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무언가가 파도에 떠밀려 수면 위를 이리저리 떠다녔다. 팔뚝만 한 물고기가 펄쩍 뛰어오르더니 그것을 한입에 꿀꺽 삼켜버렸다. 별식을 먹은 기념으로 물고기는 모험을 하기로 결심하고 평소 가보지 않던 구멍 안으로 용감히 전진해 들어갔다. 어두운 통로를 지나자 하얀 계단들이 가득한 곳으로 빠져나왔다. 밝음에 익숙지 않던 그것은 성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계단 위에 배를 댄 체 잠시 쉬어가려 했다.
그때였다. 별안간 두 팔이 억척스럽게 물속으로 들어와 그것을 재빠르게 휘감았다.
“와우, 잡았다!”
이안이 힘차게 물고기를 수면 밖으로 끌어올렸다. 마침 후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수진이 그것을 보자 환호성을 내질렀고 거북영감을 부르러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들은 여러 도구를 챙겨가지고 나왔다. 주전자 속의 깨끗한 물로 물고기를 여러 번 헹군 후, 그것을 구멍 뚫린 쟁반 위에 얹어놓고 바로 아래에 물을 비워낸 주전자를 받쳤다. 펄떡거리는 물고기의 배가 갈리자 피가 나와 구멍을 통해 아래 주전자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안의 일용할 양식이었다.
거북영감은 그것을 즉석에서 해체시키기 시작했다.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이안이 돕겠다고 손을 걷고 나섰다. 영감이 생선살을 발라내는 동안 그는 심심풀이로 쟁반 위에 얹어둔 위장을 갈라 뒤지다가 문득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바지 주머니 속에 재빨리 숨기었다.
그날 밤, 그는 혼자가 되어서야 그것을 꺼내보았다. 은색으로 코팅된 전단지 조각이었다. 위와 아래 부분이 많이 찢긴 상태였으나 다행히 가운데 글씨 부분은 구김밖에 다른 손상이 없기에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메리슨 폰데 캠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아주아주 오랜만에 다시 열리는 캠프는 ‘딥언더니아 왕국’의 ‘푸다크 별궁’에서 개최될 예정입니다.
브라잇 동맹원이라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고, 캠프는 3001년 우정의 달
(브라잇 동맹력으로 지구의 ‘2월’을 나타냄) 1일부터 10일까지 열흘간 진행될
예정입니다.
신나는 모험을 꿈꾸는 자, 딥언더니아 왕국에 대해 자세히 배우고 그 문화를 체험해
보고 싶은 자, 모두 주저할지 말고 바로 참여해 주세요.
참여하시는 모든 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등록은 캠프 전달 말까지며, 참가비는 1인당 금화 3닢입니다.
메리슨 폰데 캠프 위원장 버핏 하트만
삼 일 후, 이안과 수진은 밝은 햇빛이 비치는 인당수 밖에 서 있었다.
지난 이틀 동안 그가 몰래 성 밖으로 빠져나가 겨우겨우 모아 온 약재료들로 만든 그 끔찍한 잠수시럽을 그녀는 또다시 먹어야 했지만, 주방에서 훔친 꿀을 섞으니 먹기가 훨씬 수월했다. 거북영감 몰래 도망쳐 나온 이 날은, 햇살이 매우 강렬하게 호수 안에 비춰 들어 다행히 심청의 머리카락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예전에 박지원이 화이트캐슬 지하실에서 향쑥 더미를 발견하고 좋아했던 것을 이안은 겨우 기억해냈다. 그녀와 함께 지하를 샅샅이 뒤져 결국 그것을 찾아냈고, 풀띠를 엮어 그녀의 몸에 두를 수 있었다.
그러나 딱 하나 고생은 뗏목이 없어 호수 바닥을 걸어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양탄자 좀 꺼내봐, 수진.”
띠를 몸에서 다 풀은 그녀는 어깨에 두른 빨간 핸드백을 열었다. 그것은 자연 방수가 되어 안의 내용물과 가방 자체가 전혀 젖지 않았다. 마치 마법모자처럼 안에서 길쭉하게 말린 양탄자가 쭉쭉 꺼내어졌다. 이것도 캐슬 지하실 벽에 세워져 있던 것을 그가 발견한 것이다. 예전에 지원이 아케이드 출구 밖에서 샀던 것은 이미 그가 떠났을 때 가지고 가고 없었다.
그의 손끝에서 파란색의 형이상학 무늬가 찍힌 멋진 아라비아 양탄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그것을 살살 어루만지며 기분 좋게 말했다.
“오래되어 색이 좀 바랬지만, 감촉이 부드럽고 네 모서리마다 노란 술이 달린 것으로 보아 고급 양탄자가 틀림없어.”
“꼭 알라딘과 재스민 공주가 타던 것 같다. 떠나기 전에 이것에 이름 하나 정해 주는 게 어때?”
“그거 좋은 생각이다. 수진, 네가 하나 정해봐.”
“‘파란총알’ 어때? 총알처럼 빨리 날아간다는 뜻이지.”
“아주 좋은데. 파란총알, 딥언더니아를 향해 출발!”
그들을 태운 양탄자는 말을 알아듣고 앞으로 가던 방향을 오른쪽으로 확 틀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지어준 이름처럼 총알 같은 속도로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갔다.
반나절이 지나 구름이 뭉실뭉실 피어오르더니 하늘이 점차 깜깜해졌다.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고 곧 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양탄자가 젖어들자 비행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게다가 세게 내리치는 비로 인해 눈조차 뜨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더 이상 날아가기 힘들다고 판단한 이안은 두리번거리며 아래 숲을 뒤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그들 밑으로 조그만 통나무 오두막이 보였다. 아무도 살지 않는 듯 창문과 문이 떨어져 나가고 한쪽 벽이 약간 무너져 내렸지만 지붕은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어 비를 피하는데 큰 무리는 없어 보였다.
그들은 땅에 발이 닿자마자 양탄자를 머리 위로 치켜든 채 급히 오두막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엔 이미 먼저 온 임자가 있었다.
“확~”
짙은 어둠 속에서 성냥불이 켜지며 난쟁이의 얼굴과 실내를 동시에 비추었다. 난쟁이는 굉장히 놀랐는지 크게 치켜뜬 눈과 주먹코를, 손에 든 성냥불과 함께 앞으로 쑥 내밀어 어린 침입자들을 관찰하였다. 해로운 자들이 아니라는 걸 알고, 그는 앞에 모아둔 나무판자와 종이뭉치 위로 성냥을 툭 떨어트려 불을 지피었다.
오두막 안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입구에 서 있던 수진이 먼저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비를 피하러 들어왔는데 잠시 이곳에 같이 있어도 될까요?”
“당연하지. 어서 들어오렴. 여기 불 곁으로 오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옆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성큼 다가가 옆에 앉는 그녀와 달리 이안은 쭈뼛쭈뼛한 태도로 좀 떨어져 앉았다. 그는 다시 일어나 흠뻑 젖은 양탄자를 펼쳐 벽에 기대어 세워놓았다. 그는 난쟁이를 한번 흘겨본 후 그녀 옆에 놓인 빨간 핸드백 곁으로 머뭇거리며 다가와 앉았다.
비는 수그러들 기미가 없어 보였다. 장작불은 타닥타닥 타들어갔다. 난쟁이는 일어나 무너진 벽 쪽으로 가더니 바닥에 뒹굴고 있는 통나무 판자 여러 개를 주워왔다. 불 위에 그것들을 차근차근 쌓았다. 새로 넣은 장작에 불이 옮겨 붙으며 오두막 안은 금세 환해졌다.
비로 인해 축축했던 실내 공기가 따듯이 마를 때쯤, 그는 먼저 입을 열어 그들 사이에 흐르던 불편한 침묵을 깨뜨렸다.
“나는 미할 캐이브 란다. 보다시피 '딥언더니아'에서 왔지. 주문받은 물건이 있어서 ‘스위티니아’로 배달 가는 중이란다.”
“저는 황수진이에요. 이런 우연이 다 있나요? 저희는 딥언더니아로 가는 중이거든요.”
“오호, 그러니? 무슨 일로 가는 거니?”
이안이 바지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가 미할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그것을 펼쳐보고 미소를 지었는데 뭔가 애틋한 표정이 물씬 묻어 나왔다.
“아하, 잘 알고 있지. 딥언더니아에서 여태껏 한 번도 개최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이 처음이라지? 집에서 떠날 때 아들 녀석이 이것에 대해 얼마나 말을 많이 하던지. 아마 캠프에 가고 싶어서 그랬겠지. 하지만…(그는 말을 멈추고 종이 아래쪽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여기 적혀있다시피 참가비가 금화 3닢이지 않니? 우리 집 형편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액수거든. 대장간 일로 하루하루 겨우 먹고사는데. 다행히 카할이, 우리 아들이, 철이 일찍 든지라 보내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단다. 금화 1닢이었으면 어떻게든 해봤을 텐데 말이야.”
잠시 미할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듯싶었다. 이어진 그의 침묵에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장작불을 주시했다. 그러나 쾌활하고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다시 얼굴을 펴고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두고 보렴. 더욱 열심히 일해서 다음 캠프에는 카할을 꼭 보내고 말 거다.”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굳게 다짐하는 그의 솔직함에 이안의 마음이 동요되었나 보다. 그는 호기심을 보이며 먼저 질문을 건넸다.
“배달하시는 물건은 무엇이에요?”
“직접 보여주마.”
미할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 벽에 세워둔 배낭으로 다가갔다. 배낭이 얼마나 큰지 키가 대략 110cm 되는 그의 머리 위까지 올라갈 정도였다. 그가 배낭 안으로 들어가 숨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조여진 매듭 끈을 풀어헤친 후, 안에 가득 든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놓으며 그가 자랑스레 설명했다.
“이것은 디저트 전용 칼이란다. 칼날이 살짝 그어지기만 해도 뭐든지 깨끗이 잘리지. 초콜릿, 과자, 파이나 케이크 등이 부스러지지 않는단다. 더욱 놀라운 건 아무리 많이 써도 칼날이 10년 동안 무뎌지지 않는다는 거야. 10년 후에 내게 보내주면 적은 돈을 받고 다시 갈아 주니 평생관리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지.”
그가 치켜들고 흔드는 칼의 날이 얼마나 얇은지 마치 종잇장 두께와 같았다. 꺼내놓은 칼 상자만 무려 일곱 개였다. 그는 이제 배낭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 주섬주섬 무언가를 찾더니 밖으로 나오려 했다. 그런데 그게 잘되지 않아 안에서 발버둥을 쳤다. 결국 혼자 힘으론 불가능하자 그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얘들아, 얘들아, 나 좀 여기서 꺼내 주렴.”
그들의 도움으로 겨우 밖으로 나온 그의 손에는 칼 상자보다 더 큰 나무상자가 들려있었다. 상자를 여니 안에 냄비가 있었다.
“이것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한번 불을 지피면 그 열기가 세 달을 가는 냄비란다. 더욱 혁신적인 것은 이것을 사용하고 나서 설거지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그저 물 한번 넣어서 헹구어주면 설거지 끝!”
호기심이 발동한 수진이 직접 냄비를 받아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어 바깥까지 샅샅이 살펴보았다. 자신의 외할머니가 쓰던 보통 냄비와 별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진짜인가요?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데요?”
“진짜지 그럼. 내 손을 거쳐 간 부엌 도구는 결코 평범하지 않아!”
“와아, 그렇다면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시는 저의 할머니를 위해 하나 사드리고 싶어요.”
“지금은 여유분 냄비가 없지만 나중에 대장간으로 주문을 넣어주면 직접 배달까지 잘해주마. 이렇게 만난 인연으로 이 칼도 덤으로 줄게.”
“당장은 돈이 없지만 생기면 꼭 살게요.”
빗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그녀는 밀려드는 피곤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어느새 옆으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시간은 꽤 흘러 한밤중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흔들어댔다. 눈을 떠보니 이안이었다.
“수진, 일어나 봐, 어서!”
그녀가 졸린 눈을 비비며 겨우 일어났다. 자기 전까지 활활 타오르던 장작불은 불씨가 꺼져 어둠이 그들 주위로 내려와 있었다. 비가 그치고 구름도 걷혔는지 뚫린 문과 창문으로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다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있는 미할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였다. 다리가 걸려 넘어질 뻔 하자 이안이 잽싸게 다가와 그녀를 잡아주었다. 미할은 그녀의 발에 걸려 아팠을 텐데도 아무런 미동 없이 한쪽 귀를 바닥에 바짝 대고 있었다.
이안은 뻥 뚫린 창문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오두막 앞으로 나 있는 길을 이리저리 관찰하던 그가 문득 움찔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울창한 숲으로 가려진 길의 끝자락을 노려보았다. 그의 파란 눈동자는 밤이 되자 하늘색이 돌면서 야생동물의 것처럼 빛을 품어냈다.
바닥에 귀를 대고 있던 미할이 일어나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발뒤꿈치를 들어 창문틀에 기대어 선 채, 그 역시 이안이 노려보고 있는 방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저기 끝에서 큰 무리가 달려오고 있어. 땅의 울림이 장난 아니야. 곧 여기 앞을 지날 텐데 어서 숨어! 들키면 안 돼.”
잠이 완전히 깬 그녀는 뻥 뚫린 창문 오른쪽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섰다. 이안은 창문 왼쪽 벽에 섰고, 미할은 꼿꼿이 서도 머리끝이 창틀을 넘지 못하기에 그 아래에 숨었다. 그녀는 살그머니 고개를 창으로 빼내어 그들이 가리켰던 곳을 다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