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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Feb 26. 2023

4. 뱀파니아 - 3


 보라색 턱시도와 나풀거리는 소매, 큰 칼라가 달린 하얀 셔츠를 안에다 받쳐 입은 샤를르 리의 옷 위로 다이아몬드 수십 개가 달린 목걸이가 반짝이며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위로 수도원의 수사가 입는 보라색 망토가 어깨에 둘러져 있었는데 어깨 장식 역시 사파이어와 루비 등 화려한 보석으로 꾸며져 촛불의 은은한 빛에 반사되어 눈이 다 부실 정도였다. 그가 전보다 훨씬 더 멋있어 보인다고 이안은 생각했다. 역시 옷이 날개인가 싶었다.


 그러나 그의 거만스러운 표정이나 자신은 아주 똑똑하다는 걸 자꾸 드러내고 싶어하는, 가식적이면서도 꿰뚫어 보는 그의 시선이 이안을 또한 불편하게 만들었다.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가 시선을 올려 천사상을 우러러보며 운을 뗀 후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안 옆에 나란히 서더니 그것을 같이 바라보며 부드러우면서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아마 뱀파이어에 대해 잘 모를 겁니다. 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래도 저희들의 시조인 ‘아자젤’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으시지요?”


“마왕 ‘블랙수트’의 친구였다는 자 말인가요?”

 

 이안은 예전에 메리슨 폰데 캠프의 실크롱에게 들었던 내용을 회상하며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하하하, 항간에는 그런 소문이 돌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답니다. 그 당시 기록들이 워낙 오래되어 중구난방인데다 여태까지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다고 보기 때문이죠. 뱀파이어라도 예외는 아닙니다만.”


“하지만 당신들은 영원히 사는 불사의 몸이지 않습니까? 말뚝에 심장이 박히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후훗. 마치 본인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당신 역시 이제 저와 같은 동족인데 말이죠.”


 그의 입술 끝으로 어렴풋이 빈정거리는 조소가 걸리었다. 이안은 살짝 마음이 상했지만 아직도 자신이 저들과 같은 존재란 사실이 믿기지도 않거니와 실감조차 나지 않았다. 아마 그의 말처럼 뱀파이어로 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것 같았다. 이제 일 년이 좀 지났으니까. 

 그럼 어느 정도의 시간이 더 흘러야 현재의 자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 평생 그렇지 않았으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왜 저 천사상이 이곳에 있는지 압니까?”


 샤를르 리가 묻자 물끄러미 상을 바라보던 이안이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자기 질문에 스스로 대답했다.


“바로 저분이 ‘아자젤’님이십니다. 보다시피 원래 태생이 천사이셨지요. 인간 세상에서는 저분을 두고 ‘타락천사’이니, ‘신을 배신한 변절자’, ‘악마’,‘사탄’이니 많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그건 순전히 다 정신 나간 헛소리입니다. 저분은 신을 무척이나 사랑하셨습니다. 진심으로요. 하지만 스스로 ‘자유의지’를 깨우친 이후 누구에게도 굴복하거나 종속되기를 거부하신 겁니다. 그래서 저 상의 모습처럼 하늘의 신을 향해 온몸으로 애처롭게 갈구하셨지요. 바로 이렇게요.


 저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 싶습니다! 당신처럼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말입니다!”     



 샤를르 리는 마치 저 천사상으로 빙의라도 된 것처럼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힘껏 뻗으며 정열적으로 외치었다. 특히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라는 문구는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강조하는데 흡사 그의 두 눈에서 불기둥이 튀어나와 주변을 불태울 것 같았다. 이안은 신기한 듯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를 얼음처럼 차갑고 돌처럼 차분한 자로 늘 여겼었다. 이처럼 그의 흥분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샤를르 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넌지시 떴다. 그리고 원래의 침착함을 되찾은 냉정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신은 끝까지 그의 갈구를 거부하셨습니다. 오히려 감히 그런 요청으로 대들었다며 그분과 동조한 다른 천사들까지 다 내치셨지요. 바로 이 땅 아래로 추방시킨 것입니다. 동시에 그들에게 무서운 저주를 내렸습니다. 어둠 속에서 살며 일반적은 음식이 아닌 다른 생명체의 피를 빨아야만 살 수 있는 흡혈귀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감동적이게도 그분만은 저주를 내린 신을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왕국을 건설하시고 많은 모범을 보이며 사셨지요. 이렇게 왕국 중심에 예배당을 지어놓고 항상 신을 기리며 사셨답니다. 겉으로 표현은 안 하셨지만 가끔 하늘나라의 천사였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듯 보였다고도 전해집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지옥의 천사’라 부르셨지요. 그분은 또한 어렵게 얻은 자유를 마음껏 즐기셨어요. 인간 세상을 구경하시고 다양한 친구도 사귀시고. 그러나 단 하루도 신께 기도 올리는 걸 잊으신 적이 없답니다. 저 역시 그런 숭고하면서도 고귀한 뜻을 이어받아 계승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저는 뱀파니아에 있을 때 주로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지요.”


“그럼 지금 그분은 여기 계시나요?”


“누구요? 저분이요?”


 이안이 묻자 샤를르 리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쏘아붙였다. 그리고 천사상을 고개턱으로 가리키자 이안은 그럼 그분밖에 더 있겠냐며 살짝 삐진 표정으로 그를 째려보았다.

 그는 얼른 장난기를 얼굴에서 지우더니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차갑게 가다듬었다.


“음음, 아자젤 님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영원한 잠에 들으셨죠. 바로 저 상 아래에 그분의 관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분이 영전에 드신 무덤인 셈이죠.”


“영원한 잠이라니요?”


“자살을 하셨거든요. 혹시 오해할지 몰라 미리 말하는데 스스로 심장에 말뚝을 박는 행위는 하지 않으셨어요. 하하.”


 그는 한쪽 입술을 올리며 살며시 웃었다. 언제부터 자신과 친했다고 저리 농담까지 스스럼없이 하는지 이안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다 불현듯 어떤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바로 자신이 그동안 너무 무지한 상태로 지냈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뱀파이어면서 그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조차 없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뱀파이어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건 고작 피를 먹고 산다던가, 어둠 속에서도 대낮처럼 잘 볼 수 있고, 바람처럼 조용히 빨리 달릴 수 있으며, 심장에 말뚝이 박히면 죽는다는, 그 말뚝 건은 직접 겪은 적이 있어 아주 생생히 배울 수 있었다.


‘뱀파이어가 된 ‘나’란 존재에 대해 그동안 너무 모르고 지냈었구나.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도.’


 그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에 대한 철저한 무시와 무지에 대해 후회가 되고 부끄럽기도 하여 어쩔 줄 몰랐다. 앞으로 자신과 뱀파이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리라 결심했다.


“오실 거라 미리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래, 부탁드린 것은 가지고 왔나요?”


 샤를르 리가 본론에 들어가며 사무적인 어조로 바뀌었다. 이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품에서 병 하나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어두운 곳에서 보니 병 안의 붉은 피가 그새 많이 검어진 듯싶었다. 시간이 좀 흘러서 그런가? 약간 탁해 보이기까지 했다. 거인 발로르의 발가락에서 채취한 피였다.


 병을 건네받은 그는 돌연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이리저리 흔들어보더니 한 손으로 병의 목을 잡고 다른 손으로 그 바닥을 소중히 받쳐 들었다. 그리고 천사상 뒤로 나 있는 문으로 다가갔다. 그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몸을 돌리더니 아직도 천사상 옆에 멍하니 서 있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저를 따라오세요.’


 그는 이안에게 목소리가 아닌 머릿속으로 말을 건네었다. 이안은 갑자기 그렇게 대화방식을 바꾼 것에 대해 약간의 불안을 느꼈다. 그러나 말없이 그를 따라갔다. 


 좁은 통로를 지나자 로마네스크식 회랑이 나타났다. 옅은 분홍색 기둥들이 열주처럼 줄을 맞춰 서 있고 실물 크기의 대리석 조각상들이 사이사이에 세워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암흑의 어둠이 배경으로 깔린 가운데 조각상들에게만 약한 핏빛 조명이 비쳐 들고 있었다.


 이안이 고개를 들어 그중 하나를 유심히 관찰하였다. 의사나 과학자가 입는 하얀 가운을 입힌 조각상의 왼쪽 가슴에 위치한 주머니에는 형광펜과 볼펜, 종이와 포스트잇 같은 것들이 삐져나와 있었다. 그것의 얼굴은 젊고 아름다웠는데 윗입술 아래를 비집고 두 송곳니가 다소곳이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한 손에는 진짜 현미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유리 비커를 들고 있었다.


 그 옆으로 요리사 복장을 한 조각상이 있었다. 진짜 냄비와 국자를 양손에 쥐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신체와 얼굴만 조각품이지 입힌 의복이나 소품들은 다 진짜였다.


 그가 구경하느라 이리저리 서성이자 앞서가던 샤를르 리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기다려주었다. 이안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는 다시 길을 떠나며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면서 마음속으로 말을 건넸다.


‘뱀파니아의 역사에 혁혁한 공을 세우신 위인들이지요. 피를 빨며 사는 괴물로만 알려진 우리도 이렇게 역사를 이루어가는 중이랍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분들을 백 년에 한 번씩 선정하여 기리고 있지요. 아, 마침 내년에 시상식이 개최될 예정인데 한번 오시겠습니까? 원하시면 초대장을 보내드리지요. 그 귀여운 여자친구분과 함께 와도 좋겠군요. 초대장 두 장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시상식 밤에는 이곳에서 가장 화려한 가면무도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아주 볼만할 겁니다. 뱀파이어의 무도회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고 아주 유쾌하기로 유명하죠.’


 수진을 언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뱀파이어가 아니지 않은가? 여기 와서 만인의 눈길을 끄는 살아있는 제물이 되라고? 그러나 그녀는 여기에 도착하기도 전에 입구에서 그 끔찍한 것들에게 먼저 당하고 말 것이다.


“근데 동굴에 있던 그것들은 도대체 뭐지요? 정상은 아닌 것 같던데요. 그것들도 뱀파이어인가요?”


 이안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묻자 샤를르 리는 발걸음을 멈춰 서버렸다. 그는 옆에서 샤를르 리의 표정을 살피었다. 아까 여권 검사하던 군인과 마찬가지로 더럽고 추잡한 것을 보고 만진 것 마냥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답해주기도 싫은지 불쾌한 표정을 강하게 풍기었다. 그러나 이안이 집요하게 뚫어져라 쳐다보자 그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겨우 입술을 열었다.


“그것들은 ‘강시’라고 불립니다. 우리 뱀파이어의 수치이자 숨기고 싶은 쓰레기 같은 것들이죠. 그들 역시 피를 빠는 흡혈귀이긴 하지만 우리처럼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않고 지능도 없어, 그저 죽지 못해 사는 하등동물일 뿐입니다. 아니, 인간 세상에선 뒷골목이나 하수구에 사는 악귀나 악령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더군요. 암튼 가까이하기도 싫고 떠올리기조차 싫은 아주 더러운 미물들입니다.”


 그는 마치 보여주기 싫은 치부를 들키기나 한 것처럼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갈라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이안은 다시 덤벼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죠?”


“뱀파이어에게 피를 너무 많이 빨린 탓이지요. 알겠지만 뱀파이어에게 한번 피가 빨린다고 희생양이 흡혈귀가 되진 않습니다.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적어도 세 번은 빨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문 뱀파이어의 적당한 양의 피를 마셔야 하지요. 거기에는 우리가 꼭 지켜야 할 원칙과 절차가 있어요. 귀찮기도 해서 웬만해선 우린 뱀파이어를 만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끔 그것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구는 문제아가 어디고 꼭 있는 법이지요. 그래서 원칙을 따르지 않은 채 제멋대로 빨고 피를 먹이다가 완전히 죽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살았다고도 할 수 없는 저런 괴물을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다행히 그 수가 많진 않아요. 신고가 들어오면 바로 전담팀을 파견해 처치해 버리니까요. 그래도 몇몇은 당신이 목격하신 것처럼 그렇게 데리고 있답니다. 문을 지키는 파수꾼엔 딱이거든요. 산 생명체의 피와 살을 무자비하게 먹어치우니까요.”


 이안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을 느끼었다. 그리고 고개를 내저으며 툴툴거렸다.


“그래도 여기도 브라잇 동맹에 속해있는데 뱀파이어가 아닌 다른 동맹원이 방문할 수 있게 개방되어야 하지 않나요?


“맞는 말씀입니다. 동맹원이 뱀파니아 방문을 미리 알려주면 입장 시간을 정해 한꺼번에 들이고 있습니다. 그땐 그것들을 입구에서 깨끗이 치워놓지요. 하지만 그 외에는 우리 방식대로 하고 있습니다. 바꾸고 싶지도 않고요. 여긴 뱀파이어들의 왕국이니까요.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으로 건설한 유일한 안식처이지 않습니까?”


 샤를르 리는 더 이상 추잡한 것을 입에 올리기 싫다는 태도로 재빨리 몸을 돌리더니 종종걸음으로 나아갔다. 이안이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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