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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Mar 09. 2024

8. 수진이 조선 사행단에 끼다. - 3


 이튿날 새벽은 천둥이 치고 큰비가 내렸다. 마룻바닥에서 올라오는 찬기에 지원은 잠이 깨었다. 몸을 부르르 떤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슬오슬 오한이 드는 것이 목도 컬컬하였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마침 아침상을 들고 오는 하인 장복을 발견하였다. 마루에서 대신 그것을 받으며 그가 말했다.

 

“오늘은 몸이 좀 안 좋아 쉴 터이니 점심때에 끼니 걱정 말고 나가보아라.”


 장복은 좋아라 하는 얼굴로 꾸벅 인사를 올리더니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보나마나 한 무리 모아가지고 어디 싸구려 주점에서 대낮부터 취해있으리라. 


 지원이 문을 열고 직접 상을 들여가는데 밥과 국 냄새가 방안에 훅 퍼지었다. 그녀를 깨울까 말까 그는 잠시 고민하였다. 수진은 따듯한 이불속에서 단잠에 빠져 있었는데 문득 롤리마을 할머니집에서 맡던 익숙한 냄새에 코가 먼저 반응하였다. 그녀는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밥과 국 냄새, 고소한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소고기를 넣은 뭇국 같았다. 그녀가 투정 부리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기지개를 쭉 켜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어제 일은 악몽을 꾼 거였어. 어서 나가 할머니가 차린 밥을 먹어야지. 

 그녀는 쓱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다. 


“어머나, 아직도 네!”


 그녀는 밥상을 내려놓는 박지원을 보며 열 번도 넘게 눈을 비비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다시 떠봐도 자기 방이 아닌 악몽에서 나오던 그 장소가 바뀌어 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쯤 되고 나서야 더 이상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완벽히 깨달았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쩌지.’


 그녀는 너무 걱정이 되어 잠은 완전히 날아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 생각도 안 나면서 그저 눈앞이 컴컴하였다.


“이리 와서 밥이나 한술 뜨려무나.”


 지원이 콜록거리며 자상하게 권하자 수진은 엉거주춤 침상에서 일어나 영 어색하고 불편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밥상머리에 앉아 그가 건네주는 수저로 소고기뭇국을 떠먹기 시작했다. 곧 눈물이 그녀의 두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찌하여 자신이 이리 되어버렸을까?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최 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살면서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할머니 속을 그리 썩인 것도 아닌.. 아, 맞다. 너무 공부를 못해서 천벌을 받은 게 아닐까? 성적표 때문에 할머니에게 꾸중받고는 홧김에 수업 땡땡이치고 서울로 놀러 갔잖아. 그리고 성적표도 숨길 수 있으면 숨기려고 했었고. 아, 그런가 보다. 하늘이 천벌을 내렸나 보다. 아이고,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나 좀 열심히 할걸.’


 그러나 지금 와서 아무리 후회를 한다 한들 이미 때는 늦었고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자신은 몇 백 년 전의 과거로 떨어진 것이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지만 현실이 그랬다. 그렇게 단정을 짓자 더 이상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묵묵히 무의식적으로 밥을 입안에 떠 넣었다. 


‘앞으로 어떡하지?’ 


 그녀는 반찬을 씹으면서 재빨리 자신의 안 좋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할머니 말자 여사는 성적표가 형편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의 손녀가 그리 잘나지 못했다고 성급히 판단했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의 수진은 그리 만만하게 볼 소녀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산전수전을 다 겪어보았기에 세상 어디에다 떨어뜨려 놔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는, 표현은 좀 그렇지만 바퀴벌레처럼 지독하고 처절하리만치 강한 생존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요즘같이 내전과 테러가 난무하고 앞날이 예측 불가능한 험난한 세상에서 참으로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장점이라 작가는 확신하고 또 확신한다. 


 그럼 또 누구는 이렇게 물어올 수도 있을 것이다. 롤리마을의 할머니댁에서 편안히 학교나 다니며 밥 한번 굶어본 적 없는 이 15살 소녀가 무슨 그리 대단한 산전수전을 다 겪었느냐고? 


여러분은 벌써 잊어버렸는가? 


 붉은 달이 뜬 밤에 한밤중의 사냥꾼 유령들에게 걸려 혼쭐이 났던 일, 


 딥언더니아의 석탄광산 아래 지하 정자에 갇혀있던 손오공이 풀려나자 거대한 동물석상들과 석승(石僧)들이 살아나 그녀를 무섭게 덮치며 마구 달려들었던 일, 


 요툰하임에선 진짜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었는데, 붉은 성에서 해골계단을 오르다가 해골들한테 공격당해 온몸이 꼬집히고 찢기는 등 난리통을 치렀고, 


 가장 클라이맥스는 지구 역사상 아주 사납고 포악하다는 육식공룡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열대분지에서 나 살려라 뜀박질도 했었다. 


 이미 목숨이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며 생지옥을 악으로 다 버티며 살아 나온 그녀였다. 그러니 과거로 건너왔다고 해서 그대로 자포자기한 채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녀를 높이 평가해 주어야 할 것이다.          


 거의 밥을 다 비운 수진은 대충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였다. 여긴 자신이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이다. 어떻게든 말이 통하는 고국으로 가야만 한다. 그리고 지원아저씨를 만난 것은 천만다행으로 어떻게든 그분에게 빌붙어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우선 조선으로 가야 한다. 그다음은 도착한 후에 생각하리라. 


 이렇게 결정이 나자 그녀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밥상 위에 조신하게 얹어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지원을 찾았다. 그는 어느새 그녀가 아침에 팽개치고 나온 침상에 누워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그녀가 발소리 안 나게 조용히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의 입술 사이로 앓는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아저씨, 식사 안 하세요?”


 지원은 그녀 쪽으로 향해진 고개의 눈꺼풀조차 뜨지 못한 채 힘겹게 속삭였다.


“감기 기운이 있는지 입맛이 없구나. 좀 쉬어야겠다.”


 아픈 사람한테 본론을 다짜고짜 들이대는 것이 예의가 아닌 줄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지금은 보통 상황이 아닌지라 우선 그 말부터 꺼내었다. 두 손까지 싹싹 빌어가며 말이다.


“아저씨, 제발 저를 조선으로 데리고 가주세요. 여기 남긴 싫어요. 네, 아저씨? 심부름이나 시키시는 거 다 할 테니 제발 데리고만 가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지원은 잠이 들려는지 마침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그냥 알겠다 답하고 그대로 돌아누워 버렸다. 일단 승낙을 받은 것으로 여긴 그녀는 마음이 조금 놓이었다. 그래서 그가 깨어났을 때 뭔가 자신이 쓸모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죽을 쑤어 드리기로 결정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곁을 떠나선 안 된다. 어떻게든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야 한다. 지원아저씨 이마에 손등을 대어 보니 열이 좀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밥상을 들고서 문밖으로 나갔다. 마당을 지나 안채 가까이 주방을 찾아 들어갔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마솥들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가마솥이라, 그녀는 그것을 보자마자 덜컥 겁이 났다. 집에서 쓰던 오븐이나 가스레인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죽을 조금만 쑤려고 하는데 저 큰 데에다 어떻게 하지?’ 


 그녀는 걱정 어린 표정으로 주방을 뒤져보았다. 다행히 토기로 구운 냄비 비슷한 뚝배기를 하나 찾아냈다. 사극에서 본 건 있어 가지고 부뚜막에서 타고 있는 장작을 조금 꺼내 그 위에다 뚝배기를 얹었다. 그 안에다 가마솥에서 꺼낸 밥 한 덩이와 물을 붓고 끓이기 시작했다. 예전에 할머니가 이것저것 넣어 같이 끓이는 것을 본 적이 있기에 그녀도 도마 한켠에 썰어놓은 양념이랑 버섯을 그 안에다 다 털어 넣었다. 맛은 보지 않았다. 


 잠시 후 누리끼리한 죽 비슷한 것이 완성되었다. 그녀는 상에다 그것과 간장 종지를 얹고 반찬 그릇을 좀 더 채운 후 수저와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고 다시 방으로 끙끙거리며 가져갔다. 롤리마을 집에서도 거의 안 해본 밥 짓기를 여기서 다 하다니. 그녀의 마음은 무척 심란했지만 침을 꾹 삼키며 서운함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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