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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May 19. 2024

10. 연경 구경 - 1

10. 연경 구경


 전날의 황당하고도 공포로 물든 밤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음 날은 아주 맑게 개여 아침부터 푹푹 찌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아침 준비하랴 청소하랴 분주했을 시각이건만 어젯밤 사관이 발칵 뒤집힌 이후 온 집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했다. 한숨도 자지 못한 지원이 날이 밝자마자 시대와 수진을 깨워댔다. 그리고 사관을 나가 첨운패루(瞻雲牌樓) 아래에서 나귀가 끄는 수레인 태평차 하나를 빌려오라고 시켰다. 상방의 마두인 시대는 중국어를 매우 잘했다. 지원은 주방에서 날마다 받는 하루치 물품을 그에게 내어주며 돈으로 잘 환전해 오도록 시켰다. 


 돈이 마련되자 지원은 시대를 태평차 오른편에, 수진은 뒤편에 태우고 선무문(宣武門)까지 신나게 내달렸다. 문을 나설 때만 해도 모두의 마음은 무겁고 울적하였다. 그러나 막상 달리며 주변을 구경하다 보니 점점 잊혀지고 기분도 나아졌다. 오늘 아침 정사가 직접 관원에 나가 창대와 다른 이들의 일을 물어보고 처리할 예정이라 들었기에 지원은 우선 믿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은 정식 사신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니어서 사건을 처리할 어떠한 권한도 없었다. 그러나 마냥 방에서 불안하게 기다리고 있기보단 이왕 힘들게 온 곳이니 원래 계획대로 연경 유람이라도 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던 것이다.



 태평차가 선무문을 지나자 왼편엔 코끼리 우리인 상방(象房)이, 오른편에 남당천주당이 있었다. 수진은 과거 시대의 중국을 구경하고 있는 현실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중국영화에서나 보았던 사람들의 비단옷은 윤이 흐르며 아름다웠고, 옛 정서가 물씬 풍기는 기와집에다 귀한 물건을 파는 가게들까지,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광이 참으로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다. 아마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 경험한 해외여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아아, 동양적인 거리에 세워진 유럽식 천주당은 이 얼마나 이국적인 모습인지.

 과거로 온 것이 마냥 나쁘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물론 어제의 그 악몽은 빼고 말이다. 아직도 여전히 그 끔찍한 충격에서 다 헤어나진 못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강도가 점차 약해짐은 그녀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수레가 오른편으로 돌더니 사람들이 북적이는 ‘유리창’ 거리로 들어섰다. 수많은 서점과 골동품 가게들이 즐비한 거리였다. 그녀뿐 아니라 지원의 눈도 커지고 입도 자꾸만 다물어지지 못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시대는 이미 여러 번 왔던지라 별 감흥이 없는 표정이었다. 


 지원은 수레를 잠시 시대에게 맡겨두고 수진을 데리고 거리를 거닐기 시작하였다. 선무문에서 정양문까지 가로로 뻗은 다섯 거리가 다 ‘유리창’이란다. 모두 27만 칸이라고 아까 시대가 알려주었었다. 조선과 달리 이 으리으리한 대국의 규모에 지원은 저도 모르게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대단하구나. 이곳의 서점에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진귀한 책들이 가득할 것이고, 가게에는 태어나서 듣도 보도 못한 보배들로 넘쳐나겠구나.”


“거리가 무척이나 번화해요. 서울 명동거리도 여기엔 갖다 대지 못하겠어요.”


“명동이 어디더냐?”


 수진은 조선시대 사람인 지원에게 설명을 하자니 갑자기 골치가 아프고 귀찮아졌다. 그래서 흥분되고 좋은 기분을 괜히 잡칠 필요가 없다 여기며 대충 받아넘겼다.


“그냥 그런 데가 있어요. 중국은 정말 예전에도 대단했네요.”


 지원은 오류거(五柳居)라는 간판이 붙은 책방으로 들어갔다. 수진도 따라 들어갔다. 


“지난해 친구 이덕무가 여기서 책을 꽤 샀다는구나. 어디, 나도 한번 구경해 볼까?”


 수진에게 넌지시 말하며 눈을 반짝이는 그가 흥분된 표정으로 책이 쌓인 선반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수진은 비록 공부는 못했지만 갖가지 로맨스와 판타지 책을 읽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뭐 볼만한 것이 없나 기웃거려 봤지만 문제는 그녀가 중국의 한자를 전혀 모른다는 점이었다. 딱 펼치면 꾸불탕거리는 검은 건 글씨요 하얀 건 종이였다. 집에서도 신문이나 어디에 한자가 나오면 고개부터 돌리던 그녀였으니 바로 흥미를 잃어버리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그가 나올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밖에서 기다려주었다. 

 그가 몇 권을 사서 나오자 냉큼 그의 책짐을 그녀가 대신 들었다. 자신이 처한 본분과 위치는 재깍재깍 알아차리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를 지원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지원은 잠시 큰길 한복판에 멈추어서더니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변을 관찰하였다. 모든 것을 두 눈에 담고 머릿속으로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예전의 심양이나 산해관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이곳의 거리는 무척이나 번영하고 풍요로웠다. 과연 대국의 수도다웠다. 


 지금 이 모습을 그대로 조선에 보여준다면, 특히 청나라를 홀대하고 무시하는 양반사대부들과 왕에게 내민다면 얼마나 놀랄 것인가? 뒤로 훌러덩 나자빠지고 자기 수염을 잡아 뜯겠지. 


 정말 그렇게 하고 싶어 안달이 나고 오금이 저려올 지경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청나라에 대한 부러움과 시기, 질투가 그의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속에서 불이라도 난 것처럼 답답해지자 그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여 그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안 그러면 끓어 죽을 것만 같았다. 마치 수진이 조선의 왕이라도 되는 양 귀가 있음 직접 들어보라고, 내면에서 타오르는 분노와 속상함을 화산처럼 확 분출시켰다.


“보시오! 여기에 우리 조선의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중국의 오랫동안 내려온 제도에서 이익이 되고 본받을 만한 것들을 가로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저 청나라의 저력, 백성들이 누리는 훌륭한 문물제도, 서구와의 활발한 교류로 발전된 상공업, 실학에 대한 뜨거운 열의를 좀 보시오. 그런데 지금 우리 조선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당신들께서 오랑캐라고 여기는 저들의 모습이 우리가 상상하던 오랑캐란 말입니까? 우리보다 훨씬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있지 않소? 도대체 가난하고 초라한 우리와 비교가 되냔 말이오?”


 수진이 깜짝 놀라 토끼 같은 눈동자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주변 행인들이 곁을 지나치며 슬쩍슬쩍 그를 훔쳐보았다. 어떤 외국인은 “쯧쯧” 혀를 차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입에 거품을 물고 말을 이어갔다.


“내 진짜 오랑캐를 무찌르는 법을 알려주겠소. 먼저 저들의 것을 모조리 다 배워 와야 할 것이오. 농사, 누에치기, 도기제작, 대장간 기술 등 상공업 전반의 모든 발전된 기술과 훌륭하고 실용적인 제도를 다 배워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열(10)을 배우면 우린 백(100)을 배운다는 뼈를 깎는 다짐으로 백성의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명분이니 정덕(正德)이니를 주장하시오. 

 훗날 우리 조선 백성이 만든 몽둥이가 저들의 튼튼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대적할 수 있게 된 후에야 비로소 당신네가 말하는 “중국에 볼 만한 것이 없다.”라고 큰소리칠 수 있을 것이오. 왕이여, 지금 우린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것이외다. 변화하지 않으면, 근대화하지 않으면 저들에게 잡아먹힐 것입니다. 제 눈엔 그것이 분명히 보입니다. 어서 눈을 뜨셔야 합니다. 제발 눈을 뜨십시오!”

 

 그가 울부짖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몸을 사르르 떨었다. 수진은 혹시 정신이 나간 게 아닌가 싶어 그의 팔을 흔들어보았다. 그러자 정신을 차렸는지 그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게 한 말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말거라.”


 수진은 그가 언급한 기술력이 2024년 현재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IT 기술들과 비교하면 거의 철기시대의 화살촉처럼 원시적인 수준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기술들, 가령 인공지능(AI)이나 스마트폰을 본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러나 그녀는 입술을 다물어버렸다. 그의 독백에서 왠지 고독하면서도 뜨겁게 불타오르는 열망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롤리마을의 아이스크림 가게 주인 박지원과 겉모습은 같았지만 성격은 다른 분이었다. 조선을 정말로 사랑하고 좀 무뚝뚝하며 까칠했지만 강한 신념과 열정을 지닌 지식인이었다. 또한 섬세하면서도 단단하고 강인한 내면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아저씬 벼슬을 하고 계신가요?”


“아니, 난 아무 벼슬도 없단다. 그냥 자유로이 사는 영혼이라고나 할까?”


“왜요? 방금 말씀하시는 걸 보니까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실 것 같은데요?”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이라, 물론 조선을 아주 사랑한단다. 다만 당쟁으로 물든 조정이 싫고 거기서 부대껴 일할 생각을 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더구나. 난 어디에 갇혀 지내는 걸 매우 싫어하거든.”


 수진은 자세히 설명 안 해도 알겠다는 듯이 박수를 치며 목청을 높였다.


“아, 저도 잘 알아요. 조선에서는 벼슬을 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걸요. 그럼 아저씬 과거시험에서 낙방하신 건가요?”


“하하, 낙방이라? 뭐 결과적으론 그런 셈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하도 오래전의 일이라 가물가물하구나. 음, 그래. 기억나는 건 시험장에서 내가 제일 먼저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왔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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