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지하로 이어진 수많은 계단들을 내려갔다. 계단이 끝나자 높은 천장을 가진 석실이 나타났다. 밝은 형광빛을 품어내는 주먹 크기의 해파리 떼가 그 안에 가득 떠다녔다. 벽면을 따라 거대한 인어조각상들이 세워져 있는데 마치 침입자를 관찰이라도 하듯 그들을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석실의 정 중앙에는 거의 히든벅의 몸집만 한 조개껍데기 제단이 모셔져 있는데, 진주와 산호로 엮어 만든 아름다운 목걸이가 그 안에 놓여있었다. 그녀가 만져보려고 손을 내밀자 이안이 황급히 그녀의 손을 가로막았다.
“안 돼! 함정이야. 목걸이가 들리면 벽 어디선가 문이 열려 전기뱀장어가 들어온데.”
그 말에 그녀의 두 눈이 밤송이처럼 커졌다. 지원은 오른쪽 모서리에 놓인 남자 인어상에게 다가가 깨진 꼬리 틈새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계속 만져지지 않는지 혼자 끙끙 애를 먹었다. 도저히 안 되자, 그는 머리 바로 위에 떠 있던 해파리를 왼손으로 낚아채어 손전등처럼 잡아들고 틈새를 비추었다.
“아하, 여기 있었군.”
그가 튀어나온 손잡이를 앞으로 잡아당겼다. 돌이 밀리는 소리와 함께 벽면 정 중앙에 놓인 여자 인어상이 스르르 왼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임이 멈춘 후, 그 뒤로 작은 비밀통로가 나타났다. 모두 안으로 들어서고 조금 있다 돌이 밀리는 소리가 났다. 인어상이 본 위치로 돌아오며 통로를 완전히 막아버렸다.
좁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자 햇살이 내리쪼이는 하얀 계단들이 나타났다. 물에 잠긴 거대한 흰 바위를 깎아서 만든 것으로 위로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계단수가 많았다. 계단을 오르는 그들 옆으로 작은 물고기들이 몰려들었다. 몸을 묶고 있던 향쑥띠를 풀어헤치자 한결 몸이 가뿐해졌다.
드디어 수면 위의 마른 계단을 밟고 서자, 그들은 요란한 기침과 함께 코와 입으로 물이 튀어나오는 지저분한 광경을 연출하였다. 잠수시럽을 먹지 않은 이안이 우아하게 그들을 지나쳐 계단 끝 모래섬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섬 위에 우뚝 솟은 하얀 고성으로 뛰어가 후문 손잡이를 땅땅 내리쳤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노인이 튀어나왔다. 그는 깜짝 놀라며, 이안과 흠뻑 젖은 채 모래 위에 서 있는 일행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와 안면이 있는 지원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잘 계셨는지요?”
“네. 기별도 없이 오셔서.. 많이 놀랐습니다.”
노인은 회색 티셔츠와 회색 긴치마를 입었고, 140센티 정도 키에 몸은 삐쩍 말랐다.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대머리, 얼굴과 목의 피부가 쪼글쪼글하고 특히 목 밑으로 길게 처진 주름들이 인상 깊었다. 등 뒤로 큰 배낭 같은 것을 메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무게가 상당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들이 각자 자기소개를 하자 그는 느릿느릿한 말씨로 천천히 인사말을 건넸다.
“화이트캐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갑작스럽지만 왕자님의 친구분들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그가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서는데 그만 수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의 등에 메인 것이, 충격적이게도 배낭이 아니라 거북이 등껍질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온 이안에게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노인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속삭였다.
“이곳 관리인인 ‘거북영감’은 원래 바다거북이었어. 오랫동안 수양을 쌓은 후, 사람으로 모습이 변했는데 등껍질만큼은 너무 딱딱해서 변하지 못했데. 그래서 그대로 달고 있는 거야. 하지만 움직이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하셔.”
“얼마나 오래 수양을 쌓았기에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거야?”
“아마 400년 넘게 수양을 했다지.”
“400년? 그럼 그는 지금 몇 살인 거야?”
“얼핏 듣기로 100살 때부터 수양을 시작했다지 아마.”
그녀는 다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거북이가 오래 산다고 하지만 500살이 넘었다니.
어안이 벙벙해진 그녀는 그를 따라 성의 후문과 주방, 복도를 지나 큰 홀에 도착했다. 홀 한가운데에는 파란 산호로 만들어진, 어마어마하게 긴 타원형의 만찬용 식탁과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벽난로 앞에는 대왕조개껍질 안에 푹신한 해초 매트를 깔아 만든 소파가 여러 개 놓여있고, 높은 천장에는 보라색 수정을 깎아 만든 화려한 샹들리에가 걸려있었다. 그들을 소파에 쉬게 하고는 거북영감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느릿하게 말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셨으면... 침실 준비라도 해놓았을 텐데요...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얼른 준비해서 부르겠습니다...”
그는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위층에 올라갔다. 그리고 한참이 흐른 후에야 계단 위에서 손님들을 불렀다. 그들은 성의 정문을 바라보고 서 있는,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계단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정중앙의 벽면에는 그림이 한 점 걸려 있었다. 그림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성난 바다의 수면 위로 위태롭게 떠 있는 조각배 안의 여자와 물속에 빠져 목만 수면 밖으로 내놓은 남자가 있다. 그들은 서로를 애틋하게 쳐다본다>
수진은 주위를 둘러보며 자세히 관찰해본 결과, 이 성 자체가 조개껍질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천장과 바닥, 계단과 손잡이 난간, 벽과 문 등, 모든 것이 다 하얀 조개껍질을 겹겹이 붙여서 만든 것이었다. 각 껍질의 다양한 나선형 무늬와 질감이 합쳐져 성 내부를 매우 이색적이고 모던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히든벅과 지원은 2층에 위치한 방을 안내받았고, 그녀는 거북영감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 그의 행동과 걸음이 하도 느려 터져서 보조를 맞추느라 그녀의 속이 펑 터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그가 가리키는 방문으로 재빨리 달려가 붉은 불가사리 손잡이를 열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홍색 대왕조개껍질을 개조해 만든 침대와 소파, 산호로 만든 화장대, 고래 뼈로 만든 옷장과 책상 등이 마치 해저에 자리 잡은, 최상급 호텔의 객실이라도 들어온 것 같이 고급스러웠다. 화장대 위에는 그가 직접 채취해서 엮었다는 진주 목걸이와 팔찌가 한 움큼씩 쌓여있었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다시 복도로 나가더니 그 끝에 위치한 문을 가리켰다. 그것은 특이하게도 갈색 조개껍질로 만들어졌고, 노란 불가사리 손잡이가 달려있었다.
“저곳에 왕자님이 계시지요. 여기에서 최고 경치를 자랑하는 방이랍니다. 나중에 꼭 구경해보세요.”
이안이 그녀의 방문을 노크했다.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그는 싱글거리며 제안했다.
“내가 여기 구경시켜줄게. 같이 나가자.”
화이트캐슬,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이름처럼 새하얀 조개 성벽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하얀 지붕 위로 세 개의 첨탑이 올라가는데 탑의 지붕은 붉은 불가사리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성의 정문에는 두툼한 보라색 불가사리가 둥글게 몸을 말아 문손잡이를 대신했다.
수면에 잠긴 계단들이 위치한 성의 후문 쪽과 달리, 정문 앞으로는 하늘색 바다와 황금 모래사장이 시원스레 펼쳐졌다. 한쪽에는 야자나무와 바나나나무가 심어져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물에서 한참을 논 그들은 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수진이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이안, 이곳에서 얼마나 지냈어?”
“한 세 달 정도. 내가 일룸니아 궁전 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처음 눈을 뜬 곳이 바로 여기야.”
“어떻게 이리로 오게 된 거야?”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짓더니 파도가 막 빠져버리는 모래사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나도 몰라. 거북영감이 저기서 파도에 밀려와 누워있는 나를 발견했데.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난 뱀파이어로 변해있었고.”
그는 무척이나 괴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발견했다는 그곳을 응시했다. 다시는 회상하기 싫은 끔찍한 기억임이 분명했다. 그녀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였다. 그의 표정이 조금씩 펴지면서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어느 날, 지원의 집으로 편지 하나가 도착했데. 우표도 없고 주소도 없는데 겉봉투에 ‘박지원에게’라고만 적혀있었데. 죽은 줄로만 알던 일룸니아 왕국의 왕자가 살아 있으니 와서 데려가라는 설명과 함께 이곳 위치가 적혀있었고. 그는 곧장 나를 찾으러 왔고 함께 롤리마을로 가게 된 거야.”
“거북영감이 편지를 보낸 거야?”
“아니, 그는 전혀 모르는 일이래. 지원이 받은 편지에는 보내는 사람이 안 적혀있었어. 우리 중 아무도 자세한 내막은 몰라. 그냥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다는 것밖에는.”
그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별안간 손바닥으로 모래를 탁 내리쳤다. ‘어떻게 까먹을 수 있지?’란 후회와 ‘빨리 알려줘야지.’란 조급함이 엿보일 정도로 매우 중대한 일이 그에게 막 떠오른 것 같았다.
‘왜 저러지?’란 표정을 짓는 그녀를 향해 그가 사뭇 흥분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재촉했다.
“참, 우리 아까 뗏목 위에서 끝내지 못한 이야기가 있지? 잠수시럽 말이야. 그것의 재료들을 말해주려다 못했잖아.”
“아, 맞다. 그 안에 도대체 뭐가 들어간 거야?”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피식 웃어버렸다.
“별거 아니야. 그냥 좋은 것들로 만들어졌다는 것만 알아줘.”
“별거 아니면 그냥 얘기해줘도 되잖아? 도대체 내가 먹은 시럽 건더기는 뭐였냐고?”
그는 계속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녀가 하도 보채는 바람에 대답해주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곧 보일 반응이 재밌는 볼거리라도 될 것처럼 실실 쪼개면서 말이다.
“건더기는 내가 절구질에 익숙지 않아서 다 갈리지 않은 걸 거야. 자, 이제 말해줄게. 잠수시럽의 재료는 말이야. 왕두꺼비의 눈알, 물갈퀴, 심장, 허파와 네 발바닥, 대구의 아가미와 심장, 자정에 잡은 물뱀의 혀와 피 그리고 허파, 투명 해파리의 위와 장, 그리고...”
그녀는 그의 대답을 미처 다 듣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입에 손을 갖다 댄 채 화이트캐슬로 급히 뛰어갔다.
그날 저녁, 이안이 직접 그녀의 방으로 저녁식사를 가지고 왔지만 속이 안 좋은 그녀는 침대에 누워 끝내 먹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다른 일행의 걱정도 잠시, 다음날 아침이 되자 그녀의 식욕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전날 거른 저녁 분까지 다 먹어치워 거북영감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히든벅과 지원은 하루만 같이 지냈다가 다음날 바로 화이트캐슬을 떠났다.
지원은 이안에게 ‘샌드펜’이라 불리는 초록색 펜을 남기었다.
겉보기에는 문방구에서 흔히 파는 볼펜처럼 생겼으나 특별한 사용처가 있었다. 그것으로 벽이나 바닥 등 아무 데나 편지를 쓰고 난 후, 수신인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펜촉을 입 앞에 갖다 대고 “샌드”라고 소리 내어 말한다. 그러면 써놓은 편지의 내용이 사라짐과 동시에 제일 위쪽에 적힌 수신인에게 정확히 전달된다.
어떻게 전달되냐고? 수신인은 갑자기 어디선가 떨어진 종이를 받게 되는데 그곳엔 조금 전에 샌드펜을 이용해서 쓴 편지 내용이 적혀있는 것이다.
만약 수신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것을 펼친다면?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냥 백지로 보일 테니 절대 안심해도 좋다. 송신인과 수신인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편지의 내용을 들킬 염려가 없는 것이다. 물론 세상사 일이 다 그렇듯이 예외란 게 있음을 미리 알려둔다.
만약 독자 여러분이 지금 한 설명이 당최 이해되지 않아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짜고 있다면 당장 그만두시길. 앞으로 이것에 대한 예시가 종종 나올 테니 개미의 IQ만 지녀도 전혀 문제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진 역시 지원에게서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바로 캠핑킷 이층집에서 사용한 적 있는 ‘숙녀옷방 미니어처 모형’이었다. 그녀는 기뻐하며 모형이 들어간 투명한 반지 상자를 빨간 핸드백 안에 소중히 집어넣었다. 언젠가 쓸 일이 생길 거라는 즐거운 기대감과 함께 말이다.
이안과 수진은 그곳에서 한 달 넘게 지내었다.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어느새 그녀의 내부에서는 처음 도착했을 때의 설렘이 가시고, 심심함과 무료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안은 그의 방에 처박혀 며칠 동안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무시무시한 태풍이 섬을 지나가던 어느 밤이었다. 바다수영을 마치고 흠뻑 젖은 채 돌아오던 그가 방에서 막 나오는 그녀와 복도에서 딱 마주쳤다. 며칠 만에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그의 젖어있는 흰 티셔츠 아래로 커다란 루비 펜던트가 달린 금목걸이가 훤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거리었다.
“어머 그 목걸이는 뭐야? 나한테 좀 보여줘 봐.”
그녀의 들뜬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이 확 굳어지더니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돼. 저기, 난 피곤해서 빨리 들어가 쉬어야겠어.”
그는 마치 루비가 자신의 심장이라도 되는 양, 그것을 소중히 왼손바닥으로 가린 채 그녀를 재빨리 지나쳐버렸다. 그가 방으로 들어간 후, 그녀는 꼭 도둑으로 몰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팍 상하였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이 이야기를 거북영감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이 그녀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안은 그것을 너무 소중히 여긴 나머지 자거나 씻을 때에도 항상 걸고 있고, 남이 만지거나 혹은 감상하는 것조차 지독하게 싫어한단다. 그것에 대해 물어보거나 말을 꺼내는 것도 금기시했기에 알아서 지켜달라고 그는 그녀에게 부탁했다. 기특하게도 그녀는 이후 그 부탁을 잘 따른다.
하지만 가끔 이안을 쳐다볼 때면 옷 아래 가려졌지만 눈부시게 빛날 루비가 떠올랐다. 그러면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목에 건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 몰래 미소 짓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