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쾅쾅쾅, 쾅쾅쾅쾅,”
천지를 떨리게 하는 천둥소리가 지원과 사행단의 귀를 멍멍하게 하였다. 통주에서 천진까지 이르는 운하 ‘노하’에 운집해 있는 배들이 쏘아대는 포성소리였다. 넓은 강에 쭉 늘어서 있는 배들의 모양새가 마치 물 위에 만리장성을 세운 듯 끝도 없이 계속 이어져갔다. 용을 그려 넣은, 십만 척이 넘는 큰 배들의 선창 위에는 곡식이나 전국에서 들여오는 다양한 물품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 선박들이 통주에 모두 집합하게 된다니 이 또한 연경의 장관 중 하나라 칭송할만하리라.
지원은 삼사와 함께 월파정상인(月波亭喪人), 즉 ‘달빛물결의 정자집 상주’란 별명이 붙은 배에 올라 구경을 마친 후 뭍으로 내려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원의 말이 옆의 수레와 부딪쳐 사고 날 뻔하기가 벌써 여러 번이었다. 그는 장복에게 조심하라고 연이어 타이르는 중이었다. 그 정도로 수레와 말, 사람이 빽빽이 길 위에 뒤엉켜있어 서로 오가기조차 불가능하고 가는 속도 또한 거북이처럼 느리기만 했다. 동문에서 서문으로 이르는 5리 동안 지원이 대충 세어보니 외바퀴수레만 수만 대 이상이었다. 숨통이 좀 트이자 그는 말에서 내렸다. 인파를 뚫으며 나아가다가 고개를 드니 저자입구 현판에 ‘만수운집(萬艘雲集)’이라 적혀있었다. 주변 가게를 살펴보니 그 풍요로움과 화려함이 전에 지나왔던 성경이나 산해관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눈을 돌릴 때마다 여기도 번쩍 저기도 번쩍하였다.
이게 바로 조선 친구들이 그렇게나 칭찬하던 연경(지금의 중국 북경)의 시작이구나.
그의 가슴은 아름다운 세상을 처음 접한 아기의 심장처럼 팔딱팔딱 뛰고 눈꺼풀은 마치 감는 법을 잊어버린 듯 휘둥그레 떠지어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아, 연경이었다. 여기를 오려고 진자리 마른자리 그 가지가지 생고생들을 다 견뎌온 것이리라.
‘내 여기서 진정으로 보고 듣고 느껴보리라. 그리고 그 생생한 감동을 그대로 조선에 전하리라. 정말로 대단해. 이런 세상이 있었다니. 그동안 너무 좁은 우물에 갇혀 살았었어.’
놀라서 떡 벌어진 그의 입이 당최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의 뒤로 처음 사행단에 끼어온 조선인들 역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듯 이런 신세계에 매혹됨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며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웬 세상에 이리도 사람이 많은가 싶었다. 정말 인간들이 징글징글 벌레처럼 보일 정도로 많았다.
돌에 조각한 수백 마리 사자들을 얹어놓은 난간과 무지개다리로 이루어진 영통교(永通橋)를 지나갔다. 마치 조각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 다리를 건너는 그를 향해 떼거지로 으르렁거릴 것만 같았다. 순간 전날 마주친 백호가 떠올라 가슴이 철렁해진 지원이었으나, 돌을 깐 길 위로 쇠수레바퀴들이 마주치며 내는 시끄러운 소리에 곧 정신이 하나도 없어졌다.
동악묘에서 삼사가 관복을 갖춰 입고 높고 낮은 반열을 정비하였다. 통역관들이 먼저 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청관리의 예복인 망포수보를 입고 조주를 목에 걸고 있었다. 그들이 말을 타고 앞에서 인도하여 조양문(朝陽門, 북경의 동쪽문)에 이르렀다. 사방에 먼지가 하늘에 자욱하여 눈 뜨기가 쉽지 않은 가운데 몰통 실은 수레가 길 주변으로 물을 뿌려대고 있었다.
사신은 곧장 예부로 향하였다. 조선의 공식적인 외교문서인 표문과 자문을 바쳐야 했기 때문이다. 건륭황제는 지금 열하에 계신다고 전해왔다. 박지원은 정식 단원이 아니기에 바로 헤어져 다른 이들과 함께 조선 사관으로 향하였다. 앞에서 그들을 안내하던 한 중국 관리가 뭐라고 떠들어댔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수역이 고개를 끄덕인 후 지원에게 곁눈질하며 고갯짓을 보내왔다. 전날 ‘호루스의 눈’이 그려진 푸른 돌 때문에 목숨을 건진 그였기에 이젠 수역이 그저 동행인이 아닌 삶의 은인처럼 여겨지던 터였다. 그래서 지원 역시 더욱 정성 들여 화답의 미소를 그에게 지어 보였다.
사관은 첨운패루 안, 큰 거리 서쪽 백묘의 왼쪽에 위치해 있었다. 앞 담이 10여 칸으로 모란을 새긴 벽돌을 쌓아 올려 밖에서 보기에 화려하고 좋았다. 지원은 기대감을 잔뜩 안고서 견고하고 단단해 보이는 나무 대문으로 들어서는데 수역이 어느새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간 채 지원에게 운을 띄었다.
“참 잘된 일이지 않습니까? 전에 숙소로 썼던 건어호동(乾魚衚衕)의 회동관이 불타버려 이제 여기 서관으로만 사행단을 맞이한다니 말입니다.”
“여기서 머무는 게 그리 잘된 일인가? 듣기로 이전의 회동관이 더 크고 화려하다 하던데.”
그 말을 들은 수역의 두 눈이 놀라 휘둥그레졌다. 아니 이런 답답한 양반이 있나란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부정했다.
“아이고, 이번이 처음이라 잘 모르시나 봅니다.”
“무엇을 말이냐?”
“회동관이 그 유명한 흉가라지 않습니까?”
“(지원의 눈이 번쩍 떠지며) 휴응..가?”
"예. 원래 강희제 시절 도통 만비의 집으로 만비가 피살되고 집안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자결하여 귀신이 많이 나타난다고 아주 유명하답니다. 에휴, 그래도 지난번까지 별말 없이 꾹 참고 우리 사행단이 숙소로 이용했었는데 마침 불이 나 소실되었다니 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전 거기서 머물 때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없었고 변소 갈 때마다 머리끝이 쭈뼛거리는 게 영 찝찝했었습니다. 한밤중엔 이상한 울음소리도 들었습니다. 정말입니다요.”
지원은 자신이 왔을 때 다행히도 그런 곳은 아니어서 잘되었다 속으로 기뻐하였지만 겉으로는 체통을 지키어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전당에 위치한 방을 배정받았다. 방의 크기는 아담하고 방바닥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그러나 밖에서 듬직한 대문과 멀쩡한 건물을 보았을 때의 기대와는 달리 방안은 아직 수리를 완전히 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창문과 문의 창호지가 군데군데 떨어져 있고 책상이나 침상 등 놓인 가구들 역시 대국답지 않게 소박하였다. 아마도 그나마 나은 방은 정사와 부사 등 삼사에게 먼저 배정했으리라. 다행인 건, 방이 구석에 위치해 있어 지나다니는 시선들에게서 벗어나 매우 조용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그동안 써온 일기 공책들을 차례차례 정리하며 짐을 풀었다. 방 때문에 살짝 김이 새긴 했지만 꿈으로만 그리던 연경구경을 할 생각에 다시금 마음이 설레고 행복해졌다. 실컷 보고 느끼고 중국 선비를 많이 만나 친구로 사귀리라. 짐정리를 대충 마친 후 그는 침상에 누웠다. 그동안의 여독 때문인지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얼굴을 간지러 폈다. 어디서 불어오는 걸까? 한쪽 눈을 살짝 떠보았다. 자리에 누웠을 때 들어오던 햇살은 어느새 사라지고 어둠이란 손님이 방안으로 바짝 내려앉아 있었다. 아마 창문이 살짝 열렸나 보다. 아늑한 이불속이 좋아 여전히 꼼지락거리던 그때였다. 단단하고 묵직한 뭔가가 어둠을 타고 그를 확 덮쳐왔다.
“아이고, 웬 날벼락이야!”
온몸을 강타하는 큰 충격에 잠이 화들짝 깨어버렸다. 그는 자신을 덮친 것을 옆으로 밀쳐내며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재빨리 등잔에 불을 붙이었다.
세상에나, 저게 뭐래? 연두색 저고리에 주황색 치마를 차려입은 한 소녀가 저쪽 벽으로 내팽개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얼굴은 벽 쪽으로 향하고 길게 따서 빨강 댕기를 댄 머리는 그에게로 향해져 있었다. 허리에 올려진 그녀의 손목에는 새빨간 네모상자 같은 것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는 처음 봐서 몰랐지만 핸드백이었다.
그녀가 누운 반대편 벽면에서 사람이 나올만한 크기의 검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바람은 그곳에서 불어 나오고 있었다. 구멍은 점점 작아지더니 곧 닫히며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