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indy Hwang 황선연 Mar 24. 2024

8. 수진이 조선 사행단에 끼다. - 4

 

 주방으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방으로 갈 적에도 인적 하나 없이 숙소와 마당이 조용했다. 다들 밖으로 외출했나 보다. 수진이 겨우 방으로 상을 들여보내는데 지원이 마침 깨어나 침상 위에 앉아있었다. 표정은 전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그런데 이번엔 그가 그녀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죄 없는 눈만 소매 끝으로 계속 비벼대는 것이 아닌가? 마치 악몽에서 깨어나려 노력하는 듯했다. 


 그러다 아까 잠결에 들었던, 그녀가 말한 내용까지 다 기억해 내곤 본인의 얼굴이 완전 사색으로 변하였다. 혼자 “끄응”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감더니 마침내 결심한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가 갖다 놓은 상 앞으로 다가와 마주 앉았다. 수진은 좀 떨어져 꿇어앉은 채 마주 잡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애절하게 앞뒤로 살짝씩 흔들어 댔다. 이윽고 그가 얕은 한숨을 내쉬더니 서로 꽉 붙어 떼어내기가 쉽지 않아 보이는 무거운 입술을 겨우 벌리었다.


“넌 어디서 왔느냐? 네가 통과한 그 검은 구멍은 도대체 무엇이고?”


“아저씨, 전 지금으로부터 몇 백 년이 지난 미래에서 과거로 넘어왔어요. 제가 온 시대는 조선이 끝나고 ‘대한민국’으로 불리고 있고요. 수도 서울, 아니 한양은 그대로예요. 전 한양에서 남쪽으로 많이 떨어진 ‘롤리마을’ 출신이에요. 할머니와 살고 있고 음, 조선시대와 다른 점이라면 지금 북쪽은 북한, 남쪽은 남한으로 나라가 반으로 분단되어 있어요. 북한은 공산주의이고 남한은 민주주의 나라예요. 그리고 또...”


“이 무슨 해괴한 말들을 떠드는 것이냐? 얘가 미친 거 아니야? 아니지, 혹 내가 미친 건가?”


“믿지 못하실 거예요. 하지만 저와 아저씬 같은 한민족이에요. 아저씨가 저의 선조가 되시고요. 이렇게 말이 통하잖아요. 그리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제가 아무도 모르는 고아가 되었단 사실이에요.”


 말을 마친 그녀의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코를 훌쩍거리더니 소매로 눈을 비비며 앙앙 서럽게 울어댔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그는 다시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부터 한숨을 대체 몇 번이나 내쉬었는지 그 역시 지긋지긋하기만 했다. 겨우 마음을 가다듬은 후 그가 인자한 목소리로 그녀를 어르고 달래었다.


“좋다. 너의 이상하고도 기이한 등장이 영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조선 아이를 여기 중국 땅에다 나 몰라라 내버려 두는 것도 이치는 아닌 듯싶고. 네가 사행단에 낄 수 있도록 정사에게 잘 말씀드려 보겠다. 나중 조선에 들어가면 차차 너의 거취를 생각해 보자꾸나. 그때까진 나의 하인으로 있으려무나.” 


 수진은 손바닥으로 눈물콧물을 훔치고 벌떡 일어나서 넙죽 절을 하였다. 롤리마을의 지원아저씨와 인품 면에서 역시나 똑같이 자상하고 좋은 분 같았다. 다만 지금 앞에 계신 분이 좀 깐깐하여 성깔이 있어 뵈긴 하지만. 


“앞으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밥값은 꼭 하겠습니다.”


“그래, 네가 먹은 값은 하여야 할 것이야.”


 지원은 다시 아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어젠 충격으로 완전 정신이 나간 것이고, 자고 일어났더니 아직 다 돌아온 건 아니지만 그나마 멀쩡한 면이 있는 것 같아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그녀의 정확한 출신이나 고향에 대해선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 차차 알아봐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제야 그는 배가 무척 고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손수 끓여 온 죽을 바라본 후 한 입 떠먹어 보았다. 어매, 맛이 오묘한 게 좀 이상했다. 하지만 가지고 온 성의를 봐서 꾹 참고 바닥까지 박박 긁어먹었다. 설령 먹고 죽기나 하겠어?라는 솔직한 심정으로 말이다. 상을 물리려고 일어난 그녀의 등 뒤에서 그가 불러 세웠다.


“얘야, 그런데 말이다. 우리 둘이 좀 꾸며야 할 일이 있을 것 같구나.”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흠, 이리 오너라아~”     


 여긴 조선의 한양이 아니었다. 중국 청나라 연경의 첨운패루 안, 거리 한복판에서 조선말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주변을 지나던 중국인들과 외국인들이 조선의 도포 복장을 한 박지원과 그 옆에 얌전히 서 있는 소녀를 향해 도대체 무슨 일인고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었다. 압록강을 건넌 이후 언제나 조용히 문을 두들겼을 뿐 이리 오너라 부른 적이 없었는데 그는 일부러 크고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질렀다. 


 안에서 놀라 한걸음에 달려 나온 하인이 문을 열더니 무슨 큰일이 났느냐며 그의 안색과 몸을 샅샅이 살피었다. 별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그가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뒤따라 들어오는 수진에게로 시선을 옮기었다. 지원이 뒤돌아보며 그에게 명하였다.


“급히 상의할 일이 생겼다고 정사 어른께 바로 아뢰어라.”


 곧 수진은 사행단의 최고 어른인 정사 박명원 앞에서 최대한 불편한 자세로 죄인처럼 두 무릎을 꿇어앉아야 했다. 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어 그의 외양을 살피었다. 단정한 몸가짐에서 풍겨 나오는, 높은 사람으로서의 위엄과 품위를 지니고 계셨다. 가느다란 그의 눈 안의 맑은 눈동자는 매우 인자하고 자상해 보였다. 그러자 그녀의 마음이 조금 놓이었다. 

 

 고개를 떨어뜨린 채 방바닥만 쳐다보고 있는 그녀 옆으로 비켜 앉은 지원이 열심히 그녀에 대한 사연을 늘어놓고 있었다. 솔직히 그녀가 듣기에도 좀 지나치고 과장된 면이 없진 않았지만, 뭐 지금 상황으로선 그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갑자기 벽에 생겨난 구멍에서 아이가 튀어나왔다고 말한다면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당신이라면 바로 믿겠는가? 미쳤다는 말만 들을 게 뻔하다. 직접 겪은 당사자만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 일인 것이다.


 또 한편으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아직도 순수하고 순진하여 지금 보면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터무니없는 미신들을 철석같이 믿고 따랐으며, 여전히 숲에는 도깨비와 귀신이 설쳐대고 있다 여기는 터였다. 그러니 만약 갑자기 방 안에서 튀어나온 그녀가 그런 존재들 중 하나라고 지목된다면 바로 멍석말이로 잡아들여 죽일지 살릴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마녀라고 화형까지 치르지 않았던가? 


 그래서 지원은 그동안 갈고 닦아왔던 모든 학문과 교양을 총동원하여 즉, 잔머리를 최대한 쥐어짠 후 다음과 같은 기가 막힌 이야기로 정사에게 아뢰었다.     


“삼하(三河)에 못 미쳐 벌려진 놀이터에서 말입니다. 연경에서 빌어먹고 사는 사당패를 우연히 만났는데 아 글쎄, 이 얘가 그 속에 끼어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당패 두목이 얘를 너무 심하게 때리더이다. 여자아이에게 이건 좀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싶어 제가 직접 다가가 물어보았더니 아 글쎄, 조선의 계집애가 말도 못 알아듣고 밥값도 전혀 못 해 화가 나서 그런다고 불평하더이다. 얘를 붙잡고 자세히 물어보니 몇 달 전 조선에서 넘어온 장사치의 여식인데 강을 건너다가 아비와 어미는 떠내려가고 홀로 살아남아 그렇게 하루아침에 거지고아가 되어버렸고 어찌어찌하여 사당패까지 흘러 들어갔답니다.”


 거의 본능적이었다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 수진은 죽기 아님 까무러치기로 몸 안에 있는 연기력을 총동원하여 소낙비 같은 눈물방울을 방바닥으로 뚝뚝 흘리었다. 그러자 지원은 기회는 이때다 싶어 더욱 심금을 울리는 애절한 목소리로 사설을 이어갔다. 


“그러나 사당패일이 너무 고되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자 도망치려 했고 바로 붙잡혀서 그리 매를 맞고 있던 중이었소이다. 얘가 저의 도포 자락을 붙잡은 채 지금처럼 울면서 고향에 홀로 남아계신 할머니 곁으로만 보내 달라고 하도 빌기에 어쩔 수 없이 얼마간 사례를 한 후 그녀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정사, 그렇게 된 일입니다.”


 하며 그녀의 기구한 사연 설명을 겨우 마치었다. 


 정사는 유심히 들으며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고 안쓰러워했다. 비록 사행단의 인원과 직위에 따라 청나라로부터 매일 배당받는 양식이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혼자 먹기에 차고 넘치도록 들어오는 자신의 식량 얼마간을 떼어 줄 터이니 마음 편히 합류하라고 그녀를 허락하였다. 따스하고 인자한 미소도 함께 말이다. 수진과 지원은 속으로 기뻐하였다.      


 정사의 방을 가뿐히 나온 후 지원은 방으로 가서 좀 쉬겠다고 했다. 아직 그의 목소리에 감기 기운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주방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하인들을 돕기도 하고 배당받은 식량을 가지런히 정리도 하며 방청소까지 했다. 거의 저녁 어스름이 깔릴 때까지 몸이 부서져라 쓸고 닦고 한 후에야 겨우 허리를 펼 수 있었다. 가마솥 바닥에 조금 남은 고깃국에 식은 밥 한 덩이를 훌훌 말아 목으로 넘기었다. 


 그러나 일이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사관의 모든 방에서 끝없이 튀어나오는 설거지까지 도맡아 해야 했다. 하인들은 식모가 들어왔다고 좋아하며 자신의 일까지 그녀에게 마구 떠넘기기 일쑤였다. 우물가 앞에 앉아 접시를 닦던 그녀는 몹시 짜증이 나서 수세미를 그릇 위에다 퍽 집어던지기까지 했다. 생전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집안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급작스레 하려니 몸이 너무나 고되고 힘들었다. 더군다나 이리 더운 여름 날씨에 오죽하랴? 마음속으로 불평이 늘어나자 아까 지원이 언급한 사당패도 설령 이 정도 이상으로 부려 먹을까 싶었다. 


 불쑥 롤리마을의 외할머니가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던 할머니였다. 그 연세에 혼자서 다 하기 힘드셨을 텐데도 손녀의 학업을 위해 전혀 내색조차 하지 않으셨다. 그녀는 다시 할머니를 만나면 자신이 많이 도와드리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역시 사람을 철들게 하는 데는 고생만 한 것이 없는가 보다. 


 여담이지만 솔직히 할머니 입장에서는 그녀가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보다 그 시간에 열심히 공부를 하여 좋은 학업성적을 받아오는 걸 더 원하실 거라 작가는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이전 21화 8. 수진이 조선 사행단에 끼다. -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