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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Jan 28. 2024

8. 수진이 조선 사행단에 끼다. - 2


 다행히 다친 데는 없는지 소녀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더니 뒤돌아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확대되었다. 그 안에 서린 긴장의 빛도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마치 오래 떨어져 있던 가족이라도 만난 것처럼 정다운 눈길로 그녀가 자신을 쳐다보는 게 아닌가? 여전히 얼어붙은 그는 말로만 듣던 처녀귀신을 여기 먼 이국땅에서 보게 되는구나 싶어 얼굴은 사색이 되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푸른 돌을 어디에다 두었더라?’


 그는 봇짐이 있는 책상 쪽으로 바닷게처럼 옆걸음질을 쳤다. 냉큼 그것을 집어 안고 안을 마구 뒤지는데 문득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등짝을 꾹꾹 누르는 느낌이 났다. 공포에 질린 그가 팔을 뒤로 홱 젖히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썩 꺼지지 못할까, 이 귀신아! 회동관에서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냐? 냉큼 물러가라!”


 그는 겨우 찾은 돌을 손에 꼭 쥐고서 뒤돌아섰다. 그런데 소녀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더니 주저앉아 울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다지 예쁜 얼굴도 아닌데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된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그였다. 참으로 그녀의 얼굴이 못나 보이고 엉망진창이었다. 


“박지원 아저씨, 저 수진이예요. 도대체 이게...”


 그녀가 울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입 옆으로 침이 질질 새어 나왔다. 정말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못난 꼴이었다.


“경복궁에 큰 화재가 났어요. 다 타고 그래서 놀라..”

 

 지원은 그 말에 화들짝 놀라 바로 정사에게 보고하려고 방에서 튀어 나갈 자세를 취하였다. 임금은 무사하려나? 아, 이 일을 어쩌지? 여기서 사행을 접어야 하나? 그러나 그녀의 다음 말이 바로 그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의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던 폭풍우가 차갑게 가라앉으며 잔잔해졌다.


“해치가 저에게 환상 속에 있다고. 그것이 저를 태우고 경회루 연못으로 갔는데 석상들과 잡상들이 불을 끄느라 난리를 치고,... 연못에서 용이 튀어나와...”


 아이고, 이 아이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가 쏟아내는 말은 하나같이 꿈에서 보았음 직한 환상 속의 이야기였다. 경복궁 화재는 뻥이 틀림없었다. 그나마 그녀가 조선말을 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지만 말이다. 그녀가 입은 옷도 고국에서 보던 것과 좀 다르긴 해도 조선의 옷이었다. 조선의 아이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아까 벽에 생긴 그 검은 구멍은? 그것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모르겠다며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평정을 되찾은 그녀가 그의 복장을 유심히 살피더니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아저씨, 저처럼 한복을 빌려 입고 광화문에 사진 찍으러 오셨어요? 꽤 그럴싸해 보이네요. 어느 한복집에서 빌리셨어요?”


“무슨 소리냐? 이건 빌려 입은 게 아니라 내 옷이다. 그런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것이냐?”


 지원은 불현듯 그녀가 처녀귀신이 아닌가란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도대체 만난 기억조차 없는데 어떻게 자신을 알고 있는 거지? 그것도 아주 먼 이국땅인 중국에서. 


“지원 아저씨, 저 수진이잖아요. 황수진. 진짜 왜 그러세요? 아저씨가 선물로 이것도 주셨는데 생각 안 나세요?”


 울음을 그친 그녀가 빨간 핸드백을 앞으로 들이밀며 그를 흘겨보았다. 그리고 문으로 다가가더니 힘차게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주변이 싸해지며 고요해졌다. 


 잠시 후 얼굴이 하얗게 사색이 되고 입에 거품을 문 채 그녀가 마당을 가로지르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문을 닫고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문짝에 등을 기댄 채 숨을 헐떡이며 서 있는데 허술해 보이는 저 문이 혹 뒤로 나가떨어지면 어쩌나 그의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외교사행단으로 와서 기물파손까지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만 떨어지라고 경고하려는데 그녀가 두 주먹을 불끈 쥐더니 그를 향해 울먹이는 목소리로 칭얼대었다.


“밖에서 지금 사극을 찍는지 다들 옛날 옷을 입고 있어요. 중국옷도 있고. 여기는 경복궁 어디쯤인가요?”


 얘가 완전히 돌았나? 뜬금없이 조선의 왕이 계신 한양의 경복궁이라니. 쯧쯧, 아주 실성했나 보군. 지원은 이제 그녀가 귀신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성의 없이 맞받아쳤다. 


“여긴 조선이 아니고 중국이다. 것도 연경에 있는 조선사관 안이야. 난 청나라 건륭황제의 만수절 때문에 조선 사행단에 껴서 온 거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지 모르겠다만 어서 여기서 나가줘야겠다.”


 조선 사행단? 청나라? 비록 공부와 담을 쌓은 그녀였지만 ‘조선’이나 ‘청나라’ 정도는 드라마에서 봐서 알고 있었다. 지금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고 계신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서글프게 만든 건 따로 있었으니, 바로 그가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단번에 그를 알아봤고 이름도 알고 있는데 말이다. 분명 롤리마을의 ‘초록갓 아이스크림’ 가게의 박지원 아저씨와 얼굴과 목소리가 똑같고 이름도 같은데, 아무리 봐도 그가 분명한데. 어머, 그럼 혹시 내가 과거로 온 거야? 드라마나 영화에 자주 나오는 시간여행 같은 거? 


 불안하고 초조해진 그녀가 문짝에서 떨어졌다. 그제야 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그대로 서서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진지한 눈초리로 그를 향해 다시 물었다. 제발 자신의 추측이 틀리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아저씨, 지금 몇 년이에요?”


“건륭 45년이지 않느냐?”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못 알아들어요. 그럼 지금 조선의 왕은 누구세요?”


 얘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싶어 그는 대답하기조차 싫었다. 그러나 이왕 말문을 텄고 곧 내쫓을 테니 알고 싶은 거 다 알려 주마 란 마음으로 화를 억누르며 대답했다.


“조선 제22대 임금이신 정조 4년이다.”


 정조라고? 그녀의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지고 얼굴은 얼음장처럼 창백해졌다.


 사극 드라마에서 봤던 정조 임금 시대라고? 


 둔부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큰 충격에 빠져 그녀는 잠시 그대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바닥으로 주저앉더니 그대로 자기 팔을 베개 삼아 옆으로 누워버리는 게 아닌가? 그녀의 해괴한 행동에 놀란 지원이 그녀에게 다가가서 팔을 흔들어댔다. 


‘단단한 살이 있는 걸 보니 귀신은 아니군.’ 


 그는 그제야 분명히 알아차렸다. 


 그녀가 팔로 그를 확 제쳤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사나운 어조로 툴툴거렸다.


“제가 아직 꿈을 꾸고 있나 봐요. 다시 자고 일어나면 꿈이 깨어 있을 거예요. 방해하지 마세요.”

 

 그렇게 누워버린 그녀는 곧 잠이 들었다. 어찌나 잘만 자던지 코를 약간 골기 시작했다. 좀 전까지 충격에 빠져 부들부들 떨던 그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지원은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소녀이고 정신도 온전치 않은 것 같아 불쌍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그녀를 안아다가 자신의 침상에 눕히고 이불까지 잘 덮어주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자초지종을 물어 쫓아내야지.’


 깊은 잠이 든 그녀를 향해 쯧쯧 혀를 차며 그는 돌아섰다. 엉성해 보이는 문짝을 조심히 닫으며 밖으로 나가보았다. 구름이 잔뜩 끼어 하늘의 달과 별이 가려지고 비가 오려는지 물기를 머금은 공기가 꽤 축축해졌다. 저녁을 짓는지 안채 쪽에서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신발소리와 말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고 구수한 밥 냄새가 넘어왔다. 하인이 그에게 다가오더니 정사의 식사 초청을 전하기에 그와 함께 정사가 있는 정당(正堂)으로 향하였다.



 지원은 정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들고 술도 마시었다. 처음 책문을 넘어선 이후 비와 홍수, 더위와 싸워가며 운이 나쁘면 하루에 강을 일고여덟 번이나 건너면서 행여나 만수절 일정에 늦지 않을까 늘 길을 재촉하던 정사였다. 그의 얼굴에서 늘 걱정이 떠나지 않았었다. 연경에 도착하고 나서 좀 여유를 가지신 듯하더니 어째 그의 안색이 또다시 편치 않아 보였다. 지원이 어디 불편하신지 묻자 그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까 잠깐 졸았는데 아 글쎄, 우리가 열하로 향하고 있지 뭔가? 그 길이 마치 실재처럼 또렷하다네.”


“지금까지 너무 걱정을 많이 하셔서 그렇지요. 이젠 다 도착하였고 아직 별 기별도 없으니 그저 마음 편안히 잡수시고 쉬십시오. 뭐, 별일이야 생기겠습니까?”


 정사는 그의 말에 옅은 미소를 지었으나 여전히 불안하고 뒤끝이 깨끗지 않은 표정이었다. 사신으로서 그의 세심하면서도 강한 책임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문득 지원의 눈앞이 환해지면서 번쩍하였다. 그의 꿈 이야기처럼 아까 자신도 잠들었다가 이상한 꿈을 꾼 것이 아닐까? 혹시 잠이 덜 깨어 환각을 본 게 아닐까? 왠지 그럴 것만 같았다. 


 술자리를 끝내고 저녁 인사를 드린 후 그는 전당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었다. 문 주위가 아주 조용하였다. 역시나 아까 꿈을 꾸었나 보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문을 열고 자신만만하게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이런, 그 아이는 여전히 자신의 침상에서 세상모르게 쿨쿨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크게 실망한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문을 닫고 마루로 나와선 대자로 드러누웠다. 볼 사람도 없거니와 안보다 밖이 바람이 통하여 시원하기도 하였다. 그녀를 어찌할지 골머리를 썩이는 가운데 그는 스르륵 잠이 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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