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은 호랑이와의 대면에서 살아난 것에 감격 또 감격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살려 연경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준 하늘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전혀 몰랐지만 사실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한 부적에게도 속으로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그는 죽다가 살아난 사람처럼 정신 나간 너털웃음을 잠시 짓다가 바로 정신을 차리었다. 풀어헤친 봇짐을 주섬주섬 챙기고 부적을 소중히 그 안에 집어넣었다. 다음에 부적 파는 곳을 지나면 여러 개 더 사리라 굳게 다짐까지 하면서. 그러다 문득 창대가 떠올랐다. 그는 괜찮을까?
지원은 얼른 봇짐을 등에 짊어지고 아까 창대가 도망친 방향으로 냅다 뛰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목이 터져라 창대를 불러대며 찾기 시작하였다. 다시 호랑이를 마주친대도 부적이 있는 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무식한 자가 더욱 용감하다고 그 누가 먼저 말했던가?)
하지만 마두의 대답은 그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 운이 좋지 못해 이미 잡아먹힌 것은 아닌 가 심히 걱정이 들었다. 그럴수록 더욱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우렁차게 불러댔다.
어느 한 인가에서 잠옷 차림의 남자가 횃불을 든 채 대문을 열고 나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여기선 밤이 일찍 찾아와 다들 잠자리에 일찍 들곤 하였다. 그래서 아까부터 그렇게나 인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소매로 눈을 비비었는데 잠결에 지원의 다급한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번 나와 본 것이었다. 지원이 손가락으로 땅에 호랑이 호(虎) 자를 적었다. 그러자 그는 잠이 확 깨며 소스라치게 놀라는 눈치이더니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가 문을 꽝 닫아버렸다. 지원이 담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죄송하지만 불이라도 좀 빌려주시오!”
조선말로 외쳤는데 어찌 찰떡같이 알아들었는지 그것을 담 너머로 휙 던져주었다. 횃불을 집어 든 지원은 홀로 동네를 샅샅이 뒤지며 수색을 펼치었다. 저 멀리서 마을을 둘러싼 성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자신의 말이 몸을 부르르 떨며 서성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기뻐하며 달려가 고삐를 냉큼 잡아 쥐었다. 말은 그새 안정을 찾았는지 꼬리와 몸을 흔들어 주인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하지만 창대는 없었다. 혹시나 싶어 오는 내내 땅바닥을 유심히 살펴보았었다. 핏자국이라도 있을까 싶어서. 그러나 전혀 없었다. 어느새 시간은 흐르고 흘러 서서히 동이 터오려는지 푸르스름한 새벽 기운이 마을 지붕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곧 닫혔던 성문이 열릴 터인데, 어서 창대를 찾아 숙소로 가야 하는데.’
마음이 다급해진 그는 말을 타고 마을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찾을 수 없었다. 성벽이 높은 것으로 보아 성문이 닫혔다면 호랑이도 분명 이곳 어딘가에 숨어있을 터인데 털끝조차 비치지 않으니 참으로 기이한 노릇이었다. 허나 창대의 아까 도망치는 꼴을 보아하니 워낙 날렵하고 잽싼 것이 설령 잡아먹히지는 않았을 듯싶었다. 호랑이가 아니라 귀신이 달려들어도 피하고 남았으리라.
‘아마 어딘가 숨었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겠지.’
그런 생각으로 위안을 삼은 지원은 수색을 중단하고 성문으로 달려갔다. 문이 처음 열리자마자 바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더 이상 지체하다간 사행단 일정에 피해를 줄 수 있었다. 듣기로 창대는 중국에 오기가 이번이 두 번째였다.
‘고놈 아침에 눈을 뜨면 곧바로 연경으로 향하겠지. 여기선 지척거리니깐.’
연교보에서 사행단원들이 아침을 먹고 막 떠나려는 준비를 마친 시각, 지원은 밤을 꼬박 새워 초췌해진 몰골로 겨우 시간에 맞춰 앞에 당도하였다. 호랑이를 만났다 하면 다들 턱 믿지도 않을 것 같거니와 괜한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창대의 부재를 묻자 지원이 걱정하는 투로 대꾸했다.
“아 글쎄, 친구의 청으로 지인의 집에 들렀다 나왔는데 그새 사라지고 없었소. 이 말만이 날 기다리고 있었소만.”
공식적으로 중요한 사신단원이 아닌 한갓 마두의 일이어서 그런지 다들 걱정조차 안 하는 듯했다. 지원의 하인인 장복조차 낄낄대며 지껄여댔다.
“분명 어디선가 취해서 곯아떨어져 있을 거구만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요. 연경에 먼저 도착해 있음 코는 새빨갛고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숙소로 기어들어올 겁니다. 장담합니다요. 아니, 저번 연행 때도 그랬다하덥디다요. 허허, 제 버릇 못준다더니.”
다들 여행의 목적지인 연경에 곧 들어갈 일만 남아서 그런지 얼굴에 생기가 돌고 활달한 에너지가 발산되었다. 여기저기서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며 여유를 부리고 깔깔거렸다. 이전의 아침들에선 전혀 볼 수 없던 놀라운 장면이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넌다든가, 길에서 소낙비와 천둥을 맞닥뜨려 덜덜 떨일 없이 당분간은 다리 쭉 뻗고 푹 쉴 수 있을 거란 희망에 다들 희희낙락한 분위기였다. 늘 조급해하던 정사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런 와중에 유독 지원의 얼굴만 어둡고 수척하였다. 제발 예상한 것처럼 창대가 무사히 연경 숙소로 어서 찾아와 주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 뿐이었다.
언덕길을 따라 힘차게 말을 모는 한 사람이 있었다. 독락사에서 조선 사행단과 지원을 조선말로 안내하던 바로 그 스님이었다. 길과 다리가 사방에서 밀려드는 수레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그는 어떻게든 이리저리 교묘하게 제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여 잠시 숨이라도 돌려야 될 것 같건만 그는 계속해서 말의 옆구리를 세게 찰 뿐이었다. 마치 등 뒤에서 쓰나미가 일어 물이 덮쳐오는 걸 피하기 위해, 아니 살기 위해 달리는 듯 매우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연경(燕京)으로 들어오고 북적이는 거리를 지나 서직문으로 향하였다. 곧 우아한 돔 지붕이 달린 성당이 환한 여름햇살 아래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었다. 연경에 있는 4개의 성당 중 서쪽에 있는 ‘서편 천주당’이었다. 천주당 입구에서 말을 멈추어 내렸는데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그만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옷이 찢어지고 무릎이 까져 피가 났다. 그러나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절룩거리는 발을 이끌고 찢어진 가사자락을 휘리릭 휘날리며 성당의 육중한 문 안으로 서둘러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