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숲과 평원, 호수와 강이 영상처럼 빠르게 아이들 밑으로 지나갔다. 이따금씩 길을 가고 있는 사람과 난쟁이를 볼 수 있었지만 어젯밤에 목격했던 군사들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윽고 파란 총알이 땅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그들이 내린 곳은 이안보다 커다란 키에, 사방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푸른 옥수수밭이었다. 그들이 찾던 지하왕국 딥언더니아도, 하물며 그곳으로 안내하는 이정표 비슷한 것조차 하나 세워져 있지 않았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옥수수 빼고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의아해진 그녀가 길이 어디냐고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사실, 나도 와본 적이 없어서. 파란총알이 내려주면 딱 거기에 왕국이 있을 줄 알았거든. 내려준 걸로 봐선 분명 이 근처인데. 어디에 있지?”
수진의 얼굴이 순간 황당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드넓은 이곳에서 어떻게 찾나 싶었던 것이다. 그는 주변을 살펴보자며 그녀를 데리고 밭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동안 옥수수나무를 헤치며 이리저리 헤매었지만 어느 방향을 가나 다 거기가 거기인 것 같았다. 결국 그들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마치 출구가 없는 미로 그 자체라고 설명하면 될까?
옥수수나무 사이로 주저앉은 그녀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파란총알이 잘못 내려준 게 아닐까? 여기는 옥수수밖에 없는 걸.”
“그럴 리가 없어. 마법 양탄자는 꼭 목적지 근처에 내려준단 말이야. 이곳이 틀림없어.”
“양탄자가 너무 고물이어서 잘못 내려다 준거야. 이젠 길도 못 찾으니 아예 갖다 버리고 새로 사야 해.”
버리자는 말을 못 들은 척하며 그는 그녀 옆에 말없이 앉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정말 그녀의 말대로 그것이 낡아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나 싶기도 했다.
그는 이리저리 궁리를 하고 있었다. 뭔가가 옆으로 쓱 지나쳐갔다. 급히 일어난 그가 바람과 같은 속도로 따라잡아 그것을 낚아채었다. 놀랍게도 여자 난쟁이였다.
100cm 정도의 키에, 검은 머리카락을 파란 스카프로 감싼, 옅은 갈색 피부의 난쟁이는 갑자기 자신을 들어 올린 그를 보고 완전히 겁에 질려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녀의 손에 들렸던 바구니가 떨어지고, 안에 든 옥수수들이 땅바닥으로 확 쏟아져 내렸다.
“저의 피를 빨지 말아요.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한쪽 손엔 난쟁이를, 다른 쪽 손에는 옥수수를 주워 담은 바구니를 들고서 수진에게 되돌아왔다. 그녀가 뱀파이어가 아니란 걸 안 난쟁이는 의아한 눈으로 잠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곧 그의 팔 안에서 다시 발버둥을 치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안쓰러워진 수진이 그녀를 대신 받아 땅으로 내려주고, 그녀의 흐트러진 치마를 손수 펴주면서 친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는 너를 해치지 않아. 그러니 그렇게 겁먹을 거 없어. 이름이 뭐니?”
“우란, 우란이야. 정말로 내 피를 빨지 않는 거지? 저 뱀파이어가 말이야?”
“그럼. 저 뱀파이어의 이름은 이안이고, 난 수진이야. 그는 동물피만 마셔. 그러니 안심해도 돼. 근데 넌 단번에 그를 알아보는구나?”
“우리 딥언더니아인은 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어.”
우란은 그녀와 말을 트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아직 경계를 다 풀진 않았는지 검은 눈으로 계속 그를 주시하였다. 그가 몸을 움직이거나 한 발자국 앞으로 내밀려하면, 우란은 그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며 흠칫 놀라곤 했다. 그녀의 그런 반응이 꽤나 재미있었는지 그는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고, 급기야 큰 동작으로 그녀를 덮치려는 시늉까지 해 보였다.
“꺄아~”
그녀가 크게 비명을 지르며 수진의 등 뒤로 달려가 숨었다.
“그만 좀 멈춰! 얘가 겁먹었잖아.”
수진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그는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동작을 딱 멈추었다.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들린 상태로 말이다. 그 모습이 좀 우스웠는지 우란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수진이 그녀의 웃음에 전염되어 같이 따라 웃었다. 그도 미소를 지으며 동작 멈춤을 해지하고 편안히 섰다.
수진은 허리를 굽혀 우란과 같은 눈높이로 시선을 맞춘 후 진지하게 물었다.
“우란, 우리 좀 도와줘. 지금 딥언더니아로 가는 길을 찾고 있거든. 근데 길을 도무지 모르겠어. 네가 도와줄 수 있지? 넌 딥언더니아인 이니까 길을 분명히 알 거야. 그렇지?”
“응. 가르쳐줄 수 있지. 근데 거기에는 왜 가려는 거야?”
“메리슨 폰데 캠프에 참가할 예정이거든.”
이안의 대답을 들은 우란의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가다가 뒤돌아서서 그들에게 호통치듯이 외쳤다.
“뭐해? 어서 따라오지 않고.”
우란은 작은 몸집이어서 그런지 옥수수나무 사이에서 움직임이 매우 재빨랐다. 그래서 그녀를 따라잡기 위해 그들은 거의 뛰어야만 했다. 일직선으로 가던 그녀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왼쪽으로 길을 꺾었다. 좀 더 나아가다 또 코를 킁킁거리고 이번엔 오른쪽으로 꺾었다. 아이들은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 열심히 쫓아갔다.
어디선가 주변 나무들이 찰싹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전혀 불지 않는데도 옥수수들이 서로 부딪치며 딱딱 소리를 냈다. 수진은 한밤중의 사냥꾼들이 떠올라 그만 겁이 났다. 그래서 이안의 옷깃을 붙잡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앞서 가던 우란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그들 곁으로 다가와 긴장된 눈으로 하늘과 주변을 열심히 살피었다.
불편한 적막이 흐르고, 곧 나무 뒤에서 뭔가가 그들 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오호라, 남자 난쟁이들이었다. 그들의 턱에는 머리카락과 똑같은 색의 수염이 길게 매달려 있고 하나같이 험악한 인상들이었다. 우란에게 낯선 이방인들이 딸린 것을 본 그들은 다짜고짜 눈을 부라리며 경계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째려보았다.
“이자들은 누구지?”
왼쪽 턱 밑으로 조그만 혹이 달려있는 난쟁이가 수진의 곁을 빙빙 돌며 묻자 이내 안심한 얼굴로 돌아온 우란이 투덜거렸다.
“깜짝 놀랐잖아요! 난 또, 학(새)인 줄 알았잖아요. 제발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이들은 메리슨 폰데 캠프 참가자들이에요. 딥언더니아로 가는 길을 안내해주고 있었어요.”
“오호, 그렇다면야. 반갑네, 친구들.”
혹이 달린 난쟁이가 인상을 부드럽게 풀며 수진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였다. 그러자 나머지들도 이에 질세라 옥수수 바구니를 던져놓은 채 악수를 하겠다며 서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만 청할 뿐 이안에게는 손조차 내밀지 않았다. 그는 기분이 상했지만 아까 우란의 일을 이미 경험한지라 그러려니 했다. 그들은 다 함께 옥수수나무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지막한 구릉을 빽빽이 덮고 있는 나무 사이로 난쟁이들, 아니 정확히 예의를 갖춰 말하자면 딥언더니아인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자세히 보니, 나무줄기와 잎들이 뒤엉킨 덤불 뒤로 동굴 입구가 교묘히 숨겨져 있었다. 동굴 천장이 낮아 이안은 목을 굽혀 들어가야만 했다.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천장이 차차 높아지자 그는 곧 목을 편히 움직일 수 있었다.
벽에는 간간히 횃불이 걸려 있었으나 불길이 워낙 약해 동굴 안은 전체적으로 많이 어두웠다. 이곳 지리에 익숙한 그들과 어둠 속에서도 잘 볼 수 있는 이안은 마치 대낮의 길을 걷듯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수진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게다가 동굴 바닥까지 울퉁불퉁해 넘어질 뻔 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녀는 시선을 바닥으로 고정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히 내디뎠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키릴장막 아케이드 광장의 약국에서 본 올빼미 안약이 번뜩 떠올랐다.
‘여기서야 올빼미를 볼 일도 없으니 그것을 사용하기 딱이잖아. 다음에 보면 이안을 조르던가 해서 꼭 사놔야겠어.’
문득 그녀의 등으로 싸늘한 전율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서 가던 이안이나 우란, 다른 이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바닥만 보며 걷는 사이, 그들을 놓치고 만 것이다. 그녀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설상가상으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또 발생하였다. 그녀의 앞에서 동굴이 두 갈래로 나뉜 것이다. 딥언더니아로 안내하는 이정표나 표지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갈림길 앞에 선 채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스스로 가늠해보았다.
'왼쪽? 오른쪽?'
깜깜한 오른쪽과 달리, 왼쪽 끝에서 아주 희미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곳이 올바른 길임에 틀림없었다. 바닥에는 여전히 컴컴한 어둠이 내린 왼쪽 동굴로 그녀는 몸을 돌리었다. 채 몇 걸음도 들여놓지 못한 그때였다. 우란의 앙칼진 외침이 그녀의 등 뒤로 내리 꽂히었다.
“당장 멈춰! 거기는 함정이야!”
그 말에 수진은 발걸음을 딱 멈추었다. 그리고 바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녀의 신발 앞으로 엄청나게 깊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길은 신발 바로 앞에서 끊겨 저쪽 너머에서 다시 이어졌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뭔가 허연 것들이 여기저기 뒹굴며 형광 빛을 품어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해골과 뼈들의 인광이었다. 그 수가 상당히 많았다.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두려움과 충격으로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우란이 등 뒤로 다가와 얼이 나간 그녀의 손목을 잡고 동굴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녀는 갈림길 앞에 서서, 짧고 도톰한 손가락으로 왼쪽 동굴 끝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가리켰다.
“저것은 유인술이야. 많은 자들이 딥언더니아를 찾기 위해 여기까지 들어왔다가 저 빛을 따라가서 죽임을 당했어. 오른쪽이 올바른 길이야.”
그들은 깜깜한 오른쪽 동굴로 들어섰다. 나오자마자 이번엔 동굴이 세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또 왼쪽 동굴 끝에서만 노란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우란이 빛이 있는 왼쪽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수진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자 그녀는 오히려 수진의 손을 더 세게 잡아끌며 말했다.
“여기선 빛이 있는 왼쪽이 올바른 길이야.”
정말 그녀의 말대로 그곳에는 함정 없이 길이 쭉 이어져 있었다. 다음으로 불이 다 들어온 동굴 세 개가 나타났는데 가운데 동굴로 들어갔고, 그다음엔 왼쪽에만 불이 들어온 다섯 개의 동굴 중 가장 오른쪽의 불이 꺼진 동굴로 들어섰다.
수진은 처음에는 길을 기억해보려 노력했지만 비슷비슷한 동굴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오자 나중에는 다 포기한 채 그냥 그녀를 따라가기만 했다. 그렇게 몇 개의 동굴을 더 지나갔다.