 종루에는 거대하고 투박한 청동종이 매달려 있었다. 날개를 펼친 검게 변색된 천사상들이 건물 외벽과 지붕, 정문 주위를 둘러가며 띠처럼 따다닥 붙어있었다. 흡사 여기가 어디인지 모른 채 딱 이 건물만 따로 떼어내 보았다면 로마의 바티칸시티 안의 천사의 전당 같이 느껴졌으리라.


 힘껏 달려가는 마차를 앞에서 여러 차례 보낸 후에야 그는 혼란스러운 대로를 건널 수 있었다. 롤리마을에선 거의 들리지 않던 그의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조용한 이곳 길가에서 놀랍게도 살며시 들리었다. 사실 그것은 인간들에겐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청각이 예민한 뱀파이어들은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를 신기하게 여겼는지 곁을 지나치던, 파란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의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안은 그녀에게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곳 군중을 흉내 내어 살살 날듯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음은 급한데 이리 조심하여 걷자니 속도가 나지 않아 금방 답답해졌다. 


‘턱시도라도 좀 챙겨 가지고 올걸.’ 


 그가 입은 하얀 후드티와 청바지는 마치 먼 미래에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온 것처럼 중세풍 의상들 사이에서 엄청 튀고 어색해 보였다. 지나치는 이들의 흘끗거리는 시선 역시 은근히 뜨거웠다. 결국 참지 못한 그가 ‘에잇, 모르겠다.’란 심정으로 후다닥 달리기 시작했다. 한순간 길 위를 지나던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쏟아졌다. 그만큼 길을 내딛는 발소리가 저들에게 쩡쩡 울려 퍼진 것이리라. 


 어떻게 왔는지 모르게 겨우 정문에 도착하였다. 아무 장식이 없는 시커먼 나무문은 그 크기만으로도 으리으리하여 올려다보는 이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보초를 서거나 검문하는 자는 없었다. 그가 발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머리보다 위에 위치한 청동 돌쩌귀를 두 손으로 힘겹게 잡고서 세차게 내리쳤다. 


 잠시 후, 둔탁하고 낡은 도르래 소리가 들리더니 육중한 문이 서서히 안으로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마치 문에 눈이라도 달린 양 스스로 뒤에서 닫히었다. 실내는 아주 컴컴했다. 불현듯 머리 위 천장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한여름 밤에나 보일법한 밝은 별무리의 행렬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한꺼번에 쏟아질 듯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수백만을 헤아리는 별들의 섬광이 사방으로 눈부시게 퍼져나갔다. 그 자체로 은은하면서도 창백하게 아름다운 천장에 감탄한 나머지 그의 파란 눈동자가 점차 몽롱해지고 입술은 저절로 벌어졌다. 별들은 성운을 이루고 은하수가 되어 우주 창조를 일으키는 것처럼 천천히 천장을 돌아다녔다. 그런 움직임과 모습이 매우 경이롭고 신비스러웠다. 별안간 한 무리의 성운이 천장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그렇게 여러 번 왔다갔다 달리더니 중간에서 만나 서로 뒤엉키며 천장에서 회용돌이쳤다. 그것들이 쾅 부딪치며 대폭발했다. 별 파편들이 아래로 반짝반짝 떨어져 내렸다. 


“앗!” 


 깜짝 놀란 그가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그것들의 비를 피하려는 듯 몸을 앞으로 웅크렸다. 두 눈을 감았다. 그렇게 몇 초나 흘렀을까? 영화나 연극이 끝나고 느껴지는 적막이 그의 주위를 감싸 흐르더니 어떤 알지 못할 긴장감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처음 들어올 때처럼 주위가 다시 어둑해져 있었다.      


 “반갑습니다.”     


 예배당 내부를 울리며 들려오는 그윽한 목소리와 함께 불이 붙은 양초 한 자루가 환영처럼 저 앞에 홀로 등장하였다. 그것이 기울어져 옆의 가지촛대에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양옆으로 싸악 번지며 실내의 모든 양초에 불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이안이 눈을 들어 환해진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엄하면서도 우아한 고딕식 천장을 웅장한 기둥들이 지그재그로 떠받치고 있는 중세 예배당이었다. 유럽의 여느 유명한 고딕 성당들처럼 아주 세련되고 고풍스러웠다. 천국에서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는 천사들의 모습이 스테인드글라스 색유리로 그려져 있었는데, 거기에서 반사된 은은하고 다채로운 빛이 예배당 내부를 더욱 신비롭게 조성하여 주었다. 마호가니로 만든 흑갈색 회중석 의자들이 앞을 향해 가지런히 놓였고, 그것이 끝나는 곳에는 옅은 보라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제단이 높이 세워져 의자들이 놓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단 뒤로는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펼친 채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내밀고 있는, 무척이나 간절히 애원하는 표정과 자세를 취한 천사상이 놓여있었다. 눈부시게 하얀 대리석상이었다. 그것의 날개 끝이 거의 천장 바로 밑까지 다다르고 있어 그 규모만으로 회중석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거꾸로 매달린 십자가 목걸이를 가슴에 걸은 천사상의 두 눈은 무척이나 슬퍼 보였다. 십자가에 박힌 보석들이 영롱하게 반짝이었다.


 샤를르 리는 바로 그 상 옆에 서서 그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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